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실기록 제 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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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위로금인가 속죄금인가?
와다 하루키 교수의 말
"기금이 쓴 '쓰구나이償い'라는 말은 '보상'이라는 말과 구별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영어로는 보상은 compensation, 償い는 atonement라고 번역되었습니다. atonement라는 말은, 종교적인 단어로 속죄, 죄를 씻는다는 의미를 갖는 영어입니다. the를 붙여 대문자로 the Atonement라고 쓰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의미합니다. 영어로 설명을 들은 필리핀과 네덜란드가 아시아 여성 기금에 대해 다른 곳보다 더 이해해준 것은 이 부분과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국어로는 보상도 償い도 다르게 번역할 수 없어서 똑같이 '보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중략)
일본은 '법적 의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도의적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수상이 편지에서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또 그들이 '법적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실은 '사죄와 보상'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1965년의 한일협정을 통해 '법적 책임'은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사죄와 보상'을 다한 모범국으로 인식되는 독일의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의 보상도, 와다가 지적하는 것처럼(앞의 글), '도의적 책임'을 지는 보상금이었다.
와다에 의하면 필리핀과 네덜란드에는 피해자를 찾기 위한 공고를 낼 때 atonement라는 영어가 사용되었는데, 그 단어의 의미가 오해없이 받아들여진 듯 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보상'이라는 말조차 기피되었고, 일본의 비판자들과 똑같은 오해와 공격이 나오게 된 것이다.
(중략)
말하자면 '기금'을 둘러싼 공격과 대립은 하나의 단어를 둘러싼 '해석'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런데 앞서의 '마이니치 신문' 광고에 실린 네덜란드의 '도의적 보상 청구 재단'은 일본 정부에 대한 요구사항을 '모든 피해자들에 개인보상을 함으로써 고통과 손해를 보상하는 일'이라고 쓰고 있다. '쓰구나우'란 그런 단어다. 말하자면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 '보상'의 뜻이자 '속죄'의 의미를 갖는다. 아니, 사실 '쓰구나우'는 와다 교수가 설명한 것처럼 '보상'보다 '속죄'의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기금을 완전한 '민간기금'으로 이해한 이들은 일본 정부가 전달한 '쓰구나이킨償い金'을 단순한 '위로금'으로 격하했다. 한국 사회에서 '보상은 없었다.'는 이해가 주류가 된 것은 그런 경과를 거친 결과였다. 그러나 '도의적 책임'을 지는 뜻으로 건넨 그 돈이 일본 정부와 국민들의 '속죄'의 마음이 담긴 보상금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은 기금의 사업이 끝난 지금도 일부 '위안부'들에게 사후 지원을 하고 있다(특정비영리활동법인 C2SEA). 이 단체의 팸플릿에는 "혼자 쓸슬히 세상을 떠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위안부'가 되었던 분들에게 보살핌을. 가르는 바다=이어지는 바다, 동아시아와 일본-지금, 과거를 돌아보며 만드는 미래"와 같은 문구가 보인다. 그러나 그런 사실 역시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는다.
필리핀의 경우는 지원단체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당사자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국민기금을 지급받았다. 네덜란드의 경우는 연합국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전후처리에 대한 조약에 의거해 추가보상을 받지 않고 수상의 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받은 이들의 감상은 이들이 기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어 박유하 교수의 정대협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나온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유하 교수는 정대협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어떻게 이용하고, 또 어떻게 그들이 원하는 노선을 따르는 위안부 할머니들만을 부각시켜왔는지 고발한다.
‘제국의 위안부’ 이전에 한국의 제도권 언론 및 출판 분야에서 정대협에 대한 이런 직접적인 비판은 나왔던 바가 없다. 사실 지금도 드물다. 그렇기에 박유하 교수가 시범케이스로 형사재판에 회부됐을 것이다.
[6.위안부/지원단체(정대협)의 분열과 당사자주의의 모순
한국에서는 국민기금의 사업 실시 첫해였던 1997년에 7명이, 그리고 현재까지 총 61명이 보상을 받았지만, 지원단체(정대협)는 기금을 반대했기 때문에 기금과 위안부를 연결하는 공식 창구가 없었다. 그렇지만 초기에 받은 이들은 지원단체(정대협)의 격한 비난을 받았고, 한국 정부의 보상금 지금에서 제외되었다. 기금을 받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아직껏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런 비난이 있었기에 당사자들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재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이는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이들 중에도 기금을 받은 이가 있다고 기금 관계자는 말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지원단체(정대협)와 격하게 대립하는 위안부들도 있었다. 그들은 지원단체(정대협)가 자신들을 이용하여 권력을 얻었고(실제로 지원단체(정대협) 관계자들 중에는 상을 받거나 장관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된 이가 많다), 자신들을 '앵벌이' 시키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자신들의 재판을 지원하고 헌신적으로 돌봐준 이들은 한국의 지원단체(정대협)가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것이다(인터넷 신문 '시티뉴스'에 실린 심미자 할머니의 증언).
그러나 살아생전에도 사회를 향해 한껏 목소리 높여 외쳤고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외침을 CD에 담아 공증해 인터넷 언론매체에 남기기까지 한 그녀의 한 맺힌 '유서'도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는 일은 없었다. 그런 상황은 이 할머니의 주장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지원단체가 보호하는 위안부 이외의 위안부에게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금'의 보상금을 받고 일본의 사죄를 받아들인 '위안부'가 61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것도 일본의 지역신문이었다.
정대협은, 기금을 부정하고 일본에 '입법'을 요구하는 이유는 위안부들 자신이 '입법'을 원하고 기금을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저 '당사자'의 뜻을 존중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원단체가 말하는 '당사자'들이란 어디까지나 지원단체의 생각에 따르는 이들에 한정될 뿐이다. 말하자면 '당사자'는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지원단체가 의견을 달리하는 위안부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또 사실은 '정대협' 역시 하나가 아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정대협만 주목을 받고 있지만, 위안부를 지원하는 단체는 서울에서 정대협이 발족한 이후에도 생겼고 그중에서도 부산의 정대협은 서울 정대협의 발족 당시부터 함께 활동한 김문숙 관장이 사재를 털어 위안부의 일본에서의 재판을 지원하고 자료를 풍부하게 갖춘 전시관('민족과 여성 역사관')까지 지었다. 서울 정대협은 국가 전체의 주목과 지원을 받아왔지만 부산 정대협은 언론의 괸심이 서울에만 쏠렸기 때문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2012년 가을에는 재정난에 처해 전시관이 폐쇄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김문숙 관장은, 과거에 기금에 반대했지만 지금은 그때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기금을 여전히 비판하는 서울 정대협의 주장을 비판한다.
말하자면 위안부도 하나가 아닌 것처럼 지원단체도 하나가 아니다. 위안부들이 기금을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기금을 수용한 위안부가 있다는 사실이나 기금에 대해 더 이상 비판적이 아닌 지원단체도 있다는 사실은 알려질 필요가 있다.
(중략)
하지만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운동'을 20년 동안이나 계속하면서 병들고 나이든 위안부들에게 '한국의 자존심'을 대표하게 하는 것은 과연 '당사자'의 뜻을 존중한 일이었을까? 그녀들을 노구에 채찍질하며 길거리에 나서는 '투사'로 만든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니었을까? 이미 한 번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원치 않는 길을 가야만 했던 그들에게 그런 식으로 '올바른 민족의 딸'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또 하나의 '민족'의 억압이 아니었을까?
한 개인으로서의 '위안부'의 또 다른 기억이 억압되고 봉쇄되어온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일본 군인과 '연애'도 하고 '위안'을 '애국'하는 일로 생각하기도 했던 위안부들의 기억이 은폐된 이유는 그녀들이 언제까지고 일본에 대해 한국이 '피해민족'임을 증명해주는 이로 존재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위안부'들에게 개인으로서의 기억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들은 마치 해방 이후의 삶을 건너뛰기라도 한 것처럼, 언제까지고 '15살의 소녀 피해자'이거나 '싸우는 투사 할머니'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피해자임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우리 사회의 그런 욕망은, 일본 군인에 대한 사랑도, 자신을 판 부모나 조선인 업자나 '주인'에 대한 미움도, 그리고 해방 후에도 50년 동안 이어진 차가운 '한국인'의 시선도 잊고 소거시킬 수 밖에 없다. 오로지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원한만을 되살리기를 그녀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20여 년간 이어진 '위안부 문제'란 지원단체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그런 욕망과 기대가 우선시되면서 '당사자'들의 '지금, 이곳'에서의 고통은 잊혀진 문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금의 수령 여부를 둘러싸고 당사자들은 심각한 분열과 후유증을 겪었고, 건강을 해친 한 할머니는 본인이 다른 이에게 수령을 거부하도록 강하게 촉구한 일이 건강 악화의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하나후사 에미코). 그것은 분명 국가의 또 다른 억압이었다.
기금을 반대했던 이들은 위안부 안의 분열과 지원자(정대협)와 위안부의 분열이 '국민기금' 탓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기금에 대한 이해가 처음부터 부정적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실제로는 기금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기금을 만든 (일본) 정부에 대한 지원자들(정대협)의 이해 부족이 위안부들을 분열시켰다.]
이어지는 내용들은 정대협으로선 정말 뼈아픈 지적들인데, 물론 정대협은 이 내용들을 갖고서는 박유하 교수에게 고소는커녕 반론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모두 사실이니까.
필자가 알기로는 아래 내용들은 진보좌파 내에서도 이미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정대협은 필경 그 흐름을 끊어놓고 싶었을 것이다.
와다 하루키 교수의 말
"기금이 쓴 '쓰구나이償い'라는 말은 '보상'이라는 말과 구별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영어로는 보상은 compensation, 償い는 atonement라고 번역되었습니다. atonement라는 말은, 종교적인 단어로 속죄, 죄를 씻는다는 의미를 갖는 영어입니다. the를 붙여 대문자로 the Atonement라고 쓰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의미합니다. 영어로 설명을 들은 필리핀과 네덜란드가 아시아 여성 기금에 대해 다른 곳보다 더 이해해준 것은 이 부분과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국어로는 보상도 償い도 다르게 번역할 수 없어서 똑같이 '보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중략)
일본은 '법적 의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도의적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수상이 편지에서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또 그들이 '법적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실은 '사죄와 보상'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1965년의 한일협정을 통해 '법적 책임'은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사죄와 보상'을 다한 모범국으로 인식되는 독일의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의 보상도, 와다가 지적하는 것처럼(앞의 글), '도의적 책임'을 지는 보상금이었다.
와다에 의하면 필리핀과 네덜란드에는 피해자를 찾기 위한 공고를 낼 때 atonement라는 영어가 사용되었는데, 그 단어의 의미가 오해없이 받아들여진 듯 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보상'이라는 말조차 기피되었고, 일본의 비판자들과 똑같은 오해와 공격이 나오게 된 것이다.
(중략)
말하자면 '기금'을 둘러싼 공격과 대립은 하나의 단어를 둘러싼 '해석'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런데 앞서의 '마이니치 신문' 광고에 실린 네덜란드의 '도의적 보상 청구 재단'은 일본 정부에 대한 요구사항을 '모든 피해자들에 개인보상을 함으로써 고통과 손해를 보상하는 일'이라고 쓰고 있다. '쓰구나우'란 그런 단어다. 말하자면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 '보상'의 뜻이자 '속죄'의 의미를 갖는다. 아니, 사실 '쓰구나우'는 와다 교수가 설명한 것처럼 '보상'보다 '속죄'의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기금을 완전한 '민간기금'으로 이해한 이들은 일본 정부가 전달한 '쓰구나이킨償い金'을 단순한 '위로금'으로 격하했다. 한국 사회에서 '보상은 없었다.'는 이해가 주류가 된 것은 그런 경과를 거친 결과였다. 그러나 '도의적 책임'을 지는 뜻으로 건넨 그 돈이 일본 정부와 국민들의 '속죄'의 마음이 담긴 보상금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은 기금의 사업이 끝난 지금도 일부 '위안부'들에게 사후 지원을 하고 있다(특정비영리활동법인 C2SEA). 이 단체의 팸플릿에는 "혼자 쓸슬히 세상을 떠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위안부'가 되었던 분들에게 보살핌을. 가르는 바다=이어지는 바다, 동아시아와 일본-지금, 과거를 돌아보며 만드는 미래"와 같은 문구가 보인다. 그러나 그런 사실 역시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는다.
필리핀의 경우는 지원단체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당사자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국민기금을 지급받았다. 네덜란드의 경우는 연합국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전후처리에 대한 조약에 의거해 추가보상을 받지 않고 수상의 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받은 이들의 감상은 이들이 기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어 박유하 교수의 정대협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나온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유하 교수는 정대협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어떻게 이용하고, 또 어떻게 그들이 원하는 노선을 따르는 위안부 할머니들만을 부각시켜왔는지 고발한다.
‘제국의 위안부’ 이전에 한국의 제도권 언론 및 출판 분야에서 정대협에 대한 이런 직접적인 비판은 나왔던 바가 없다. 사실 지금도 드물다. 그렇기에 박유하 교수가 시범케이스로 형사재판에 회부됐을 것이다.
[6.위안부/지원단체(정대협)의 분열과 당사자주의의 모순
한국에서는 국민기금의 사업 실시 첫해였던 1997년에 7명이, 그리고 현재까지 총 61명이 보상을 받았지만, 지원단체(정대협)는 기금을 반대했기 때문에 기금과 위안부를 연결하는 공식 창구가 없었다. 그렇지만 초기에 받은 이들은 지원단체(정대협)의 격한 비난을 받았고, 한국 정부의 보상금 지금에서 제외되었다. 기금을 받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아직껏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런 비난이 있었기에 당사자들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재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이는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이들 중에도 기금을 받은 이가 있다고 기금 관계자는 말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지원단체(정대협)와 격하게 대립하는 위안부들도 있었다. 그들은 지원단체(정대협)가 자신들을 이용하여 권력을 얻었고(실제로 지원단체(정대협) 관계자들 중에는 상을 받거나 장관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된 이가 많다), 자신들을 '앵벌이' 시키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자신들의 재판을 지원하고 헌신적으로 돌봐준 이들은 한국의 지원단체(정대협)가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것이다(인터넷 신문 '시티뉴스'에 실린 심미자 할머니의 증언).
그러나 살아생전에도 사회를 향해 한껏 목소리 높여 외쳤고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외침을 CD에 담아 공증해 인터넷 언론매체에 남기기까지 한 그녀의 한 맺힌 '유서'도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는 일은 없었다. 그런 상황은 이 할머니의 주장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지원단체가 보호하는 위안부 이외의 위안부에게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금'의 보상금을 받고 일본의 사죄를 받아들인 '위안부'가 61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것도 일본의 지역신문이었다.
정대협은, 기금을 부정하고 일본에 '입법'을 요구하는 이유는 위안부들 자신이 '입법'을 원하고 기금을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저 '당사자'의 뜻을 존중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원단체가 말하는 '당사자'들이란 어디까지나 지원단체의 생각에 따르는 이들에 한정될 뿐이다. 말하자면 '당사자'는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지원단체가 의견을 달리하는 위안부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또 사실은 '정대협' 역시 하나가 아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정대협만 주목을 받고 있지만, 위안부를 지원하는 단체는 서울에서 정대협이 발족한 이후에도 생겼고 그중에서도 부산의 정대협은 서울 정대협의 발족 당시부터 함께 활동한 김문숙 관장이 사재를 털어 위안부의 일본에서의 재판을 지원하고 자료를 풍부하게 갖춘 전시관('민족과 여성 역사관')까지 지었다. 서울 정대협은 국가 전체의 주목과 지원을 받아왔지만 부산 정대협은 언론의 괸심이 서울에만 쏠렸기 때문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2012년 가을에는 재정난에 처해 전시관이 폐쇄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김문숙 관장은, 과거에 기금에 반대했지만 지금은 그때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기금을 여전히 비판하는 서울 정대협의 주장을 비판한다.
말하자면 위안부도 하나가 아닌 것처럼 지원단체도 하나가 아니다. 위안부들이 기금을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기금을 수용한 위안부가 있다는 사실이나 기금에 대해 더 이상 비판적이 아닌 지원단체도 있다는 사실은 알려질 필요가 있다.
(중략)
하지만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운동'을 20년 동안이나 계속하면서 병들고 나이든 위안부들에게 '한국의 자존심'을 대표하게 하는 것은 과연 '당사자'의 뜻을 존중한 일이었을까? 그녀들을 노구에 채찍질하며 길거리에 나서는 '투사'로 만든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니었을까? 이미 한 번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원치 않는 길을 가야만 했던 그들에게 그런 식으로 '올바른 민족의 딸'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또 하나의 '민족'의 억압이 아니었을까?
한 개인으로서의 '위안부'의 또 다른 기억이 억압되고 봉쇄되어온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일본 군인과 '연애'도 하고 '위안'을 '애국'하는 일로 생각하기도 했던 위안부들의 기억이 은폐된 이유는 그녀들이 언제까지고 일본에 대해 한국이 '피해민족'임을 증명해주는 이로 존재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위안부'들에게 개인으로서의 기억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들은 마치 해방 이후의 삶을 건너뛰기라도 한 것처럼, 언제까지고 '15살의 소녀 피해자'이거나 '싸우는 투사 할머니'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피해자임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우리 사회의 그런 욕망은, 일본 군인에 대한 사랑도, 자신을 판 부모나 조선인 업자나 '주인'에 대한 미움도, 그리고 해방 후에도 50년 동안 이어진 차가운 '한국인'의 시선도 잊고 소거시킬 수 밖에 없다. 오로지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원한만을 되살리기를 그녀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20여 년간 이어진 '위안부 문제'란 지원단체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그런 욕망과 기대가 우선시되면서 '당사자'들의 '지금, 이곳'에서의 고통은 잊혀진 문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금의 수령 여부를 둘러싸고 당사자들은 심각한 분열과 후유증을 겪었고, 건강을 해친 한 할머니는 본인이 다른 이에게 수령을 거부하도록 강하게 촉구한 일이 건강 악화의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하나후사 에미코). 그것은 분명 국가의 또 다른 억압이었다.
기금을 반대했던 이들은 위안부 안의 분열과 지원자(정대협)와 위안부의 분열이 '국민기금' 탓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기금에 대한 이해가 처음부터 부정적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실제로는 기금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기금을 만든 (일본) 정부에 대한 지원자들(정대협)의 이해 부족이 위안부들을 분열시켰다.]
이어지는 내용들은 정대협으로선 정말 뼈아픈 지적들인데, 물론 정대협은 이 내용들을 갖고서는 박유하 교수에게 고소는커녕 반론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모두 사실이니까.
필자가 알기로는 아래 내용들은 진보좌파 내에서도 이미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정대협은 필경 그 흐름을 끊어놓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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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11-0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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