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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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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파이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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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밋네요, 이분이 이런 능력자라는 것을 최근에나 알았습니다.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대통령이 된다는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저는 이제껏 사업한번 변변히 차려본 적이 없네요. ㅋ ㅋ

한국사가 선택과목이라는 세대는 말 할 것도 없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전후세대조차도 국사는 배웠어도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에 대해선 잘 모르죠. 
대부분 독재하다가 4.19로 하야했다는 정도로 기억 할 것입니다.  만일 국사선생님이 양념을 보탰다면 이대통령이 미국의 뜻에 반하여 자의로 반공포로(전향 북한군) 석방하고 전쟁중 북진통일 주장했다는 정도?

이차대전후 많은 지식인,정치인들 당대의 스타 스탈린에 열광하여 좌익으로 물들 때 탁월한 정치,외교 식견과 수완으로 남한에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건국대통령 치고는 정말 한국 현대사에서 잊혀진 인물이라 할 수 있죠.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후 내코가 석자니 초대대통령께 걸맞는 예우나 신경을 쓰지 못 했던 것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역사는 지난 후에나  잘 보이는 것이라.

이승만은 1875년에 태어 났고 20대 초 독립운동으로 7년간 투옥 1904년 도미하여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바드 석서, 35세에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는다.(1910년 도미 6년 만에. 와우~  졸업장이 다는 아니지만  요즘에도 보기 드문 초초스펙) 이차대전이 끝나기 전 까지는 미국 정계,외교계에 독립을 호소하였죠. 도미 다음해 1905년 루즈벨트 대통령 만나 독립 보존을 청원. 속전속결이네요 뜻은 못 이루었지만.

1933년 1월과 2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때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에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를 만났고, 1934년 10월 뉴욕에서 결혼하였다. (그새 또~ ㅋ ㅋ )
1940년 임정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곧 다가올 태평양 전쟁을 예상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하였다. 이 책이 괭장히 많이 팔린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예상- 정치,외교 실전 감각이 대단하죠 ?

이분이 1919 년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초대대통령였던 것도 요즘에나 알았습니다. 안창호와 갈등은 빚었지만.
아래 기사가 "나라를 세우다"의 뜻에 대하여 곰곰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습니다.

"해방 3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를 세운 것이 '이승만의 1차 건국 투쟁'이었다. 부랴부랴 건국은 해놓았지만 미완의 상태였다. 이승만은 6·25전쟁 중에도 거의 혼자서 국내외 적들과 싸우며 대통령 직선제·한미 안보동맹·자유시장경제를 채워넣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 대한민국이 이 시기에 완성된 것이다."

"김구는 1947년 출간한 백범일지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계급 독재'라고 했지만, 남북한 총선거를 위한 유엔감시단이 오자 김일성과의 연립정부 카드를 꺼냈다. 당시 이승만이 중심을 잡지 않았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03/20200803000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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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5

작성일2020-08-02 22:50

sansu님의 댓글

sansu
해방이후 한반도 정세에 미국의 영향력이 스탈린의 공산세력보다 강했다는 결론입니다.

jorge님의 댓글

jorge
자유세계에서 자유를 만끽 하며 살아온 지난날들
그의 은혜를 모른다면 인간도 아니지요
허나 요즈음은 그 자유가 하나둘 살아져 가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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