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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톨스토이 단편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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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술로

본문



뛰어난 소설가는 흔히 가장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한다.
"레 미제라블"에서 빅톨 위고는 '장발장'이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그 결과 가볍다고 소문난 프랑스의 남자들에게 진중하고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깊은 인간을 선물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백치"에서 '미슈킨' 백작이라는 완전히 순수한 사람을 창조하였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안드레이 공작'과 '피에르'라는 상호 보완적인 두 사람으로 완전한 인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좀 더 명확하고 단순하게, 또한 간단하게 단편소설에서 우리에게 완전한 인간을 보여준다.
어린이 동화 형식인 "바보 이반"에서의 '이반'이 또한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여러 소설을 읽을 때에는 완전한 인간상을 찾아 깊이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톨스토이는 몇 편의 단편소설에서 순수한 종교의 세계를 보여준다.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에서는 불쌍한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신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설교한다.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땅이 필요한가?"에서는 직설적으로 욕심의 한계를 말한다.
"촛불"과 "에밀리안"이라는 단편소설에서는 비저항의 힘을 보여준다.
그리고 "타는 불을 끌 수 있는가?"에서는 이웃과의 불화가 증폭되는 과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
어떤 구두장이가 처와 자식을 데리고 한 농가에 살고 있었다.
자기 소유라고는 집도, 땅도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으며 오직 구두를 만들고 고치고 하는 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곡식값은 비싸고 품삯은 헐하기 때문에 언제나 먹고 살기에 바빴다.
구두장이에게는 아내와 공동으로 입는 모피 외피가 한 벌 있었는데, 그나마 그것도 낡아서 거의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벌써 2 년째나 양피(羊皮)를 사 가지고 새 외투 한 벌을 지어 입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가을이 되고, 구두장이에게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겼다.
아내의 장롱 속에 3 루우블의 지폐가 있었고, 마을 농부들에게 꾸어준 돈이 5 루우블하고도 25 꼬페까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날 구두장이는 아침부터 양피를 사러 마을에 갈 채비를 했다.
그는 조반을 마치고서, 셔츠 위에 그의 아내가 얼마 전에 자신이 입으려고 지은 무명 자켓을 껴입고, 낡은 외투를 걸치고 나섰다.
주머니 속에 5 루우블을 넣고서, 나무가지로 만든 지팡이를 집고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이르러 구두장이는 어느 농부의 집을 찾았지만 주인은 없었다.
그 부인되는 사람이 말하길 일주일 안으로 돈을 갚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두장이는 다른 농부를 찾아갔으나 그 농부도 돈이 한 푼도 없다고 말하면서 장화 수선비 20 꼬페까 밖에 주지 않았다.
구두장이는 양피를 외상으로 사고자 했으나 가죽 장수는 외상으로 주려고 하지 않았다.
"현금으로 사요. 그러면 좋은 걸로 줄 테니까. 외상이라면 넌더리가 나요."
구두장이는 겨우 장화 수선비 20 꼬페까를 받고, 또 어느 농가에서 다 떨어진 펠트화에 난 구멍을 꿰매어 주는 일을 맡았을 뿐이었다.
속이 상한 구두장이는 수중의 돈을 다 털어 술을 마셔버리고는 양피도 사지 못하고서 집으로 향했다.
아침에 나설 땐 추웠는데 술 한잔 걸치고 나서니 외투 같은 것 입지 않아도 몸이 후끈거렸다.
구두장이는 한 손에 든 지팡이로 울퉁불퉁 언 땅을 짚으며 걸었다. 한 손으로는 펠트화를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제기럴, 모피 외투 걸치지 않아도 따습구먼, 술 한 병에 온 몸의 피가 닳아오르는데 그려. 모피 외투쯤 없어도 되는 게야.
난 이 정도라 이거야. 끄떡없다 이거야, 그런데 마누라가 가만있을지가 문제야.
크어억. 자 말야, 다음엔 돈을 내지 않으면 모자를 잡아챌 거야. 그럼, 그럼, 그렇게 하구 말거야.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느냐 말야?
치사하게 20 코페까가 뭐냔 말야? 도대체 그걸로 뭘 하냔 말야? 술 마실 수밖에 더있냐구. 자네가 곤란하면 난 곤란하지 않는가?
자네는 집도 있고 가축도 있고 하지만 난 맨 몸이 아니냔 말이다. 자넨 자네가 구운 빵을 먹지만 나는 사먹고 살지.
에누리없이 한 주일에 빵값만도 3 루우블을 치러야만 된단 말이다. 돌아가면 빵도 없을테니 또 1 루우블 반은 내놓아야해.
그러니까 자네도 내 돈은 갚아 줘야 해."
마침내 구두장이는 길 모퉁이의 교회에 이르렀다. 저쪽 교회 뒷 쪽으로 무엇인가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구두장이는 살펴보려 했지만 이미 해가 지고 있으므로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저기에 돌 같은 것은 없었는데. 아마 소일까?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희끄무레하고 또 저기에 있을 리도 없고.'
혼자 생각해 보면서 구두장이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점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알몸으로 교회 벽에 기대고 앉아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꼼짝도 안하고 있었다. 구두장이는 두려워졌다.
'누군가가 이 사람을 죽이고 옷을 빼앗아 입고 여기에 내동댕이친 모양이군. 가까이 갔다간 나중에 무슨 변을 당할지도 모르겠는걸.'
그래서 구두장이는 그냥 지나쳤다. 교회 모퉁이를 돌아서고 보니 그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가다가 다시 돌아다 보았다. 그 사람이 벽에서 떨어져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이 쪽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구두장이는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다가가 볼까, 그냥 갈까? 다가갔다가 봉변이라도 당하면 일날텐데.
저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보통사람이 저런 곳에 있을 리는 만무하고 말야. 그리고 덤벼들어 날 죽일 지도 모르지.
자칫 골치 아프게 될 거야. 도대체 저 알몸뚱이를 어쩐단 말인가? 내가 입고 있는 걸 달랑 줄 수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가버리자꾸나.'
그렇게 마음 정하고서 구두장이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해서 거의 교회 앞을 다 지나치게 되자 양심이 갈등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래서 구두장이는 길 한 가운데서 발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뭘 하고 있는 거냐, 세몬?"
그는 자문하고 있었다.
"사람이 변을 당하고 죽어가고 있는데 너는 겁을 집어먹고 뺑소니 치려고 하다니.
넌 대단한 사람인가? 부자라서 가진 물건을 빼앗길까 봐 겁이 나는가? 세몬, 안될 일이다."
그래서 구두장이 세몬은 되돌아서서 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2.
세몬은 그에게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직 젊은 사나이여서 힘도 있을 듯 하고 몸에 얻어맞은 흔적도 없었다.
몸이 꽁꽁 얼어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벽에 기대앉은 채 세몬 쪽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눈을 들 수도 없는 것 같았다.
세몬이 다가가자 사나이는 그제야 제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돌리고 눈을 떠 세몬을 바라보았다.
사나이의 그 시선이 세몬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펠트화를 땅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허리띠를 끌러 그 허리띠를 펠트화 위에 놓은 다음 외투를 벗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자 이걸 입어요. 어서."
세몬은 사나이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세몬은 보았다. 깨끗한 몸에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몬은 사나이 어깨에 외투를 걸쳐 주려 했으나 소매 속으로 팔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세몬은 두 팔을 끼워 주고 옷자락을 잡아 당기고 앞을 여며 준 다음 허리띠를 매어 주었다.
세몬은 헌 모자도 벗어 벌거숭이 사나이에게 씌워 주려고 했으나 '나는 짧은 머리지만 이 사람은 긴 고수머리가 더부룩하게 자라 있어'
라고 생각하곤 도로 모자를 썼다. '그보다도 이 젊은이에게 신을 신겨 줘야지.' 구두장이는 사나이를 앉히고 펠트화를 신겼다.
"이젠 됐다. 자아, 이번엔 좀 움직여서 언 몸을 녹여야지. 뒷일은 내가 걱정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다 처리해 줄 거야.
자네 걸을 수 있나?"
사나이는 멀거니 서서 감격한 듯한 표정으로 세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말은 전연 하지 않았다.
"........"
"왜 말을 하지 않는 거야?
이런데서 겨울을 날 셈인가? 집으로 돌아가야지. 자, 여기 내 지팡이가 있으니까 몸이 말을 듣지 않거든 이걸 짚어요,
자, 자, 걸어요 걸어."
그러자 사나이는 걷기 시작했다.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고 잘 걸었다.
두 사람이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세몬이 말했다.
"자네 대체 어디서 왔나?"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닙니다."
"이 고장 사람이라면 난 다 알아. 그래 왜 이런 데까지 왔나? 교회 근처까지 말이야."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나쁜 놈들이 이런 짓을 했을거야. 그렇지?"
"아무도 나를 혼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신의 벌을 받았지요."
"그야 물론 만사가 신의 뜻임은 틀림없어. 그렇더라도 어디 좀 들어가 쉬어야 할 텐데. 자네 어디로 갈건가?"
"어디든 마찬가지입니다."
세몬은 깜짝 놀랐다. 불한당 같지도 않고 말씨도 공손한데 자신의 신상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세몬은 생각했다. 그야 물론 세상에는 말 못할 일도 많기는 하지.
그는 사나이에게 말했다.
"어때 우리집에 가는게? 불을 쬘 수 있어."
세몬은 집을 향해 걸었다. 낯선 사나이는 한 발짝도 뒤떨어지지 않고 나란히 따라 걸었다.
찬바람이 세몬의 루바시까 밑으로 스며들었다. 차차 술이 깨면서 추워져 왔다.
세몬은 코를 훌쩍거리며 몸에 걸친 마누라의 자켓 앞자락을 여미고 걸으면서 생각했다. 아니 이건 어떻게 된 일이야.
모피 외투를 마련하러 갔다가 외투를 없애고 벌거숭이 사나이까지 거느리게 됐으니 이거 마뜨료나가 야단일텐데.
마뜨료나를 생각해 내자 세몬의 마음은 우울해졌다.
그러나 옆의 낯선 사나이를 쳐다보고 교회 뒤에서 이사나이가 자기를 쳐다보았던 시선을 생각해 내자 마음이 유쾌해졌다.


3.
세몬의 마누라는 얼른 일을 마쳤다. 장작을 패고 물을 긷고 아이들과 같이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빵을 굽는 일을 오늘 할까. 내일로 미룰까. 아직 빵은 큰 것이 한 조각 남아 있었다.
'세몬이 거기서 점심을 먹고 온다면 저녁은 그리 많이 먹지 않겠지. 그렇게 되면 내일 빵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마뜨료나는 빵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오늘은 빵을 굽지 말아야겠다. 밀가루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걸로 금요일까지 먹도록 하자.'
마뜨료나는 빵을 치우고 테이블 옆에 앉아 남편의 루바시까를 깁기 시작했다.
바느질을 하면서 마뜨료나는 남편이 어떤 양피를 사올까 생각했다.
'모피장수에게 속아넘어가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사람이 워낙 좋으니 알 수 없어.
그이는 조금도 남을 속이지 못하지만 어린아이도 그이를 속여먹는 것 쯤은 문제없으니 말이야.
어쨌든 8 루우블이면 큰 돈이니까 좋은 모피 외투를 사올 수 있겠지.
특상품의 부드러운 가죽은 아니라도 어쨌든 모피 외투를 살 수는 있어. 작년 겨울에는 모피 외투가 없어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강엘 갈 수가 있었나. 산엘 갈 수가 있었나. 지금도 그렇지 옷이란 옷은 모조리 입고 나가 버리니까 난 걸칠 것도 없어.
그리 일찍 떠난 건 아니지만 이제 올 때도 됐는데.... 아니, 이 양반이 또 술타령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마뜨료나가 바늘겨레에 바늘을 꽂고 입구 쪽으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 사나이 둘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몬 옆에는 낯선 사나이가 맨발에 펠트화를 신고 모자도 없이 서 있었다.
마뜨료나는 당장에 남편이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알았다. 역시 마시고 왔구나.
남편은 외투도 입지 않고 속옷바람인데 게다가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고 말없이 서 있었다.
마뜨료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돈으로 몽땅 마셔 버린 게 틀림없어.
알지도 못하는 건달하고 퍼마시고 한술 더 떠 그 작자까지 끌고 왔구먼.
마뜨료나는 두 사람을 앞세우고 뒤를 따라 들어가다 생판 모르는 젊은 빼빼마른 사나이가 입고 있는 외투가 바로 자기네 것임을 알았다.
외투 밑에는 셔츠를 입은 것 같지도 않았고 모자를 쓰지 않았다. 집안으로 들어온 젊은 사나이는 그냥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도 않고 눈도 쳐들지 않았다. 그래서 마뜨료나는 필경 무슨 잘못을 저질러 겁을 내고 있구나 생각했다.
마뜨료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페치카 쪽으로 떨어져 서서 두 사람의 거동을 살폈다. 세몬은 모자를 벗고 태연하게 걸상에 앉았다.
"여보 마뜨료나, 식사 준빌 해야지."
마뜨료나는 입 속으로 무엇이라고 중얼거릴 뿐 페치카 옆에 선 채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세몬은 마누라가 화난 것을 보고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낯선 사나이의 손을 잡았다.
"자, 앉아요. 저녁을 먹어야지."
낯선 사나이는 걸상에 앉았다.
"그래 아무 것도 마련하지 않았어?"
마뜨료나는 화가 나서 대답했다.
"왜 안해요. 하긴 했지만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예요.
보아하니 염치마저 홀랑 마셔버린 모양이군요.
모피 외투를 마련하러 간다더니 모피 외투는커녕 외투까지 없앤데다 건달까지 데리고 오다니. 당신네들 주정뱅이에게 줄 저녁은 없어요.
그러나, 그런건 어떻든 좋아요. 그래 돈은 어디 있어요. 말해봐요."
세몬은 외투 호주머니를 더듬어 돈을 꺼냈다.
"여기 돈 있잖아. 뜨리포노프가 주질 않더군. 내일은 꼭 주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마뜨료나는 더욱 더 화가 치밀었다. 모피도 사지 않고 단 하나 밖에 없는 외투를 낯선 벌거숭이에게 입혀서 집으로 끌고 오다니.
마뜨료나는 테이블 위의 돈을 집어 장롱 속에 간수하며 말했다.
"저녁은 없어요. 벌거숭이 술주정뱅이를 일일이 아랑곳하다간 ..."
"여보, 마뜨료나, 말 좀 삼가요. 내 말 좀 들으라니까...."
"당신 같은 주정뱅이에게서 내가 무슨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난 처음부터 당신 같은 술군하고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만....., 어머니가 주신 피륙도 당신이 술값으로 없앴죠. 모피 사러 간다더니 그것마저 다 마시고 오다니."
세몬은 아내에게 자기가 마신 것은 고작 20 꼬페이까 뿐이라는 것을 납득이 가도록 이야기하고 이
사나이를 데리고 온 경위도 밝히려 했으나, 마뜨료나가 말하게 하지 않았다.
어디서 쏟아져 나오는지 단번에 두 마디씩 지껄이니 세몬이 끼어들 겨를이 없었다. 십 년도 더 지난 옛날 일까지 들추어내는 형편이다.
마뜨료나는 마구 욕설을 퍼부으면서 세몬의 곁으로 달려가 그 옷소매를 낚아채 잡았다.
"자 내 옷을 돌려줘요. 하나 밖에 없는 내 옷을 뺏어 입고 염치도 좋지. 빨리 이리 벗어놔요. 못난 인간 같으니.
차라리 뒈지기나 하지."
세몬이 마누라의 무명 자켓을 벗으려 하는데 한쪽 소매가 뒤집어졌다.
그때 마누라가 그것을 잡아 당겼으므로 혼솔이 부드득 뜯겨져 나갔다. 마뜨료나는 자켓을 빼앗아 입고 문께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가 버리려고 하다가 발을 멈췄다. 속상하긴 하지만 이 사나이가 누구인지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
마뜨료나는 발길을 멈추고 말했다.
"온전한 사람이라면 벌거숭이로 있을 리가 없어요. 그런데 이 사나이는 셔츠도 입고 있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어디서 이 사나이를 끌고 왔는지 왜 말 못하는 거예요?"
"내 말하지 않았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회 담 밑에 이 사람이 알몸으로 거의 얼어붙은 채 기대앉아 있었단 말이오.
글쎄 여름도 다 갔는데 벌거숭이가 아니겠소.
마침 하늘이 도와서 내가 그리로 지나오게 됐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죽고 말았을 거요.
살아가노라면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누가 알겠소! 그래 외투를 입혀 데리고 왔지.
마뜨료나, 당신도 좀 그만해두고 마음을 가라앉혀요. 누구든 한번은 죽는 법이니까."
마뜨료나는 다시 욕설을 퍼부으려고 하다가 문득 낯선 사나이를 쳐다보자 말이 막혔다. 사나이는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걸상 끝에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목을 가슴에 떨어뜨리고서 눈을 드는 일도 없이
무엇인가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듯 사뭇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마뜨료나가 입을 다물고 있으므로 세몬은 이렇게 말했다.
"마뜨료나 당신에겐 하나님도 없소?"
이 말을 듣고 마뜨료나는 다시 한번 낯선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차츰 마뜨료나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문앞에서 발길을 돌려 난로 한쪽 구석으로 가서 저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컵을 탁자 위에 놓고 크바이스(러시아인의 음료로 귀리와 엿기름으로 만든 맥주의 일종)를 따르고 남은 빵을 잘라 내놓았다.
그리고 나이프와 스푼을 놓으면서 말했다.
"식사하세요."
세몬은 낯선 사나이를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앉아요 젊은이."
세몬은 빵을 잘게 자른 다음, 둘이서 먹기 시작했다. 마뜨료나는 테이블 한 쪽 끝에 앉아서 턱을 괸 채 낯선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 젊은이가 가엾은 생각이 들어 돌보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낯선 사나이는 기쁜 듯한 표정이 되더니 찡그리던 눈썹을 펴고 마뜨료나 쪽으로 눈길을 돌려 싱긋 웃었다.
식사가 끝났으므로 마뜨료나는 테이블을 치우고 낯선 사나이에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어디 사는 사람이죠?"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 길에 있었죠?"
"그건 말 할 수 없습니다."
"강도라도 만았나요?"
"나는 하나님의 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벌거숭이가 되어 자고 있었단 말이예요?"
"네, 그래서 알몸뚱이로 자다가 얼어죽을 뻔했던 겁니다.
그것을 세몬이 보고 가엽게 생각하여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내게 입히고 집으로 가자고 했던 거예요.
또 여기 오니까 아주머니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먹고 마시게 해주셨습니다.
당신들에게는 신의 은총을 내려 주실 겁니다."
마뜨료나는 일어서서 금방 기워놓은 세몬의 낡은 셔츠를 창가에서 가져다가 낯선 사나이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 밖에 속바지도 찾아내서 주었다.
"어디든 마음에 드는 자리에 누워서 자요. 침대 위나 페치카 옆에서나."
낯선 사내는 외투를 벗고 셔츠를 입은 다음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마뜨료나는 등불을 들고 외투를 집어 남편 있는 데로 갔다.
마뜨료나는 외투자락을 덮고 누웠으나 통 잠이 오지 않았다. 낯선 사나이의 일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나이가 조금 남았던 빵을 다 먹어 버려 내일 먹을 빵이 없다는 것과 셔츠랑 속바지랑을 주어 버린 일을 생각하니
아쉬운 생각이 들지 않는 바도 아니었으나 젊은이가 싱긋 웃던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오래도록 마뜨료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몬도 역시 잠들지 못하고 외투 자락을 잡아당기곤 했다.
"남은 빵을 다 먹어 버렸는데 반죽을 해 두지도 않았으니 내일은 어떻게 한담. 이웃 마라냐네에 가서 좀 꾸어 달랠까?"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칠려구."
마뜨료나는 한참 동안 가만히 누어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신상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요?"
"아마 말못할 사정이 있겠지."
"세몬"
"음?"
"우리는 남을 도와주는데 왜 남은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지 몰라요."
세몬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뭘 자꾸 그러는 거요."라고만 했을 뿐 휙 돌아누워 그냥 잠들고 말았다.


5.
이튿날 아침, 세몬은 잠이 깨었다.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마뜨료나는 이웃에 빵을 꾸러 갔다.
어제의 그 낯선 사나이는 낡은 셔츠를 입고 속바지을 입은 채 걸상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어제보다 밝았다.
"어때 젊은이 뱃속에서 빵을 요구하고 알몸뚱이는 옷을 원하니 벌이를 해야하지 않겠나. 자네가 무슨 일을 할 줄 아나?"
"나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릅니다."
세몬은 깜짝 놀랐지만 이렇게 말했다.
"할 마음이 있으면 되는 거야. 사람은 뭐든지 배워야 해."
"모두 일하는데 나도 해야지요."
"자네 이름을 뭐라 부르지?"
"미하일입니다."
"이봐요 미하일. 자네는 신상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인데 그건 아무래도 좋아. 굳이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밥벌이는 해야해. 내가 시키는 일을 하면 자네를 먹여주지."
"고맙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익히겠습니다. 뭐든지 가르쳐 주십시오."
세몬은 실을 집어 손가락에 감고 꼬기 시작했다.
"그다지 어려운 건 아냐. 자 보라구."
미하일은 그것을 들여다보더니 금방 배워 그와 마찬가지로 손가락에 감아 실을 꼬았다.
세몬은 돼지털을 바늘에 꿰어 꿰매는 일을 해 보이자 이것도 미하일은 금방 배웠다.
미하일은 세몬이 어떤 일을 가르쳐도 금방 배워 사흘 후에는 벌써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마치 이제까지 구두를 꿰매온 것 같은 솜씨였다.
허리를 펼 사이도 없이 부지런히 일만 하고 식사는 조금밖에 하지 않았다. 한가할 때는 잠자코 천장만 쳐다보았다.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농담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미하일이 싱긋 웃은 것은 처음 왔던 날 마뜨료나가 저녁 준비를 했을 때뿐이다.

 
6.
하루하루가 지나서 일주일이 지나서 일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미하일은 여전히 세몬의 집에서 살면서 일했는데 세몬의 보조공으로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세몬의 보조공 미하일만큼 모양 좋고 튼튼한 구두를 짓는 사람은 없다고 하여 이웃 마을에서까지 구두 주문이 밀려들어
세몬의 수입은 점점 늘었다.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다. 세몬이 미하일과 마주앉아 일을 하고 있는데 방울을 잔뜩 단 삼두 마차 소리가 요란히 들렸다.
창밖을 바라보니 그 마차는 가게 앞에 섰다. 그리고 젊은 사람이 마부석에서 뛰어내려 마차문을 열어주자
마차 안에서 모피 외투를 입은 신사가 나왔다. 그리고 세몬의 입구 층계를 올라왔다. 마뜨료나는 문을 활짝 열었다.
신사는 몸을 굽히고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쭉 폈는데 머리는 거의 천장에 닿을 지경이고 온 방안은 신사의 몸뚱이로 꽉 들어찬 것 같았다.
세몬은 일어서서 인사했으나 신사의 큰 몸집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사람은 처음 본다.
세몬도 살집이 없는 편이고 미하일도 깡마른 편이어서 마뜨료나 조차도 마치 마른 나무 잎사귀처럼 살이 없는데
이 신사는 다른 나라에서 왔는지 얼굴은 불그스름하니 윤이 나고 목은 황소처럼 굵어서 마치 몸뚱이 전체가 무쇠로 된 것 같았다.
신사는 후욱 숨을 크게 내쉬더니 모피 외투를 벗으며 걸상에 앉아 말했다.
"이 가게 주인은 누구지?"
세몬이 나서며 말했다.
"제가 주인인뎁쇼, 나리."
그러자 신사는 자기가 데리고 온 젊은이에게 커다란 소리로 명령했다.
"페지까. 그걸 이리 가져와."
젊은이가 달려가더니 무슨 꾸러미를 가지고 왔다.
신사는 꾸러미를 받아 테이블 위에 놓더니 "풀어라"하고 그 젊은이에게 명령했다. 젊은이가 꾸러미를 풀었다.
신사는 거기서 나온 가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찌르며 세몬에게 말했다.
"주인, 이 가죽이 무슨 가죽인지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나리."
"이봐, 이 가죽이 무슨 가죽인지 안단 말인가?"
세몬은 가죽을 만져보고 나서 대답했다.
"썩 좋은 가죽입니다."
"그야 물론 틀림없이 좋은 가죽이지. 바보 같으니라고, 자네는 이제까지 이런 가죽을 보지 못했을 꺼야. 독일제 가죽이야.
이건 20 루우블이나 주었다구."
세몬은 겁을 집어먹고 말했다.
"저 같은 사람이 어찌 구경이나 했겠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어디 이 가죽으로 내 발에 꼭 맞는 구두를 지을 수 있겠나?"
"지을 수 있구 말굽쇼, 나리."
신사는 느닷없이 소리질렀다.
"지을 수 있구 말굽쇼라구? 너는 누구의 구두를 짓는지 무슨 가죽을 짓는지 명심해야되.
나는 일년 신어도 찢어지지 않고 모양이 변하지 않는 구두를 원해. 그렇게 만들 수 있으면 내일 착수하여 가죽을 재단해.
하지만 안될 것 같으면 손도 대지 말아.
미리 말해 두겠는데 만약 구두가 일년도 채 되지 않아 찢어지거나 모양이 변하거나 하면 네 놈을 감옥에 넣어 버릴테다.
만약 일 년이 넘도록 모양이 변하지 않고 찢어지지도 않으면 삯으로 10 루우블을 주겠다."
세몬을 겁이 버럭 나서 대답할 말을 잃고 미하일 쪽을 돌아다보았다.
그리고는 발꿈치로 미하일을 꾹 찌르면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봐 어떻게 하지?"
미하일은 '그 일을 맡으십시요'하는 듯이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세몬은 미하일의 고개짓을 보고 일 년 동안 일그러지지도 찢어지지도 않을 구두를 주문 받았다.
신사는 젊은이를 불러서 왼쪽 구두를 벗기게 하고 다리를 쭉 폈다.
"치수를 재라."
세몬은 한 자 이상이나 되는 종이를 꿰매어 붙여 자리에 펴고 두 무릎을 꿇고서 신사의 양말을 더럽힐 세라
앞치마에 손을 잘 닦은 다음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바닥을 재고 발등 높이를 재고 종아리를 잴 차례가 되었는데 종이 양 끝이 마주 닿지 않았다.
신사의 종아리가 통나무만큼이나 굵었던 것이다.
"정신 차려서 해, 거길 좁게 해서는 안 된다."
세몬은 다시 종이를 덧붙였다.
신사는 의젓하게 앉아 양말 속의 발가락을 꼼질꼼질 놀리면서 방안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다가 미하일을 보더니,
"저건 누구야?"하고 물었다.
"이 가게 직공인데 그가 구두를 만들 겁니다."
"똑똑히 알아둬라. 일 년간은 끄떡도 않도록 꿰매야 한다."
신사는 이렇게 미하일에게 말했다. 세몬도 미하일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미하일은 나리의 얼굴은 보지 않고 그 뒤 구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누구인지를 알아내려고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미하일은 갑자기 싱긋 웃더니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넌 뭘 싱글거리고 있는거야? 바보처럼. 정신차려서 기한 내에 만들어낼 생각이나 하지 않고."
그러자 미하일은 말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신사는 구두를 신고 모피 외투를 입자 문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허리 굽히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이마를 세게 문에 부딪혔다.
신사는 욕설을 퍼붓고 이마를 문지르며 마차를 타고 가버렸다.
신사가 나가자 세몬이 말했다.
"정말 어마어마한 나리야. 그 어른은 큰 도끼로도 죽이지는 못할걸.
방이 흔들거리도록 이마를 부딪혔는데도 별로 아프지도 않은 모양이던데."
그러자 마뜨료나도 말했다.
"그렇게 부유한 생활을 하는데 체격인들 왜 좋지 않겠수. 저런 튼튼한 사람에게는 염라대왕도 감히 접근하지 못할걸요."


7.
세몬은 미하일에게 말했다.
"일을 맡긴 했지만 이거 까딱 잘못하는 날엔 감옥살이야. 가죽도 비싼데다, 나리는 성깔이 대단하시고, 실수를 말아야 할텐데.
자, 자네는 눈도 밝고 솜씨도 나보다 나으니 여기 이 치수 본을 주겠네. 나는 겉 가죽을 꿰맬 테니까."
미하일은 이르는 대로 신사의 가죽을 탁자 위에 펼쳐 놓은 다음 칼을 들어 재단하기 시작했다.
마뜨료나는 미하일을 옆으로 다가가 미하일이 재단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바뜨료나도 이제 구두 만드는 일에는 익숙한 터인데 가만히 보니 미하일을 장화의 모양과는 전혀 다르게 둥글게 가죽을 자르는 것이 아닌가?
마뜨료나는 주의를 줄까 하다가 생각했다. 아마도 내가 그 나리의 장화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 잘 듣지 못했는지도 몰라.
미하일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참견하지 말아야지.
미하일은 가죽 재단을 마치고 실을 바늘에 꿰어 꿰매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장화를 꿰매는 두 겹 실이 아니라 슬리퍼를 꿰매는 한 겹 실이 아닌가?
그것을 보고 마뜨료나는 또 크게 놀랐으나 역시 참견하지 않았다. 미하일은 열심히 꿰매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나 세몬이 일어나 보니, 미하일은 신사의 가죽으로 슬리퍼를 꿰매 놓고 있었다. 세몬은 "앗!"하고 크게 소리질렀다.
이게 대체 웬일일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미하일은 일 년이나 우리와 같이 지내면서도 한 번도 실수한 일이 없었는데 이런 잘못을 저지르다니.
나리는 굽이 있는 장화를 주문했는데 미하일은 평평한 슬리퍼를 만들어 버렸으니 영 가죽을 버리지 않았나.
나리에겐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가죽을 구하려야 구할 수도 없을 텐데....'
세몬은 미하일에게 말했다.
"아니 여보게, 이 무슨 짓인가? 자넨 나를 못살게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나리는 장화를 주문했는데 자넨 도대체 뭘 만들었나?"
세몬이 미하일에게 말을 거는데 바깥문의 고리쇠가 덜컹거리더니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누군가 타고 온 말을 비끄러매고 있는 참이었다. 나가보니 그 나리의 하인이 아닌가.
"안녕 하십니까?"
"어서 와요. 무슨 볼일이라도?"
"구두 일로 마님의 심부름을 왔지요."
"구두 일로?"
"구둔지 뭔지. 하여간 장화는 이제 필요 없게 되었어요. 나리는 돌아가셨으니까요."
"아니 뭐라고요?"
"여기서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도중 마차 안에서 돌아가셨어요.
마차가 저택에 닿아, 내리는 걸 도와드리려고 보니까 나리는 짐짝처럼 딩굴고 있지 않겠습니까. 돌아가신 거예요.
간신히 마차에서 끌어내린 형편이죠. 그래서 마님께서 나를 보내어 '너, 구둣방에 가서 이렇게 전해라.
아까 나리가 주문하신 장화는 이제 필요 없게 되었으니 그 가죽으로 죽은 사람에게 신기는 슬리퍼를 지어 달라고 말이야.
그리고 다 꿰매기를 기다려서 그 슬리퍼를 가지고 와야겠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왔지요."
미하일은 테이블 위에서 마름질하고 남은 가죽을 접어 둘둘 뭉치고 다 된 슬리퍼를 꺼내어 탁탁 소리내어 털고는
앞치마로 곱게 닦아 하인에게 내밀었다. 젊은이는 슬리퍼를 받자 인사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여러분."
그리고는 돌아갔다.


8.
다시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 미하일이 세몬의 집으로 온 지도 이제 육 년이 되었다.
여전히 처음이나 마찬가지로 아무데도 가지 않고 한 마디도 공연한 말은 지껄이지 않았다. 그동안 싱긋 웃는 것은 단 두 번 뿐,
한 번은 마뜨료나가 저녁 식사 준비를 했을 때와 구두 맞추러 온 신사를 보았을 때였다.
세몬은 자기 제자가 대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는 어디서 왔는지를 묻지도 않고 다만 미하일이 나가면 어쩌나 하고 그것만을 걱정하게 되었다.
하루는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있었는데,
마뜨료나는 화덕에 남비를 올려놓고 있었고 아이들을 걸상 사이를 뛰어다니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세몬은 창가에서 구두를 꿰매고 있었고 미하일은 다른 창가에서 구두 뒷꿈치를 붙이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아이 하나가 걸상을 타고 미하일 곁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어깨를 흔들면서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고 말했다.
"미하일 아저씨, 저것 좀 봐요. 모르는 아주머니가 여자애 둘을 데리고 어쩐지 우리 집으로 오는 것 같아.
여자아이 하나는 절름발이인데?"
사내아이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미하일은 하던 일을 멈추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몬은 놀랐다. 이제까지 미하일이 밖을 내다본다든지 하는 일은 한번도 없었는데
지금은 창에 얼굴을 붙이고 무엇엔가에 눈길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몬도 일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보니 정말 깨끗한 옷차림을 한 부인이 자기 집 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부인은 모피 외투를 입고 긴 목도리를 목에 두른 두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얼굴이 서로 닮아 누가 누군지 모를 지경이었다. 다만 한 아이는 다리를 가볍게 절룩거리려 걷고 있었다.
여인은 바깥 층계를 올라와 입구로 들어와서 문을 열더니 먼저 두 계집아이를 안으로 들여보낸 다음 자기도 방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무슨 볼일이신지?"
여인은 테이블 곁에 앉았다.
두 여자아이는 무릎에 안기듯이 기댔는데 낯설어 하는 모양이었다.
"저어 이 아이들이 봄에 신을 가죽 구두를 마출까 해서요."
"아, 그렇습니까? 우리는 그런 작은 구두를 지어 본적은 없지만, 할 수 있습니다. 가장자리 장식이 달린 거로 할까요,
안에 천을 대어 접는 것으로 할까요? 이 미하일이 여간 솜씨가 좋지 않습니다."
세몬이 미하일을 돌아다보니 미하일은 우두커니 앉아 두 여자아이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었다.
세몬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긴 두 아이가 모두 귀여운 얼굴이다.
눈이 까맣고 뺨이 통통하고 발그레하며 입고 있는 모피 외투도 목에 두른 목도리도 질이 좋은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무슨 이유로 미하일이 저렇게 열심히 눈길을 쏟고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마치 두 여자아이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했다.
세몬은 의아스럽게 여기면서도 여인에게로 돌아앉아 값을 흥정했다. 가격을 정하고 치수를 잴 차례가 되었다.
여자는 절름발이 여자아이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혔다.
"어렵겠지만 이 아이로 두 아이의 치수를 재 주세요. 불편한 발 쪽은 한 짝만 하고 이쪽 발에 맞춰서 세 짝을 지어 주세요.
둘의 발 치수가 아주 꼭 같거든요. 아주 똑같은 쌍둥이지요."
세몬은 치수를 재고 절름발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이는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까?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날 때부터 그런가요?"
이에 부인이 대답했다.
"아니예요, 그 애 어머니가 그렇게 했어요."
그때 마뜨료나가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어디에 사는 누구의 아이인지 알고 싶어 이렇게 물은 것이다.
"그럼, 부인께선 이 아이들의 친 엄마가 아니신가요?"
"나는 어머니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지요. 아무 상관없는 남인데 그냥 맡아서 기를 뿐이예요."
"자기가 낳은 아이가 아니라도 카우노라면 자연 정이 들게 마련 아닌가요."
"그야 물론 정이 들고 말고요. 나는 두 아일 다 내 젖으로 키웠어요. 내 아이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어요.
그 아이는 그다지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이들은 정말 애처로와서......"
"그런데 대관절 누구의 애들 인가요?"


9.
여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벌써 육 년 전의 일입니다. 이 두 아이는 일주일도 못되어 천애(天涯)고아가 된 버렸던 거예요. 아버지는 낳기 사흘 전에 죽고
어머니는 아기를 낳고 하루도 못 살았으니까요.
나는 그 당시 제 남편과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이 아이의 부모와는 이웃간이었지요. 우린 늘 뒷문으로 서로 왕래했지요.
이 애들의 아버지는 거들어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숲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큰 나무가 쓰러지면서 허리를 세게 맞아 쓰러지지 않았겠어요. 집에까지 간신히 옮겨다 놓았지만 곧 저 세상으로 가 버렸지요.
그런데 그 아내되는 사람은 며칠 후에 쌍둥이를 낳았던 거예요.
이 아이들이 바로 그 애들이지요.
가난한데다가 일가 친척도 없고 일을 보아 줄 만한 늙은이나 아주머니 하나 없이 그야말로 외톨이여서 홀로 해산을 하고 홀로 죽어간거죠.
내가 그 이튿날 아침에 궁금해서 뒷문으로 그 집에 들어가 보았더니 가엾게도 벌써 숨이 끊어져 있었어요.
게다가 숨이 넘어가는 순간 바로 이 아이에게 쓰러져 버렸기 때문에 몸의 무게로 다리를 못쓰게 되었던 거예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시체를 목욕시키고 수의를 입히고 관을 짜고 해서 장례식을 마쳤지요. 모두들 친절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갓난아이 둘만 남았으니 정말이지 야단이지 뭡니까. 거기 모인 여자 중에 젖먹이를 가진 사람은 나뿐이었어요.
낳은 지 겨우 8 주밖에 안 되는 첫 아들에게 젖을 주고 있었죠. 그래서 내가 임시로 두 여자아이를 맡기로 했지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 아기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여러 가지로 의논한 끝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리아 아줌마가 이 아기들을 한동안 맡아 주지 않겠어요? 조금만 돌보아 주면 우리가 곧 다른 방법을 찾을 테니까요.'
저는 다리가 온전한 아이에게만 젖을 빨렸습니다.
이쪽 절름발이 아이에게는 줄 생각도 안했죠. 도저히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어떻게나 측은한지 그 뒤부터는 똑같이 젖을 물려주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내 아이와 두 여자아이, 말하자면 세 아이를 동시에 젖을 먹였던 것입니다.
그나마 내 나이가 젊어 기운도 있고 먹새도 좋았으니까 말이죠.
두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으면 다음 애가 기다리고 있어, 하나가 젖꼭지를 놓는 대로 기다리는 애에게 젖을 주고 그랬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으로 이 두 아이는 잘 키워갔으나 내가 낳은 애는 이 년째 되던 해에 죽어 버리고 그 뒤 낳지 못했죠.
한편 살림살이는 차차로 나아져서 지금은 이 거리 상인들의 소유인 수차(水車)장을 맡아보고 있답니다.
급료도 넉넉해서 유복한 살림을 꾸려가기는 합니다만 아이가 생기지 않는군요.
정말 이 두 아이가 없었더라면 혼자 쓸쓸해서 어떻게 살았겠어요! 내가 이 아이들을 귀여워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이 두 아이들은 내게 있어서 촛불과도 같아요."
여인은 한쪽 손으로 절름발이 여자아이를 끌어당기고 한쪽 손으로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마뜨료나도 길게 한숨 지으며 말했다.
"부모 없이는 살아갈 수 있지만 하나님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정말로 그건 것만 같군요."
세 사람은 이런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하일이 앉아 있는 쪽 구석에서 섬광이 비쳐와 온 방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모두가 놀라 그 쪽을 돌아다보니 미하일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위를 쳐다보면서 싱긋 웃고 있었다.


10.
여인이 두 여자아이를 데리고 나가자 미하일은 걸상에서 일어나 일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치마를 벗으면서
주인 내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인 아저씨, 아주머님.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으니 당신들도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주인 내외가 그를 바라보니 미하일에게서 후광(後光)이 비치고 있지 않은가. 세몬은 미하일에게 고맙다고 인사말을 했다.
"미하일, 자네는 보통 인간은 아닌 모양이니 자네를 붙잡을 수도 없고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네. 꼭 한가지만 알고 싶은 것이 있네.
자네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자네는 몹시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내 아내가 저녁 준비를 하기 시작하니까
자네는 싱긋 웃으며 밝은 표정을 지었는데 어찌된 까닭인가? 또 나리가 장화를 주문했을 때도 자네는 웃으면서 표정이 밝아졌었네.
지금 또 부인이 아이들 둘을 데리고 왔을 때 자네는 세 번째로 싱그레 웃었네. 그리고 몸에서는 후광이 비쳤네.
미하일, 어떻게 자네 몸에서 그런 빛이 비치는지, 그리고 왜 세 번 싱긋 웃었는지 그 까닭을 좀 말해 주게나."
미하일은 말했다.
"제 몸에서 빛이 나는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는 중이었는데 지금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제가 세 번 싱긋 웃은 것은 하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말씀은 아주머니가 저를 가엽다고 생각하셨을 때에 깨달아서 웃었고,
또 한 가지 말씀은 부자 나리가 장화를 주문했을 때 알게 되어 웃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두 여자아이를 보았을 때 마지막 세 번째 말씀을 알게 되어 또다시 웃은 것입니다."
거기서 세몬은 말했다.
"그럼 내게 들려주지 않겠나, 미하일? 어떻게 하여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벌을 내리셨는가,
그리고 자네가 알지 않으면 안 되었던 세 가지 말씀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러자 미하일이 대답했다.
"제가 벌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천사(天使)였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저는 천사였었죠. 어느 날 하나님은 한 여자에게서 영혼을 빼앗도록 제게 명령하셨습니다.
제가 인간 세계에 내려와 보니 그 여인은 몹시 쇠약한 몸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쌍둥이 딸을 낳았던 것입니다.
갓난아이는 어머니 곁에서 꼬무락꼬무락 거리고 있었으나 어머니는 젖을 줄 기운도 없었던 것입니다.
여인은 제 모습을 발견하자 하나님이 부르러 보내신 줄 짐작하고 매우 슬프게 흐느끼며 말했습니다.
'아아, 천사님! 집주인은 숲에서 나무에 깔려 죽어 바로 며칠 전에 장례식을 치른 참입니다.
내게는 형제 자매도,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할머니도 없기 때문에 이 갓난애들을 거두어 줄 사람도 없습니다.
제발 제 영혼을 가져가지 마시고 이 아이들을 내 손으로 키우게 해주세요! 어린아이는 부모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저는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한 아이를 안아 젖꼭지를 물려주고 다른 한 아이를 어머니의 팔에 안겨 준 다음 하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 곁으로 날아가서 말했습니다.
'저는 산모(産母)의 혼을 빼올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나무에 깔려 죽고 부인은 방금 쌍둥이를 낳고서 제발 혼을 거두어 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발 자기 손으로 아이들을 키우게 해 달라면서 어린아이는 부모 없이는 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모의 혼을 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시 내려가 산모의 혼을 거두어라. 그러면 세 가지 말을 알게 되리라.
즉 인간의 내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그것을 알게 되면 하늘 나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그래서 저는 지상으로 내려가 산모의 혼을 데려갔습니다.
두 아기는 어머니의 가슴에서 떨어져 있었으나 시신이 침상 위에서 쓰러지는 바람에 한 아이를 덮쳐 눌러 한 쪽 다리를 못 쓰게 한 것입니다.
저는 그 마을에서 하늘로 날아 올라가 여자의 혼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는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제 두 날개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의 혼만 하나님께로 가고 저는 지상에 떨어져 길바닥에 쓰러졌던 것입니다."


11.
그때 세몬과 마뜨료나는 자기들이 먹이고 입혔던 사람이 누구인지,
자기들과 같이 살면서 일해온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두려움과 기쁨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천사가 말했다.
"저는 홀로 알몸인 채로 들판에 버려졌습니다.
저는 인간의 부자유라는 것도, 추위도 배고픔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런 제가 갑자기 인간이 돼 버린 것입니다.
배고픔도 극한에 달했고 몸도 얼어붙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문득 들 한 가운데 하나님을 모시는 교회가 눈에 띄어 몸을 의지하려고 그 곁으로 다가갔으나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바람을 피하려고 교회 뒤로 돌아가 앉았습니다.
이윽고 날이 저물자, 배고픔은 더욱 심해지고 몸은 얼 대로 얼어, 저는 완전히 병들어 버렸습니다.
그때 문득 어떤 사람이 장화를 들고 걸어오면서 혼잣말을 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습니다.
저는 인간이 되어서 맨 처음, 언젠가는 죽을 인간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얼굴이 무서워 홱 돌아 앉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으니 그 사나이는, 어떻게 이 추운 겨울에 몸을 감쌀 옷을 마련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처자를 먹여 살려야 할 것인가를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추위와 배고픔에 거의 죽어가고 있다. 마침 저기 사람이 오고 있지만 그는 어떤 방도로 자기들 내외의 모피 외투를 마련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 사나이에게는 나를 도와줄 만한 힘이 없다.'

그는 저를 발견하자 얼굴을 찡그리고 먼저보다 더 무서운 몰골이 되어 터덜터덜 제 곁을 지나갔습니다.
그나마 한 줄기 희망도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사나이가 되돌아오는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다시 그 얼굴을 쳐다보았을 때는 방금 지나간 사나이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좀전의 그 얼굴에는 죽음의 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생기가 돌고 그 얼굴에 신(神)의 그림자가 어리어 있었습니다.
사나이는 제 곁에 다가와 옷을 입혀주고 저를 데리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집에 이르니 한 여자가 나와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그 여자는 사나이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여자는 저를 추운 밖으로 몰아 내려고 했습니다. 만약 그대로 나를 내쫓았더라면 여자는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때 남편이 갑자기 하나님의 얘기를 꺼내자 여자는 금방 태도가 누그러졌습니다.
여자가 제게 저녁밥을 권하면서 제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을 때
그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생기가 넘쳐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신의 얼굴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때 저는 '인간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을 생각해 냈습니다.
나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일을 이렇게 내게 계시(啓示; 열 계, 보일 시)해주시는구나 생각하니 저는 그만 너무 기뻐서 싱긋 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전부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무엇이 허락되어 있지 않은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당신들과 같이 살면서 일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사나이가 찾아와서 일 년 동안 닳지도 찢어지지도 않을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문득 그 사나이를 쳐다보니 뜻밖에도 그 사나이의 등 뒤에 나의 동료였던 죽음의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 이외에는 아무도 그 천사를 보지 못했지만 저는 알고 있었죠.
그리고 채 날이 저물기도 전에 그의 영혼은 그에게서 떠나 버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사나이는 일 년 신어도 끄떡없는 구두를 만들라고 해지만 자기가 오늘 저녁 안으로 죽는다는 것은 모른다.'
그래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을 생각해 냈습니다.
인간 안에 무엇이 있는가는 이미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자기 몸에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저는 두 번째로 싱긋 웃었습니다.
친구였던 천사를 만난 일도 기뻤으며 하나님께서 두 번째의 말씀을 계시해 주신 것도 기뻤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전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직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까지나 여기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최후의 말씀을 계시해 주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육 년째 되는 오늘, 쌍둥이 여자아이를 키우는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와 그들을 보게 되었을 때,
저는 엄마가 없더라도 두 쌍둥이는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봐서 살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 나는 그 말을 정말이라 믿고,
아이들은 부모 없이 살아가지 못 한다고 생각했는데 타인이 엄연히 두 아이를 잘 기르고 있지 않은가.'
또한 저는 그 부인이 타인의 아이로 인해 눈물을 흘렸을 때 거기서 살아 계신 신의 그림자를 발견했고,
사람은 무엇으로써 사는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최후의 말씀을 계시하여 저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세 번째로 싱긋 웃었던 것입니다."


12.
그러자 천사가 나타났는데 전신이 빛으로 둘러싸여서 눈을 똑바로 뜨고 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때 천사는 커다란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울려오는 목소리 같았다.
천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런 일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살피는 마음에 의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기 아이의 생명을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 가를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었다.
또 부자는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습니다.
저녁때까지 무엇이 필요한지, 산 자가 신는 장화인지, 죽은 자에게 신기는 슬리퍼인지를 아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인간이 되고 나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자신의 일을 여러 가지로 걱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과 그 아내에게 사랑이 있어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나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내려주시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도록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번에는 한 가지를 더 깨달았습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뿔뿔이 떨어져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각자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계시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로 뭉쳐 사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든 인간을 자신을 위해서, 또 모든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나는 깨달았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걱정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정말은 사랑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사랑 속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천사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 그러자 그 목소리로 인하여 집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천장이 두 쪽으로 쫙 갈라지면서 땅에 하늘까지 불기둥이 뻗쳤다.
세몬 내외도 아이들도 모두 땅바닥에 엎드렸다. 미하일의 등에서 날개가 활짝 펼쳐지더니 천사는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세몬이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집은 그 전 그대로였고 방에는 그의 가족 외엔 아무도 없었다.








작성일2012-12-26 14:30

멋진술로님의 댓글

멋진술로
"나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삶을 사랑하는 청교도인인 톨스토이의 단편을 올리면서
단순히 종교적인 내용으로 치부될까 걱정을 했습니다

책하고 거리가 멀어 장편은 엄두도 못냈던 술로는
진공관시절에 들고 다녔던 원서가 장편소설을 대신했었고
트랜지스터와 아이씨로 만들던 칠석라디오와 전자시계가
나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었었는데

삶이 나를 속여 전혀 다른 길을 가다보니
참 많은 것을 내 인생의 수첩에 끄적이게 되더군요
자게판에서 한동안 모범댓글로 이름을 조금 알리게 된 이유도
이런 이유랄까요..

선플도 악플도 조그만 관심과 사랑에 목말라하는 우리들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올 겨울은 유난히 비가 많이 옵니다
샌루이스 저수지엔 내년농사를 위한 농수가
넉넉히 채워졌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덕분에 올 크리스마스는 아내와 별다방에서 비를 맞으며
마끼아또 한 잔 마신 것이 전부이지만
그 어느때 보다 따뜻한 크리스마스였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셨는지 궁금하군요.. ^^

김기자님의 댓글

김기자
이번 해의 마지막이 정말 정신이 없이 지나갑니다.
모처럼 올리신 술로님의 글이 조금 길어서 ^^
두,세번에 나누어 읽고서 이제야 댓글을 답니다.

삶이 우리를 속이는게 어디 한두번 이겠습니까.
그러려니 하고 '나'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며 살다 가는게 삶이려니 하고 살아야 할것입니다

깊은 밤입니다.
조금 추운데 따스한 밤, 따스하게 주무십시요 ^^

좋은친구님의 댓글

좋은친구
멋진님도..


<img src=http://cfile233.uf.daum.net/image/170E38344EFF44D0020658>

초롱에미님의 댓글

초롱에미
멋진술로님~~  고백합니당~~ 솔직히 원글이 넘 길어서...
읽다가 두손... 지송~
삶이란게 속으면서 세월을 살아가는거...
속으면서 모르고 즐겁기도 하는거...
술로님도 Happy New Year!!

멋진술로님의 댓글

멋진술로
단편이라서가 아니라
단숨에 읽어내려가긴 했습니다만

사람은 혼자 잘난것도 아니고
술로처럼 잘난 제멋에 사는 것도
더더욱 아니니 더불어 사는 맛에 살긴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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