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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2 마음속에 있는 지도 한장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제일 먼저 어디로 갈까 하며 목적지를 결정한다. 그러면서 가고자 하는 곳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가면 빠르게 갈 수 있을지 궁금한 마음에, 서둘러 지도를 챙겨본다. 결국 산다는 것도 마음속에 있는 지도 한 장 가지고서 떠나는 긴 여행 같다는 생각이다. 잠시 떠나는 것이 아닌, 삶이라는 여정의 지도를 따라 세상의 숱한 여러 갈래의 길 위에서 나만의 선택을 하고 또 가끔은 길을 잃고 막막한 무서움에 있을 때도 있지만, 뜻하지 않은 산들바람을 맞으며 숨차게 올라온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안도감에 서있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잘 알고 있다. 다만 모르는 척 아니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영원할 거라 착각하며 살지만, 모두가 같은 목적지의 같은 길의 끝이다. 모르는 거 투성이의 미국 생활에서 운전보다 먼저 배운 것이 지도를 보고 길을 찾는 법이었다. 넓디넓은 땅에서 처음 가보는 길을 가는 유일한 방법이, 지도를 보며 하나씩 길 이름을 읽고 더듬거리며 골목을 돌아 집 번호를 확인하면서 찾아가는 것이었다. 목적지를 찾느라 복잡한 길 위에서 조금 서성거려도 뒤를 따르는 차들도 이해해주면서 기다려 주던 시절이다. 작은 글씨의 동네 이름과 큰길이 만나는 교차로를 노란색 형광펜으로 길게 그으면서, 한번 왔든 길의 기억을 떠올리며, 잘도 돌아다녔다. 그러든 어느 날 짧은 여행으로 떠났든 남쪽 1번 도로가 심한 비바람으로 끊어져 있어 급히 지도를 보고 찾은 길에서, 너무 일찍 모퉁이를 돌아버려 황망한 산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체, 해는 저물고 이른 점심 탓에 배도 고프고 또한 자동차의 연료 표시도 거의 바닥으로 깜깜한 어둠 속에 갇힌 적이 있다. 막막함과 두려움으로 한참을 헤매다 어쩌다 올라선 산 귀퉁이를 돌자마자 갑자기 환해진 불빛의 길 위 주유소를 만나는 신비한 놀라움에 깊은숨을 내쉬며 큰 울음을 터트렸었다. 물론 삶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서두르지 않고 그나마 길을 잃지 않고 가려고 마음속 지도를 몇 번이나 보며 모퉁이를 확인하고 가지만, 가끔은 막다른 골목길과 짙은 먹색의 어둠 속에서 헤매이다 뜻하지 않은 경이로운 환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던 적도 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젠 색도 바래졌고 접어둔 네 모퉁이가 닳고 해어져 잘 보이지 않는 종이 지도와, 철들면서 챙겨본 마음속에 펼쳐져 있는 얼룩투성이의 낡은 지도 . 그 둘을 함께 품은 체, 기다란 미국에서의 삶을 여전히 살아간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2-06-02 자연인
까똑까똑….5분도 채 되지 않아 또 카톡음이 울린다. 이번에는 샛노랑색 서핑보드를 들고 서 있는 사진을 보내왔다. 하얗게 부서지고 있는 파도와 야자수를 배경으로 온통 검게 그을려 있는 모습은 원래부터 그곳 원주민인가 싶을 정도다. 모래사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다른 한장의 사진속에는 코코넛 워터와 바나나 꾸러미가 보인다. 그리고 사진 밑에 써 있는 한 줄의 메시지에 나는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넘 행복합니다. 나는 여기서 뼈를 묻을겁니다" 한 달 전쯤 한국에서 날아온 그의 갑작스런 통보에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이곳에서 대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대기업에서 승승장구 잘 나가더니 다시 미국으로 이주를 하겠다는 거였다. 십 년이상 성실하게 일한 댓가로 직급도 높아졌고 월급도 만족해 하더니 웬일인가 싶어 걱정이 앞섰다. 경제가 어려운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할 그의 앞길이 심히 염려 됐으나 우려했던 내 생각과 달리 그는 속전속결로 하와이에 짐을 풀었다. 도착 즉시 구두와 넥타이를 집어 던지고 현란한 꽃무늬 셔츠와 줄무늬 샌들을 신은 섬나라 하와이언으로 탈바꿈을 했다. 게다가 비타민 D 섭취를 위해 자동차를 구입하지도 않고 매일 10마일 이상을 걸어 다닌다는 이야기에 한국에서의 화이트칼라 샐러리맨 생활이 지겹도록 고단했음이 느껴져 안쓰러웠다. 오늘도 통화중에 나는 잔소리를 퍼부어댄다. "얘야, 해수면 상승으로 상어가 떼거지로 몰려 든다는 뉴스가 떴어. 제발 파도 깊이 들어가지마라." "에구 걱정마셔, 아직은 물이 차가워서 낮은 물가에서만 놀아요" "너울성 파도도 조심해야 혀" "엄마. 내가 애냐구. 제발 걱정은 그만해" "근데 아들아 너 수영은 할 줄 아니?" "아직은… 개구리헤엄 만 칠 줄 알지 머" "바다에 나갈때는 꼭 빨강 노랑으로 눈에 잘 띄는 수영복을 입으렴" "엄마. 진짜 왜그래? 짜증나…" 전화가 일방적으로 툭 끊긴다. "띵~~~" 나는 가 본 적도 없는 마이우섬의 검푸른 바다가 분명히 하늘을 닮은 평화로운 파란색 일거라고 믿어 버린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에 대고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얘야. 물고기를 좋아하더니 드디어 바다 자연인이 됐구나. 엄마는 산나물을 좋아하니까 훗날 산으로 올라가야겠다" 에스더 최(수필가) 버클리문학협회 회원
2022-05-02 집은 그 사람이다
누군가의 초대로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눈으로 냄새로 또 순간적인 느낌으로 모든 것이 보여지고 느껴진다.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그 안에 자리 잡은 채 보듬고 있는 모든 것 스스로가 낯선 사람에게 속삭이며 표현해준다. 다른 이들을 위한 넓이와 높이가 아니라 나를 위한, 선물 상자의 화려한 포장지를 벗겨내려는 조바심처럼 바깥의 나를 벗고 온전한 속살을 꺼내놓는 곳이다. 벗어버리는 시원함으로 무겁게 치장한 무게를 내려놓으면서 아무도 모르는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집이라는 공간이다. 맨 처음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입고 있는 옷과 모습으로 처음 마음이 시작한다. 조금씩 시간이 흘러가고 서로를 알아보면서 마음을 열고 편안해지는 어느 날, 자신이 사는 곳으로 초대하여 속내를 보여준다. 집이라는 건 이쁜 옷을 입고 진한 화장을 하고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하여 한순간에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나온 시간과 함께 동화되어 본인도 모르는 사이 삶의 눅눅한 자국들과 정성이 남아있는 곳이다. 몇십년 전 겨울 아주 많이 힘든 시기를 겨우 넘긴 후, 잃어버렸든 집이 그리워 다른 이들의 집을 놀러 다닌 적이 있다. 이쁘게 가꾸며 사는 모습이 부러웠고 언젠가 다시 집이 생기면 나도 그러리라 꿈꾸고 희망하였다. 시간이 흐른 후 결국 나만의 집을 갖게 되었고, 원하는 그림을 마음껏 벽에 걸고 오래된 골동품들을 꺼내 놓으며 숨겨둔 욕심을 아주 기다랗게 펼쳐 놓았다. 화려하지 않아도 크지 않아도 비싸지 않아도 아무 상관 없다. 다만 무엇을 품고 어떻게 견뎌내고 있으며 그동안 걸어온 긴 걸음들을 편히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가끔 한밤중 선잠에 깨어, 지금 있는 곳이 어딘가 싶어 구겨진 긴 잠옷 차림으로 온 집안을 휘휘거리며 돌아다니곤 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있는지 또 스스로 지니고 있는 지나온 흔적들은 괜찮은 모습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 이제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살고있는 공간 . 집이 바로 자신이 살아온 세월과 자욱들을 그대로 드러내는 거처럼, 더는 감추고 싶지도 포장하고 싶지도 않다. 아직도 여전히 큰 묶음으로 남아있는 시간을 나누며 살아갈 준비에, 설렌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2-05-01 피타 브레드
금요일 오후, 장바구니를 들고 마켓을 간다. 우선 매장을 한바퀴 둘러 보고 난 뒤 종이에 적어온 필요한 품목의 리스트를 보며 물건을 카트에 담기 시작한다. 아침식사용으로 계란과 라이스 밀크, 아몬드 밀크를 구입하고 블루베리와 아보카도를 이리저리 살핀다. 그러나 정육코너 앞에선 몇 주 전과 다른 가격표에 망설임을 반복하다가 슬며시 손에 잡았던 것을 내려 놓기로 한다. 나는 다시 냉동코너를 들여다 보다가 한동안 품절이었던 한국산 파전과 비빔밥을 발견하자 절로 미소가 번진다. 미국 마켓에 당당하게 진열되어 있는 우리나라 상품이 무척 자랑스럽다. 쇼핑을 끝낼무렵 빵 코너로 들어선다. 맛있게 만들어진 빵들이 고소함을 뽐내며 내 손을 기다린다. 하지만 나는 주저없이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는 그 빵을 선택하기로 한다. 그리고 혼잣말로 속삭인다. "내 사랑은 바로 너뿐이야." 집으로 돌아온뒤 나는 서둘러 그것부터 꺼내어 오븐에 올린다. 오븐 틈새로 살며시 퍼지는 구수함이 저 먼 중동의 모래바람을 실어 나를 그리스까지 안내한다. 어느새 부엌은 찬란한 황금 밀밭으로 넘실거린다. 어렸을 적 엄마가 가마솥 밥위에 쪄주던 쑥개떡 모양을 닮은 넓적한 이 빵의 반전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된다. 언제부터였을까? 한조각 빵을 입에 넣고 씹을 때마다 이스트를 넣지 않은 피터 브래드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입안에서 맴돌던 밀 반죽이 마침내 침샘에 녹여져 목구멍을 타고 흘러 내려갈 즈음 인생길 굽이굽이 돌아 여기까지 살아내는 동안 걸어온 삶의 대부분은 부풀어 오른 빵을 포장하고 있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스트를 넣지 않은 삶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한 여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학벌과 지위와 인물, 배경까지도 자랑하고도 남을 K의 스펙은 그녀를 아는 모든 이들의 부러움이다. 그러나 K는 언제 어디서나 결코 나대는 일이 없다. 원래 타고난 성품이려니 생각했으나 그녀의 고백으로는 중단없는 '내려놓음'의 연습이라고 귓띔을 한다. 대중앞에 서기라도 하면 때를 만난듯 자화자찬으로 흥분해 하는 나와는 사뭇 다른 그녀, 습관처럼 거품을 집어 넣었던 나의 일상생활의 흔적을 지우개로 말끔히 청소하기로 작정한 오늘, 이미 그녀를 닮고 있는 것 같아 즐겁다. 에스더 최(수필가) 버클리문학협회 회원
2022-04-01 눈 길
아침 내내 오락가락하던 빗방울이 오후 들어서는 시원하게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다. 밖을 내다보며 가뭄에 단비를 기대 했으나 스산한 날씨는 일찌기 하루를 마감하려는 듯 어둠을 끌어 당기고 있다. 다소 실망한 마음으로 곧 어두워질 거리를 응시한다. '이 맘때 쯤이면 병원 모퉁이를 돌아 왼쪽 샛길로 들어 설 시간인데…..' 날씨 탓인지 오늘은 유난히 그녀의 걱정이 앞선다. 기다리다 못한 나는 손전등을 손에 들고 현관문을 나서기로 했다. 그 때 저 멀리 벚나무 옆으로 애완견 루시와 함께 조심조심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휴~'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몰아쉰다. 이웃집에 사는 로즈 할머니는 늘 나의 관심안에 있다. 구십이 가까운 나이에도 매일 새벽 4시 30분을 시작으로 하루에 세 차례나 걷기 운동을 하신다. 위태로운 걸음 걸이로 좁은 도로를 지나 건널목을 통과하고 병원 앞을 지나 마트까지 오가는 규칙에는 날씨에 상관없이 변동이 없다. 오래전 혼자가 되신 로즈 할머니가 걷다가 행여 넘어질까 봐 조바심으로 지켜봐야 하는 나는 그녀의 출입시간을 꼼꼼히 체크해야 한다. 아직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의지 강한 로즈가 눈치채지 않도록 무언의 파파라치가 된 세월도 어느새 10년이다. 로즈 할머니를 항상 내 마음에 담고 있는 것처럼 나는 요즘 또 다른 노인의 모습이 눈에 밟혀 마음이 시리다. 러시아가 무차별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4주째, 그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우크라이나 백발의 할머니가 비닐 봉지를 손에 들고 다리를 심하게 절룩이며 필사적으로 탈출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 모습은 일제 침략으로 인해 우리 어르신들이 겪었을 뼈아픈 고통으로 내게 전달되어 온다. 권력과 탐욕으로 21세기 바벨탑을 쌓고 있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무모한 행보와 달리 군사적 무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손에 손을 맞잡고 뭉친 용맹한 우크라이나인들의 모습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역설적인 역사가 떠 오른다. 감히 정치계의 비하인드 내막을 알 수 없는 나로서는 그저 선한 사람들이 반드시 승리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포화 속에서 어린 러시아 병사의 겁먹은 눈망울과 다른 한편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고아들의 절망적인 눈빛의 교차점에서 나는 다시 푸틴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이기심과 욕심에 끌려 세상을 향해서만 돌진하고 있는 푸틴은 두 개의 눈을 가졌으나 실상은 애꾸눈이였음을 재차 발견한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실상은 내면에 들통나지 않은 이기심과 오만으로 나 역시 때때로 외눈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 길은 오직 나약하고 억울한 일에 눈물 짓고 있는 이웃을 향해 돌린다. 에스더 최(수필가) 버클리문학협회 회원
2022-04-01 음악
온종일 집안에 음악을 켜놓고 있다. 언젠가 들었던 것 같은 그러나 제목이 무엇인지 작곡가가 누구인지 이 곡을 만들어진 때가 언제인지도 모르는 체, 흘러나오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또 흘려보낸다. 구속이 아닌 그윽함으로 감싸 안으며 무엇을 하든 편안하고 보호받는 평화스러운 느낌이다. 어쩌다 마음이 좋지 않은 날은, 일부러 천천히 길게 오래 느껴 헝클어진 마음을 다른 곳으로 비껴가게 하려 다시 붙잡는다. 사실 어릴 적 우리 집에서는 유행가를 들을 수가 없었다. 절대적인 엄마에게 심하게 야단맞는 일이었으며 심지어 아버지께서도 좋아하는 배호의 노래를 들을 수가 없었다. 온종일 아픈 환자들을 치료하며 받은 피로를 - 차마 집에서는 엄마의 성화 때문에 듣지 못하시고 - 늦은 여름 해가 넘어가는 시간, 홀로 남은 병원에서 배호의 노래를 듣고 계시든 아버지가 떠오른다. 서쪽 황혼이 지는 오렌지빛의 노을을 한가득 얼굴에 담고서 "돌아가는 삼각지"를 들으며 먼 곳을 바라보고 계시든 중년의 아버지에게는, 바로 그 순간이 진정한 위로이었을 것이다. 남자의 어깨 위에 올려진 삶의 무게를 잠시 잊고 나 하나로서 그 자리에 계셨던 것 같다. 음악이 그처럼 위로가 되고 안식이 되는 순간들도 있지만, 엄마는 늘 유행가는 가만히 있는 사람을 흔들어 놓으며 오직여자와 남자의 사랑만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거처럼 만든다고 하시며, 사춘기의 나와 동생들에게는 큰 금지사항 중 하나였었다. 그렇지만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잠깐 들은 유행가를 순식간에 외우고서는 혼자 몰래 곧잘 불렀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픈 게 사람 마음이니까. 그때 엄마 모르게 듣고 외운 유행가들이 지금은 제일 잘 부르는 노래가 되었고, 그 안에는 또 다른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담겨있다. 이제는 음악을 듣는 방법도 내가 느끼는 감정도 세상을 사는 모습도 세월을 따라 참으로 많이 변했다. 그리고 어느덧 나도 그때의 엄마 모습으로 나이 들고 또 같은 소리를 하며 잔소리를 한다. 결국은 돌고 돌아 제자리에서 반복하며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가 싶다. 온종일 집안에 켜놓은 음악이 주는 위로와 추억과 편안함으로 삶을 다독이며, 무릎 꿇어 마루를 닦고 묻어있는 찌꺼기의 설거지를 하고 뽀얀 쌀을 씻어 윤기 나는 밥을 하며, 오늘 하루의 평범함으로 걸어간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2-03-02 신데렐라
어릴 때 누구나 신데렐라를 꿈꾼 적이 있을 것이다. 못된 계모 아래에서 힘들게 살고 있든 그녀가, 하나뿐인 유리구두의 주인을 찾으러온 멋지고 잘생긴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아름다운 궁전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 속 이야기이다. 그것은 더 나은 미래와 행복을 위해 지금보다 높은 곳으로의 신분 상승을 바라는 희망을 그린 것이다. 결혼한 후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하는 대화의 모든 것이 자신이 아닌 새로운 인연의 소중한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부모님 밑에서 보살핌을 받았던 곳에서 떠나 이젠 스스로 보살피며 지켜야 하는 무언가가 생기면서, 최선을 다하고 욕심도 부리며 어느덧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어간다. 아내에서 지나와 엄마로 살다 또 시간이 지나 손자 손녀들의 할머니로 신분 상승을 하며, 그동안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지나온 삶에 관대해진다. 평범한 거 같지만 지금 여기까지 지켜오는 동안, 세상 무엇도 쉬운 거 없었으며 애쓰지 않고 소중하지 않은 것 하나없는 대단한 것이다. 나 자신도 그렇게 남들처럼 순서를 따라 변해가며 살아가고 있고 또 그 자리에 맞게 익숙해져 간다. 그러나 다시 새로운 꿈을 꾼다.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며 또 할머니가 되는 자연스러운 삶의 순환 속에서, 하나 더 욕심을 부려 지금보다 나은 - 썩 괜찮은 어른이 되는 희망을 품으려는 것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꼭 내가 해야하는 것으로 내가 나의 신분을 상승해주고 싶다는 욕구이다. 무엇으로 어떤 것으로 다시 가슴 뛰게 만들며 시간가는 것을 잊고 몰두할 것인지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것을 위한 도전과 꿈을 스스로 억누르는 바보스러운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는 익숙함과 편안함을 변명하는 거 보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유리 구두의 주인공인 신데렐라를 꿈꾸며, 아름다운 궁전의 백마 탄 왕자님도 그려본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2-02-03 로또 당첨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은 나는 은근히 대박을 사모한다. 그 증세는 특별히 연말이나 연초에 표출되곤 하는데 2022년을 맞이한 1월에도 그 습관을 물리치지는 못했다. 그래봤자 1년에 한 번씩 집 부근 동네의 세븐일레븐에서 자동식 로또 번호를 뽑는게 전부다. 특별히 간밤에 희한한 꿈이라도 꾸었다면야 시험지에 모범답을 작성하듯 쓱쓱 용지번호에 동그라미를 치는 식의 방법을 선택하겠지만 나에겐 그런 일도 없다. 이런 나를 잘 알고 계시는 가까운 지인부부께서 새해 아침에 떡국을 나눈 뒤 선물로 로또를 사주신다고 하셨다. 뭔가 잘 될 것같은 암시를 받은 나는 확실하게 다짐받아야 할 것 같아서 몇대몇으로 당첨금을 나눌지를 먼저 여쭤보았다. "당첨금은 몽땅 자네 것일세. 난 돈이 필요 없어요" "그래도 미안하니까 7:3으로 할께요. 내가 7이고 선생님은 3" "후후후 걱정 말고 다 가지세요" "그렇다면 절대로 마음 변하지 마세요" 나는 구 십도로 정중히 인사를 드린 후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즉시 핸드폰에 증언을 남겨 두었고 로또를 사기 위해 빠른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가게입구의 전광판에는 엄청나게 불어난 파워볼의 당첨금숫자가 눈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드디어 선물해 준 만큼의 액수 모두를 게임에 투자한 용지를 손에 들고는 붕 뜬 마음으로 주차해둔 자동차에 도착했다. 아~~ 얼마나 흥분을 했는지, 방금 뽑은 번호를 들여다 보면서 자동차 문을 열다가 그만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파킹해 놓은 좁은 두 자동차 사이에 낀 나는 겨울 잠바를 입은 터라 아무리 용을 써도 일어날 수가 없는 곰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때 마침 옆에 세워둔 자동차 주인이 다가왔다. 눈 앞이 캄캄했다. 왜냐하면 자동차 문을 열면서 넘어진 터라 옆에 주차해 있던 그 비싼 럭셔리카 조수석 문을 들이 받았기 때문이다. 엎어진채로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내게 남자가 말한다. "Are you alright? Can I help you?" 넘어진채 그를 올려다 보며 내가 답했다. "Oh… I think I am okay. But I think I accidentally scratched your car..." "That's okay. Don't worry" 키가 큰 미국인 그 남자는 확인도 하지 않은채 빙그레 웃으며 가게 안으로 성큼 성큼 들어갔다. 한 겨울 매서운 바람이 열어 놓은 자동차 문으로 내 얼굴을 때린다. 그러나 긴장이 가시지 않은 탓인지 이마와 코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와우, 이런 것이 대박이구나... 그 멋지고 쿨한 남자의 뒷모습이 아른 거리며 살아오는 매 순간이 얼마나 큰 로또에 당첨 됐었는지를 나는 정말 깨닫지 못했다. 오늘도 심장이 정상으로 펌프질하고, 내 발로 걷고 또 내 손으로 일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도 목숨을 위협하는 델타와 오미크론 바이러스를 요리조리 비껴간 걸음 걸음은 오징어 게임의 승자보다 더 큰 당첨자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에스더 최(수필가)
2022-02-03 진심
진심은 손끝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진다. 그 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묻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며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변하지 않으며, 가슴 속 깊이 간직된다. 오래전부터 몇 달에 한 번씩 목에다 가느다란 바늘을 꽂고 검사를 한다. 목 한가운데 있는 갑상선에 결절이 생겨 그것이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알아내는 것이어서, 혹이 있는 곳을 찾아 정확하게 찔려야 하는 쉽지 않은 검사이다. 어떤 때는 파랗게 멍이 들고 또 어떤 때는 피가 흐르기도 한다. 한번이 아니라 큰 결절이 있는 곳마다 바늘을 꽂는 행동이지만, 조심하고 살피면서 되도록 목의 통증을 줄이려 배려하는 의사를 보며, 애써 아픔을 참는다. 그러면서 진심과 정성은 이런 것이구나 하며 감사한다. 진료 침대에 누운 체 아주 가까이에서 접촉해야 하는 검사라 일부러라도 살짝 향수를 뿌리며 예의를 지키려 애쓴다. 한동안 나의 목과 씨름하며 혹 안의 세포를 잘 뽑고 제대로 끝나면 밝은 미소로 의사는 늘 그렇게 말한다. "무슨 향기가 이렇게 아름다우냐, 덕분에 아주 잘 끝냈다." 하며 자신의 수고와 노력보다 나를 먼저 위로해준다. 아픔과 두려움의 순간을, 진심으로 문지르며 살빛 반창고 몇 개를 붙여주고선 행운을 빌어주며 진료실을 떠난다. 우습지만 왜 그렇게 그 반창고가 기특한지 병원을 나오면서 몇 번을 만져본다. 또 어느 날은 얇은 칸막이 하나로 구분해 놓은 옆방에서 의사를 기다리면서, 다른 환자와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있는 날도 있다. 부인과의 관계를 힘들어하며 어렵게 꺼낸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그 남자는 다시 행복해질 것이고 내 병도 나을 거라 믿는다. 상대방을 대하는 진심이 아픔도 넘어서며 치유가 될 거라는 확신이다. 2년 남짓, 전혀 다른 세상 속에서 살면서 진심이 아닌 관계를 되돌아 보며 정리하는 시간이 억지로 주어졌다. 그 시간 속에서 배운 것 중에는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는 것도 포함된다. 몸과 마음은 따로가 아니라 하나이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깊은 진심인 마음으로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 아직은 이르지만, 더없이 환하고 아름다운 봄의 새싹이 영롱한 초록빛으로 움트는 날을 희망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12-31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꽃이 예쁘다고 느끼는 것은 마음이 이미 꽃밭이라는 얘기처럼, 보고싶은 이가 있다는 것은 온통 그의 그리움으로 물이 든 마음이라는 것 일게 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한국행 아시아나항공에 몸을 실었다. 만남에 대한 간절함은 무서운 코로나의 공포를 뛰어 넘어 까다로운 입국절차도 넉넉한 인내심으로 통과하게 했다. 안전에 몰두해서 마스크를 두개나 겹쳐 사용한 비행시간 내내 고른 숨을 쉴 수 없었지만, 도착한 인천공항 그 특유의 시린 겨울공기는 고단한 긴장감을 깨끗이 날아가게 했다. 아~ 얼마나 그리웠던 나의 조국이던가. 오랜 고심 끝에 교통이 편리한 장소로 머물 곳을 정했다. 평상시 같으면 형제 집에 기거하면서 계획해 놓은 일정을 진행했겠지만 서로 간의 안전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이 방법을 실행해보니 나름대로 여유가 있어 마음이 편했다. 가장 신이 난 것은 매끼마다 앱을 통해 맛있는 음식을 배달해 주고 있는 친척과 친구들의 관심과 사랑이었다. 드디어 나를 한국에 초대해준 특별한 날을 맞이했다. 이순의 나이로 입문하는 축하카드와 함께 꽃바구니와 선물 상자가 속속 도착했다. 한번에 모두를 만날 수 없는 시국이라 몇몇이 짝을 나눠 호사스러운 이벤트를 베풀어 주는 그들의 지혜와 배려에 감격이 넘쳐서 눈물까지 난다. '금쪽 같은 내 새끼들~ 정말 잘 컸네...' 지난 일들이 어제 찍은 영화처럼 눈 앞에 선명하게 펼쳐지기 시작한다. 성우가 엄청 좋아하는 빗 방울이 하나 둘 뿌리기 시작한다. 어느새 빗줄기가 점점 거세진다.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성우는 참다못해 차가운 빗속으로 달려나간다. 음악을 전공하는 성우는 특별히 빗소리를 들으며 창조적인 악보를 그려낸다. 나는 이미 그에게 먹일 감기약을 손에 들고 있다. 며칠 동안 먹일 가족들 음식으로 불고기와 갖가지 밑반찬을 준비해 놓았는데 냉장고가 깔끔히 비워져 있다. 또 철이 짓이다. 혼자서 자취하는 친구가 안쓰럽다며 대식구의 양식을 통째로 들고 튀었다. 양심도 없는 놈...나는 볼멘 소리를 하며 저녁 메뉴로 부대찌개를 준비한다. 오늘도 기복이 눈이 시뻘겋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 걸음걸이도 술취한 듯 비틀거린다. 밥맛이 없는지 국그릇만 휘젓고 있다. 어제도 날밤 새운 게 분명하다. "이그 정신 차려라" 등짝을 한대 후려친다. 그래도 감각이 없다. 나는 다시 머리통을 세게 쥐어박는다.그래도 멍때린다. 야동에 영혼이 뺏긴 녀석을 위해 컴퓨터 차단막을 설치해 달라며 나는 전문가에게 부탁 전화를 돌리고 있다. 우리집의 유일한 모범생 혁재가 방학기간 동안 동부로 여행을 간다며 일주일 동안의 밥값을 빼달라고 한다. 그는 공부만 잘할뿐이지 사랑의 방정식엔 무식한 낙제생인 것 같다. 이제부터 혁재가 가장 좋아하는 해물탕 식단은 완전 빼버릴 테다. 여행하는 그를 위해 두둑한 용돈을 준비 둔 걸 사회성이 없는 녀석이 알 턱이 없다. 세월이 꽤 흘렀다. 그들이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군복무 후 결혼을 해서 하나 둘 아이들까지 낳아 행복하게 산다는 소식에 마음이 훈훈하다. 더구나 먼 타국 땅에서도 캘리포니아 주 우리집에서 만나 쌓은 서로 간의 돈독한 우정과 나를 향한 효심에 감격이 더해진다. 평소 존경하는 나태주 시인의 글이 떠오른다. 사랑에 답함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 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시간에 도돌이표가 주어진다면 나는 다시 밥집 엄마가 되고 싶다. 구수한 된장찌개에 잘 익은 김치 한가닥을 따끈한 밥 위에 올려주고, 입안에서 살살 녹는 굴비살을 발라 입안에 넣어주면 엄지척을 들어 올렸던 그들이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하다. 그런데 이 한마디는 살짝 귀뜸하고 싶다. '사랑 참 힘들더라' 에스더 최(수필가)
2021-12-31 나의 몫
언제나 나쁜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어쩔 수 없는 나의 몫이라 먼저 생각한다. 그렇게 시작하고 풀어나가면 조금이라도 덜 상처받고 힘들어하지 않을 것 같아 미리 주문을 걸어 놓는 것이다.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과 주위의 환경과 품고 있는 생각이 다르듯, 같은 문제를 앞에 놓고 그것에 적응하며 지나가는 길이도 순서도 모두 제각각이다. 품고 있는 문제들과 힘든 마음을 마치 없었던 거처럼 숨겨 놓지만, 결국은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다시 같은 문제 앞에 서게 되고, 후회하게 된다. 마치 꼭 읽어야 하는 두껍고 어려운 책을 끝낸 후 마지막 책장을 덮는 후련함처럼, 삶의 숙제를 끝내고 덮어야 하는 것이다. 어릴 적 노는 것에 팔려 방학 일기 숙제를 제날짜에 맞춰 쓰지 않고 있다, 방학이 끝나가는 마지막 주일이면 한꺼번에 몰아 쓰곤 하였다. 오늘의 날씨는 흐림과 맑음과 비를 마음대로 만들었고 그날에 했던 일들도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나 마치 소설을 쓰듯 하루하루 지어낸 이야기를 만들어 일기장 한 권을 끝낸 후의 후련하고 우스꽝스러운 당당함을 기억한다. 꼭 해야만 하는 것이었는데 미루고 억지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려 밀쳐 두었기에, 애꿎은 마음만 한동안 불편하게 보냈던 것이다. 살면서 스스로 풀 수 없는 일이 생기거나 사람과의 관계에 휘둘리거나 진심이 통하지 않는 막막함에 휩싸이면 또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하는 몫이고 끝내야 하는 숙제라고. 늘 평안하기를 그리고 넓은 마음의 평화를 기원하면서 또 다른 언덕을 넘어간다. 그렇게 소소하니 다독이며 지나와 지금 여기 살고 있다. 이제 다시 새로운 해의 시작이라고 1부터 되돌아간다. 12 숫자가 마지막이지만 언제나 맨 앞에는 1이 함께 앞서며 걸어간다. 처음 시작하면서 먹었든 마음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작년 한 해 다가온 좋지 않은 것들을 바람에 펼쳐놓은 이불의 먼지를 세차게 두드려 날려 보내듯 툴툴 털어 버리련다. 그리고 살면서 부딪히는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두 순순한 나의 몫으로 받아들이며, 처음 먹은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12-01 태클을 걸지 마
내가 좋아하는 그녀는 단 한가지만 빼고는 팔방미인이다. 말 그대로 공부도 일등, 운동도 일등이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그림조차 붓 가는 대로 그렸을지언정 작품은 없어서 못판다. 인물로 치자면 요즘시대에 각광받는 조각 얼굴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고혹적인 한국적 분위기에 매료가 된다. 게다가 쭉쭉 빵빵 잘 뻗은 신체는 좋은 DNA만 골라서 물려 받은 듯싶다. 그런데 이런 그녀가 걸어온 삼십 사 년의 인생을 들여 다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다른 이들이 땅 짚고 헤엄쳐서 가는 쉬운 강도 그녀의 삶에 있어서는 자유형 평영 접영까지 총동원해야 통과되는 사연으로 가득하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의 만남도 어쩌면 그렇게 순탄하지 않은 지 툭하면 불이익을 당한다. 똑똑하고 야무져 보이는 그녀의 인상과는 달리 늘 손해를 자처하며 사는 그녀의 모습에서 매번 내려 놓음의 극치를 본다.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엔 심오한 뜻이 있다며 해석하는 그녀를 향해 구차한 변명은 접어두라고 항변하고 싶을 정도다. 더욱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그녀는 항상 가난하다는 사실이다. 그녀에겐 1년 365일이 Thanksgiving 이요 Christmas다. 가까운 지역의 배고픈 이웃들을 시작으로 한국의 고아원, 멕시코, 아프리카 등 먼 나라의 오지까지 기차처럼 달려가는 그녀의 마음엔 브레이크가 없다. 통장의 액수에 따라 맑음과 흐림으로 판가름 되는 내 기분과는 완전 거리가 멀다. 드디어 그녀가 죽을 힘을 다해 모든 공부를 마친 뒤 투명한 사명감을 가지고 의료인으로 일하게 됐다. 얼마나 반가운지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웬일인가. 화려한 꽃 길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뜻밖에 찾아온 사고로 인해 그녀는 다시 추락을 하고 만다. 세상 말로 재수가 되게 없다. 그러나 그녀는 차원이 다르다. 허리를 다쳐 침상에 누워있으면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계속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노래 실력은 거꾸로 일등자리를 석권하니 들어야 하는 내 귀는 참으로 곤욕스럽지만 그녀로부터 전염된 행복바이러스는 내 어깨를 절로 들썩이게 한다. 노래를 뒤로 하며 부스터 샷을 접종하러 문밖을 나서는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그녀가 보유하고 있는 영적 백신을 나 또한 필히 접종해야 함을 말이다. 인생에서 tackle이 걸렸을 때 되받아 치는 건 flex 항체 라는 것을 숙고한다. 에스더 최(수필가)
2021-12-01 그네
갑자기 추석 어느 날 산에 올라가 그네를 탔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8살이나 9살 쯤이었든 거 같다. 작은 바닷가 동네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피난 오신 아버지셔서 가까운 친척도 오가지를 않아, 그날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체 온종일 식구들과 TV 속 흘러간 영화를 보았다. 점심을 먹고 긴 낮잠을 잔 후, 용돈을 챙겨 슬며시 초등학교 뒤편의 낮은 산으로 올라간 것이다. 기억으로는 많은 사람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고 내 차례가 되어 커다란 나무에 새끼줄로 단단히 묶어놓은 그네에 올랐다. 누군가가 어리다고 위험하다는 소리도 기억난다. 그래서 안아 올려준 두발을 나무 판 위에다 얹고 꼭 붙잡으라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밀어주면, 스스로 무릎과 배로 힘을 주어 더 높게 바람 속으로 날아간다. 순간, 발아래 살고있는 동네가 보이고 하늘을 난다는 자유와 통쾌함과 함께 강한 바람에 가슴이 벅차고 뭔지 모르는 짜릿함을, 지금도 그 느낌에 휩쓸린다. 아무도 모르는 은밀함과 하늘을 나는 심장이 움찔거리는 순간을 잊지 못해, 몇 년 동안을 그렇게 몰래 명절날이면 비밀스럽게 다녔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또 언제 그만 가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몇십 년을 기억 속 설합 속에 묵혀 있었던 것이 툭 하며 튀어나온 것이다. 지금도 그때 그 시절의 친구들을 만난다. 몇 년의 한번 겨우이지만, 오랫동안 가장 많이 깊게 연결되고 있는 친한 친구의 엄마가 아주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이런 기억이 낫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순간에 마주쳐 떠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참 슬프다. 나도 몇 년 전, 봄 중에 가장 추운 . 눈 내리는 3월의 병실에서 엄마를 보낼 준비를 하며 힘들어했었다. 엄마보다 아버지를 더 사랑했고 살가운 엄마가 아니었기에 늘 서운한 마음으로 살았는데, 그 엄마를 오롯이 혼자 삶에서 떠나보내는 준비를 한 것이다. 세상은 흘러 흘러 또 앞으로 나아간다. 비록 어릴 적 추억에 젖지만 나 또한 어느 날은 그렇게 작별하며 떠날 것이다. 아름다운 기억들이 감싸고 또 작별하며 그네를 타듯 훨훨 날개를 달고 더 높은 곳에 오를 거라는 상상으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무릎 꿇는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11-01 결실
늘 이맘때면 올 한해는 무슨 결실을 보고 어떤 열매를 거두었는지 되돌아보며, 다시 새로운 결심과 단단한 목표를 만들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후회하고 반성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를 칭찬하며 다독거려주고 용기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 커다랗게 벽에 붙여놓을 생각이다. 이만큼이라도 "잘했다, 괜찮다." 하며 살아도 크게 나무라는 이 없었을 터인데 왜 그리도 인색하게 굴었는지, 미안하다. 많은 것이 변하고 낯선 달라진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크지만, 큰 탈 없이 늘상 하고있는 그대로 - 힘든 상황과 혼란의 새로운 급격한 변화에도 잘 지키며 살고 있다. 식구들을 위해 시장에 가고 음식을 만들고 집 청소하며 마당에 물주고 또 대추 따서 말리고 점점 주홍색으로 익어가는 감을 거두어, 좋아하는 이들과 나눌 생각으로 나름 행복하다. 올해는 정말 많은 종류의 요리를 열심히 만들었고 배웠다. 곁의 모두가 그대로 있기를 소원하는 절실함이 배여 있었고, 만드는 과정 안에서 더욱 소중한 가족의 의미를 새로이 찾았고, 감사했다. 훌륭하지는 않지만, 사랑이 더해진 음식의 종류와 숫자만큼 서로에게 가까워 졌으며 의지하고 신뢰하게 되었다. 더이상의 외로움을 버리고, 서로에게 기대며 눈 맞추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순간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하며 글썽인다. 사는 것에 휘둘러 모르고 지나왔든 시간도 있지만, 지나가 버린 것은 그대로 흘려 보내고, 지금 바로 앞의 모든 것을 즐기며 사랑하려 한다. 잊고 있었든 오래된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지내온 세월을 소중히 간직하는 새로운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지독히 나쁜 상황이 꼭 그렇게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다시금 배웠다. 무엇을 하였고 또 어떻게 살았냐고 굳이 되묻지 않아도, 크게 잘한거 없이 무언가를 이루지 않았어도, 꿋꿋이 살아있다는 큰 결실을 보았다. 이렇게 한해의 마지막 가까이에 무사히 와있고, 지금은 더욱 더 가까운 이들과 속마음을 전하고 서로를 응원하며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11월이 되기를 준비하면서, 올해의 결실은 더없이 단단하다고 말하련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10-02 유쾌한 5인방
계획에 없던 종합검진을 받았다. 달포 전 왼쪽 새끼발가락을 부딪친 이후 통증이 잦아들지 않아 병원을 찾은 것이 계기였다. 1년 반만에 마주한 주치의는 친절하게도 이참에 총체적 건강검진을 받을 것을 권유했고 나는 이에 따랐다. 검진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양호했다. 오장육부는 물론 신체의 어떤 작은 질병조차 없으나 단 한가지 비타민 D가 조금 부족할 뿐이라고 한다. 아니, 햇볕 좋은 이곳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비타민 D가 모자라다니 납득이 되지 않는 얘기다. 그래서 그까짓거쯤이야 라고 무시하면서 사람들과의 대화중에는 은근슬쩍 나의 건재함을 꺼내어 자랑을 일삼았다. 몸을 위해 특별히 건강식을 챙겨 먹은 것도 아니며 운동이라고는 고작 숨쉬기운동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신나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은 나 스스로 생각해도 자랑할 만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몰랐던 자부심 높은 콧대는 몇 날이 못되어 납짝코가 되고 말았다. 내 나이때에 접종받아야 하는 Shingles(대상포진) 주사를 맞고는 말 그대로 뻗어버렸다. 두 주가 다 되도록 바늘로 찌르는듯한 괴로움은 도대체 가실 줄을 모른다. 몸의 통증만큼 더 아프것은 마음이다. 새로운 인생의 2막을 계획해 놓고 한국행 항공기 티켓을 사놓았건만 보류해야 했기 때문이다. 평소 한국을 그리워 하던 중 TV프로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를 애청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나는 학창시절의 청바지와 통기타로 우정을 다지던 그때의 친구들을 어렵사리 찾게 되었고 이후 우린 속내를 털어놓는 깊은 소통으로 그리움을 쌓아갔다. 우리 다섯명의 주무대는 춘천의 강변로였고 모였다하면 새벽 이슬에 옷이 촉촉히 젖을 때까지 밤하늘의 별들을 세면서 기타 반주에 가요를 부르곤 했다. 인생 통털어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음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다. 수 년이 흐른 지금 그들은 한국에 나는 미국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과 뜻은 하나요 생각과 정신도 일치함을 확인하면서 나이들어 가면 우리 모두 함께 살자는 제안에 만장일치로 합의를 했다. 그러니까 새롭게 뭉쳐진 '시니어 5인방'이 된 셈이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고 자식 잘 키워냈으니 홀로 남아 쓸쓸해질 노후를 서로 돌보아 주면서 유괘하게 살자는 다짐이다. 오르기보다는 내려가기를 생각해야 할 나이에 접어 들면서 나는 생각한다. 오늘 밤 평안히 잠자리에 들었다가 내일 아침에도 어제처럼 다시 심장이 뛸수 있다는 것은 전적인 하늘이 주신 은혜라는 것을. 예방 접종조차 이겨내지도 못하고 자리에 누워 있는 나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한지붕 5인방 친구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들과의 합류를 떠올리면 설렘과 기대와 낭만으로 가슴이 콩당거린다. 에스더 최(수필가) KTVN TV Reporter 역임 중앙일보 Reporter 역임 현 버클리문학회원
2021-10-02 지붕위의 가을
가을은 소리로 제일 먼저 다가온다. 여전히 낮이 뜨거워 꼭꼭 닫아 두었던 창문을 열고 어둠이 내리는 저녁의 선선한 바람을 맞으려 나서면, 귀뚜라미의 귀뚤귀뚤 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아직도 간간이 덥고 따가운 햇살을 온종일 받은 작은 꽃들과 나무들은 목말라 하지만, 가을은 어김없이 올 것이며 곧 차가워질 것이다. 봄은 왠지 모르게 서두르고 여름은 기운 넘치게 달려가며, 가을은 다독이며 조금이지만 이제는 여유를 부려도 된다고 넌지시 말해준다. 비록 겨울의 차가운 멈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 7년 전 오랫동안 꿈꾸던 나만의 화실을 가지게 되었다. 몇 년을 주인없이 비워두었던 집인데, 축복처럼 와주었다. 제일 끝에 위치한 널찍한 침실 바로 위 지붕에는 옆집에서 넘어온 아주 오래되고 커다란 도토리나무가 걸려있다. 가을이 오고 도토리와 다람쥐들은 그들만의 축제를, 소리로 시작한다. 낮의 길이는 짧아지고 대신 길어진 밤이 일찍 찾아와 어둠이 내리면, 열매를 떨어트려 세상에 퍼트려야 살아남는 도토리와 그 열매로 긴 겨울을 지내야 하는 다람쥐들이 연출하는 열렬한 생존의 치열한 무대가 펼쳐진다. 또르르 떨어지는 소리와 그것을 잡으려 달리는 다람쥐들은, 매일밤 지붕 위에서 가을 영화 한 편을 찍고 있다. 비가 오고 바람 부는 날이면 잠시 비를 피해 주인공 다람쥐는 쉬고 있지만, 바람의 흔들림으로 또 다른 주인공 도토리는 더 세차게 힘껏 소리 내 떨어지고, 빗소리에 잠 못 드는 나도 하얗게 더불어 밤을 새우고 있다. 가을은 예전처럼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어느새 곁에 와있고, 삶은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추지 않고 정직하게 달려간다. 그러므로 모두가 살고 있고 또 살아야 한다. 갇혀진 듯한 세월 속에서 계절 이름들이 .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하며 - 7번을 다르게 불리고 바뀌어 간다. 여전히 아름다운 날들을 떠올리며, 자책보다는 더 찬란한 희망으로 꼭 다시 올 거라 마음 서두른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09-01 바람 자욱
바람이 불고 있는지 아니면 없는 듯 그냥 스쳐 지나가는지 몰라, 마당에 걸어둔 기다랗고 가날픈 조개껍질 풍경 소리로 알아챈다. 작고 여린 소리이지만 "나 지금 여기 지나가고 있어" 하며 살랑살랑 들려주는 소리가 참 좋다. 바람에 색이 있다면 아마 푸른색일 거라 상상해본다. 살면서, 누군가는 있는지 없는지 소리 내지 않은 채 조용히 자신의 몫을 살다 어느 날 먼 길을 떠나고, 또 어떤 이는 지나가는 자욱 하나씩 표현하며 살다 떠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차이 나는 다름도 모두 귀한, 소중한 인생일 것이다. 아침에 열어본 이메일 속 부고에 생소한 이름이 보였다. 전혀 모르는, 다만 가까운 동네의 주소라 어떤 분일까 하며 지나쳤다. 그런데 다름 아닌 바로 30년 넘게 알고 지낸 - 그렇지만 남편의 성으로 바뀌고 또 영어 이름으로 불린 -그녀였다. 마지막 순간에 본래의 이름으로 먼발치의 내게 이별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참으로 많은 일에 열정적이었다. 그림 그리고 도자기를 하며 고전무용을 하고 기타를 치며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도 열심으로 . 정말 지나가는 소리 알려주며 살았었다. 가끔은 그러지 못하는 내게 재촉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마주치면 슬며시 다른 쪽으로 돌아가곤 했지만, 늘 사람들과 어울리며 활동적인 건강한 모습을 부러워했다.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그리했을 터인데, 고마운 마음과 서운함이 함께 온다. 누군가는 자신이 생각하고 알고있는 것을 표현하는 게 서툴러, 미처 말하지 못한 채 하루를 일주일을 한 달을,,,, 그렇게 자기 자리 지키며 무심한 듯 지나간다. 또 누군가는 무엇이라도 지나가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 숨겨진 재능을 찾아 소리 내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며 애쓴다. 무엇이든 어떠하든 모두가 시리도록 아름답다. 바람 자욱따라 들려주는 각각의 소리가 듣기 좋아 매달아 놓은 풍경 줄들이, 며칠 전 심한 바람에 헝클러진 채 뭉쳐있는 걸 하나씩 풀면서, 열정으로 살다 떠난 그녀에게 오늘 아침 안녕이라고 작별 인사를 하며, 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이 거기에 있었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09-01 임의 침묵
시계를본다. 한시간 10분 남았다. 은근슬쩍 퇴근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종종 변수가 생기는 날이 많아 마음이 초조해진다. 어느덧 분침은 20분을 남겨두고 있다. 이 상태로라면 오늘은 칼퇴근을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드디어 오버타임에 걸리지 않고 회사의 정문을 빠져 나오는데 성공한다. 나는 야호 쾌재를 부른다. 주차장까지 한 걸음에 도착하는 동안에도 백도를 웃도는 뜨거운 열기가 훅 하고 온 몸을 휘감는다. 덩달아 내 심장의 온도도 상승함을 감지한다. 후끈 달아 오른 몸과 마음을 재빨리 자동차의 에어컨디션으로 식혀 보려하지만 그 뜨거움은 꺼질줄을 모른다. 그것은 오직 나만을 기다리고 있을 사랑하는 그에게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픈 열정일게다. 처음 만났을 당시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지적인 짙은 눈썹과 총명하고 선한 눈빛 , 반듯한 이마와 높은 콧날, 그리고 왼쪽 입가의 까만 점과 부드러운 까만 머리결은 여심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게다가 우람하고 단단한 체격과 중저음인 목소리는 세상의 어떤 시름도 다 잊게 만드는 매력 투성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잘 생겼다는 얘긴데 그러나 웬지 나는 그런 그에게 냉냉하리만큼 덤덤했다. 이후 우리의 동거는 강산이 두번이나 바뀔 만큼 세월을 함께 보냈다. 그의 비단결 같은 머릿결은 고슴도치처럼 뻣뻣하게 변했고 건강하고 매끄럽던 몸 곳곳엔 피부병이 퍼져있다. 귀도 안들리고 눈도 멀었으며 한 걸음도 못 걸어 2년 여가까이 기저귀를 착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통가운데 있는 그가 그나마 유일하게 즐거워하는 것은 베드에 누워서라도 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다. 최대한 코를 벌름거려서라도 나의 내음을 저장하려는 듯 애를 쓰기도 한다. 나는 이런 그와 늦깍이 사랑에 빠져버렸다. 볏집처럼 허물어지고 구겨져 버린 그의 처참한 모양새는 그 어떤 모습보다 더 아름답고 귀하기만 하다. 하루에도 수차례 목욕을 시켜보지만 가시지 않는 꼴꼴한 냄새조차 지극히 자연스럽다. 나의 연인 '버리'는 이제 서서히 침묵속으로 빠져든다.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내게 꼬리를 흔든다. "엄마 사랑해요. 행복했어요. 그리고 고마웠어요 .굿바이.." 담당 수의사는 말한다. "이 땅에서 24년 6개월을 살았던 최버리는 오늘 24일 오전 6시 32분에 하늘에 계신 그분의 부르심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넜음을 가족과 친지 앞에서 공표합니다." 에스더 최(수필가) KTVN TV Reporter 역임 중앙일보 Reporter 역임 현 버클리문학회원
2021-08-01 시간
시간이라는 삶의 비밀을 갖고 있다. 누구나 어디에 어떤 상황에 있든, 숨겨둔 꿈이 있고 무엇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으며 또 적당히 모자라는 열등감과 하기 싫다는 게으름도 가지고 있다. 결혼 후 밥하고 살림하며 살다 세상 밖으로 나와보니, 넘치는 재능과 열정 그리고 예술적인 감각을 지닌 멋진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놀랐고 또 부러웠다. 잘 자라고 있는 땅에서 새로운 땅으로 옮겨 심은 나무는 죽지 않고 뿌리 내려 열매 맺기 위해, 진즉에 품고 있던 모든 잎은 다 떨군 체 가만히 자신을 낮추며 시간으로 버텨가다, 끝끝내 살아남는다. 나도 멀리 이사 온 나라에서의 적응이 힘들고, 원하는 것을 지켜갈 능력도 미처 갖추지 못한 채 경제적인 어려움마저 겹쳐 많이 힘들어했었다. 그러면서 결국 혼자라는 덫에 걸려, 팔과 다리를 뺄 수도 몸을 움직이며 밖으로 나올 수도 없는 상황으로 변해갔다. 온종일 잠만 자고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었다. 스스로 바꿀 수도 고칠 수도 없는 문제 앞에 서면, 제일 먼저 분노하다 그다음은 어떻게 하든 스스로 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찾다, 결국에는 받아들인다. 겨우 얼굴을 씻고 머리를 빗으면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과 더없이 변해버린 얼굴을 보면서 서서히 깨달아 갔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변해야만 한다 - 굳이 잘하지 않아도, 꼭 지금이 아니어도, 누군가에게 칭찬받지 않아도 된다고 타이르며, 침대 밖으로 나와 밥도 먹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다. 스스로가 가진 외로움을 껴안고 가듯 부족함도 껴안으며 살아도 괜찮은 것이었다. 무엇을 하든, 자랑스러운 것은 나의 삶이다. 살아가며 부딪치는 폭풍과 우박 그리고 쏟아지는 비를 만나더라도, 부딪혀 살아남은 오늘이다. 무덤덤한 거보다 무엇이든 부딪혀야만 동기를 가지게 될 것이며 또 그렇게 모두 살아간다. 최선은 다하면서 느긋하게, 시간이라는 비밀의 끈기와 무모함에 턱 하니 나머지 삶을 걸쳐 놓고서, 이제는 그 강렬한 힘을 믿는다. 몰래 감추어둔 비밀을 풀면서, 세상의 모든 것이 오랜 시간 끈기있게 지켜나가는 버팀으로, 어느 날 든든한 뿌리가 내려져 열매 맺고 다시 땅에 떨어져 새로운 뿌리 내리며 숲을 이루어 가리라 소망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07-01 Sausalito(소살리토)
작은 버드나무라는 소박한 뜻을 가진 - 잔잔한 바다가 바라보이는 높은 언덕 위 이쁜 집들과 많은 화가와 작가들 그리고 오래된 화랑과 식당들이 아기자기 모여있는 아름다운 동네이다. 태어나 자랐든 그렇지만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고향의 앞바다처럼 푸근해, 마음이 헝클어지는 날에는 위로받고 싶어 한밤중에도 달려간다. 늘 마음 속 평화를 기도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닫는 한계를 마주치거나 그것이 아픔으로 휘몰아쳐 올 때는, 바다를 바라보며 위로를 받고 속내를 털어놓으며 울기도 한다. 담담하고, 주저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나 지금 힘들어" 하며 자신을 열어 놓을 뭔가가 필요하다. "숨기지 마라, 드러내면 강해진다"라고 하지만 모자람과 수치심 그리고 분노를 차마 꺼내어 고백하지 못해, 나만의 비밀 장소를 찾아가 어둠 안에 앉아 온전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깜깜한 아무도 없는 빈 바다 앞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스스로 만든 화를 가라앉힌 후 한 번쯤 크게 소리 내어 울고 나면, 마음속 바다에 단단하게 묶어 두었던 감정의 밧줄을 천천히 풀고서 보낼 준비를 한다. 꽉 쥐고 있는 손을 열고 풀어 놓아버리고, 빈손의 여유를 가지련다.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보내는 것이라 미련 두지 않고 작별을 한다.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후련해져, 늘 그대로인 나만의 구석 자리로 되돌아간다.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되돌아오는 101길 건너편에는 어스름한 불빛의 샌프란시스코 공항이 보인다. 누군가는 한밤중에도 떠나고 또 떠나는 거는 작별하고, 비워진 자리는 새로운 것으로 다가오고 난 또 늘 하던 대로 잘 살고 있다. 평안하고 잔잔해진 바다의 아름다운 동네 Sausalito를, 먼 고향 앞바다에서 변함없이 살고있는 옛친구들이 나를 만나러 오는 날, 다시 그 바다 앞에 서서 고맙다고 그러나 그것은 너와 나 둘만의 비밀이라고 넌지시 일러줄거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