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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민주인사들의 구국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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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유신체제에 강펀치를 날린 것은 재야 세력의 3ㆍ1명동구국선언사건이다.

1976년 3월 1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3.1혁명 57주년을 기념하는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약 7백 명의 천주교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기도회는 예정대로 진행되다가 기도회가 끝나갈 무렵 이우정 전 서울여대 교수가 미리 준비한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함으로써 유신체제에 재야지도자들이 정면대결하게 되는, 이른바 ‘3ㆍ1명동사건’이 발생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날 전격적으로 발표된 <민주구국선언문>의 내용은 ①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②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 되어야 한다. ③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다 라고 하는 세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결론에서 “이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다가오고 있는 그날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민주역량을 키우고 있는가, 위축시키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구국선언문의 서명자는 윤보선ㆍ김대중ㆍ함석헌ㆍ함세웅ㆍ이해동ㆍ이우정ㆍ정일형ㆍ윤반웅ㆍ김승훈ㆍ장덕필ㆍ김택암ㆍ안충석ㆍ문정현ㆍ문동환ㆍ안병무ㆍ이문영ㆍ서남동ㆍ은명기 등 정계ㆍ종교계ㆍ학계의 지도급 인사들이다.

선언문을 발표한 재야인사들과 신자들은 명동성당을 내려오면서 시위에 들어가려 했으나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다. 경찰은 이날 집회에 모인 사람 가운데 이우정ㆍ장덕필ㆍ문동환ㆍ김승훈을 연행하고, 그날부터 1주일 사이에 선언문에 서명한 전원을 연행했으며, 윤보선 전 대통령만이 자택에서 조사를 받았다.

3ㆍ1민주구국선언 사건은 세계적인 주목을 끌면서 외신들이 자세히 보도했으나, 국내 언론은 3월 10일까지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한 가운데 정부의 공식발표로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는 서울지검 서정각 검사의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이번 사건의 주동자인 구정치인과 재야 일부 인사들은 오랫 동안 정권쟁취를 책동해 왔으나, 유신체제의 공고화로 국내정국이 안정되고 비약적인 경제발전이 이루어져 통상방법으로는 그 목적달성이 어려워졌음이 명백하게 되자, 일부 신부와 목사, 일부 해직교사 등 반정부인사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3ㆍ1운동 또는 4ㆍ19와 같은 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중봉기를 기도ㆍ획책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올해 3ㆍ1절을 기해 소위 민주구국선언이란 미명 아래 마치 국가존망의 위기가 목전에 다가온 양 국내외 제반정세에 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유신헌법과 대통령 긴급조치의 철폐 및 현 정권의 퇴진을 주장ㆍ선동한 사실이 인정되는 바, 명백히 대통령 긴급조치 9호에 위반되는 것”이라면서, ‘정부 전복 선동’이라는 공안사건으로 단정하고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연행과 수사를 벌였다.

재야인사들의 시국선언이 거대한 공안사건으로 확대된 것은 박정희가 명단 중에 김대중의 이름을 발견하고, 분기탱천하여 ‘엄벌’을 지시함으로써 전개되었다.

검찰은 3월 26일 구국선언 서명자 20명 중 김대중ㆍ문익환ㆍ함세웅ㆍ문동환ㆍ이문영ㆍ서남동ㆍ안병무ㆍ신현봉ㆍ이해동ㆍ윤반웅ㆍ문정현 등 11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하고, 윤보선ㆍ정일형ㆍ이태영ㆍ이우정ㆍ김승훈ㆍ장덕필 등 7명은 불구속기소, 김택암ㆍ안충석 2명은 기소유예 처분했다.

사건 기소 후 130일 만인 8월 3일 판결공판에서 재판부는 전원을 유죄로 판정, 징역 8년에서 2년까지의 실형과 같은 기간의 자격정지형을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

△ 구속자 - 김대중 8년, 문익환 8년, 함세웅 5년, 문동환 5년, 이문영 5년, 신현봉 5년, 윤반웅 5년, 문정현 5년, 서남동 4년, 안병무 5년, 이해동 3년.

△ 불구속자 - 윤보선 8년, 함석헌 8년, 정일형 5년, 이태영 5년, 이우정 5년, 김승훈 2년, 장덕필 2년.

항소심은 변호인단이 낸 재판부 기피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선고공판을 계속하여 12월 29일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 윤보선ㆍ김대중ㆍ함석헌ㆍ문익환 - 징역5년, 자격정지 5년.

△ 정일형ㆍ이태영ㆍ이우정ㆍ이문영ㆍ문동환ㆍ함세웅ㆍ신현봉ㆍ문정현ㆍ윤반웅 -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 서남동 - 징역 2년 6개월, 자격정지 2년 6개월

△ 안병무ㆍ이해동ㆍ김승훈 -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징행유예 3년

△ 장덕필 -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

18명의 피고인 전원은 항소심 판결에 불복, 12월 30일 대법원에 상고했다. 77년 3월 22일 대법원 전원합의제(재판장 민복기 대법원장)는 ① 민주구국선언은 사실을 왜곡하고 있고 ② 긴급조치와 헌법을 비방하고 있으며 ③ 원심에 사실 오인이 없고 공소사실은 인정된다는 판결이유를 들어 피고인 전원에 대해 상고를 기각했다.

피고인들의 당당한 법정투쟁으로 체제공방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유신체제에 대해 ① 법적 절차에 당위성이 없고 ② 유신헌법을 성립시키는 국민투표의 과정과 내용에 당위성이 없으며 ③ 정부가 주장하는 유신헌법의 목적에도 당위성이 없으며 ④ 유신헌법의 내용이 독재적인 헌법으로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당위성이 없다는 점 등을 내세웠다.

민주인사들은 “인간의 양심과 자연법, 그리고 인간의 절대권과 우상화를 거부하는 신앙에 비추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반대한다. 그 긴급조치에 의해 이 법정에 섰으므로 마땅히 재판을 거부해야 할 일이나 우리들의 정당성과 양심을 밝히기 위해 재판에 임한다”고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법정에서 공박의 대상이 되었다.

박정희는 야당의 강경노선도 방치하지 않았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법이었다. 신민당 내에서는 ‘김옥선 파동’을 계기로 김영삼 총재를 비난하는 비주류의 공세가 거세게 일어났다. 의원직 총사퇴 결의 때에는 가장 강하게 반대했던 이철승ㆍ고흥문ㆍ신도환계 등 비주류가 김영삼의 총재직 사퇴와 집단지도체제 당헌개정을 요구하며 세몰이에 나섰다.

1976년 5월 25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전당대회는 각목대회의 난투극으로 변하였다. 주류 측이 먼저 대회장을 장악하여 전당대회를 개최하려 하자 비주류측 청년당원들이 대회장을 점거하고 전당대회를 치렀다. 이 과정에서 주류와 비주류의 청년당원들 사이에 각목을 휘두르는 등 폭력사태가 발생, 당원들이 부상하는 사태로 번졌다.

비주류 측에 의해 전당대회장을 빼앗긴 주류 측은 이날 관훈동 중앙당사에서 따로 전당대회를 열어 총재인 김영삼을 만장일치로 재선출했다. 주류측의 전당대회에는 21명의 의원과 415명의 대의원이, 비주류 측의 전당대회에는 34명의 의원과 3372명의 대의원이 각각 참석했다.

신민당의 주류와 비주류는 각기 당대표 변경등록신청을 중앙선관위에 제출했지만, 중앙선관위는 5월 31일 양측의 신청을 모두 각하시켰다. 그러나 중앙선관위는 76년 5월 말이 경과함으로써 김영삼의 총재임기가 소멸되었다고 통고했으며, 김영삼은 6월 11일 총재직 사퇴를 발표하고 전당대회의장 이충환을 총재권한대행으로 지명했다.

신민당 주류와 비주류는 이충환을 중심으로 중도계 의원들이 제시한 7명의 최고위원과 1명의 대표위원을 두도록 하는 당헌개정안에 합의하여 9월 15, 16일 이틀 동안 서울시민회관 별관에서 수습 전당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에 따라 신민당은 ‘반당대회’, ‘각목대회’ 이후 112일 만에 수습 전당대회를 열어 집단지도체제의 당헌을 채택하고 먼저 최고위원의 선출에 들어갔다. 주류 측은 대표최고위원에 김영삼, 최고위원에 이충환ㆍ유치송ㆍ김재광을, 비주류 측은 이철승ㆍ신도환ㆍ고흥문ㆍ정해영 등 7명이 최고위원에 출마해 최다득표자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대의원 767명이 투표하여 최고위원을 선출한 결과 주류의 이충환ㆍ유치송ㆍ김재광ㆍ비주류의 이철승ㆍ신도환ㆍ고흥문 등 6명이 당선되었다.

9월 16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대표최고위원 선거는 김영삼ㆍ이철승ㆍ정일형 등 3명이 경합하여 1차투표에서 김영삼이 349표, 이철승이 263표, 정일형이 134표를 얻었으나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2차투표에 들어갔다. 2차 투표에 앞서 정일형은 이철승의 추대를 선언하고 사퇴했는데, 투표결과 이철승이 389표로, 364표를 얻은 김영삼에게 25표 차로 역전승, 과반수 득표로 대표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당대표위원에 취임한 이철승은 21일 신민당 의원총회에서 지도노선의 방향과 중도통합론에 대해 “현 체제하에 참여하고 그 밑에서 활동하는 한 체제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개선해 나가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면서 베트남사태를 예를 들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극단적인 혼란이 일어나서는 안 되므로 안보논의와 자유권은 이러한 여건 속에서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바라던 바였다.

비주류로 전락한 김영삼 계가 이철승의 안보논리와 자유의 유보론은 공화당의 논리와 똑같은 것이라고 비난하자, 야당에서는 다시 선명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한국의 전통야당이 유신체제의 ‘제3중대’로 편입되었다는 비판이 따랐다.

신민당의 선명논쟁은 계속되어 이철승은 “현 체제 내에서의 기본자세는 ‘참여하의 개혁’이며 개혁이란 의미는 부당 요소를 하나하나 개선해 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비주류 측은 3ㆍ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정일형 문제 등을 제시하면서 유신체제의 타협노선이라고 몰아붙였다.

박정희는 국회와 야당이 체제내의 모순과 갈등을 걸러내는 순기능의 역할을 하는 데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어용화ㆍ관제화를 만들었다. 대의기구가 작동하지 못하면 국민의 직접 행동에 봉착하게 된다.

박정희는 온건노선의 야당으로 당장은 체제유지에 수월했지만, 국민들 내부에서 거대한 반정부 용암이 꿈틀대기 시작하고 있음을 놓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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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9-2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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