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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득표율 제9대 대통령 당선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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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긴급조치는 만능의 ‘도깨비 방망이’였다.

박정희가 서울농대생 김상진 군의 할복자결을 계기로 반유신 투쟁이 거세게 전개되자 1975년 5월 13일 선포한 긴급조치 제9호는 계엄령에 버금가는 위력을 과시했다. 유신체제를 지탱한 것은 잇따라 선포된 긴급조치였다.

박정희는 1978년 7월 6일 제9대 대통령선거를 맞아 이번에도 ‘체육관 선거’에서 단독으로 출마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78명 중 2,577표, 무효 1표라는, 또 한 차례 코메디 같은 선거를 치러 당선되었다. 집권 17년 차에 이른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선거가 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는 같은 해 12월 12일 투표가 실시되었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12월 12일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이 선거에서 여당을 이긴 날이고, 그로부터 만 1년 후인 79년의 12월 12일은 박정희가 키워온 신군부세력이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을 짓밟고 군권을 장악한 날이기 때문이다.

유신체제가 출범한 이래 두 번째 총선을 앞두고 여ㆍ야당은 내부정리에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은 대통령의 지명 케이스인 까닭에 3분의 2석인 154석을 놓고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야당은 이철승 체제의 신민당이 ‘박정권과 유착관계’라는 비난을 받아가면서 ‘체제 내의 야당’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재야와 학생들은 많은 희생을 치러가면서 반유신 투쟁을 전개했고, 국내외적으로도 굵직한 사건ㆍ사태들이 잇따라 정치쟁점으로 등장했다.

이철승은 1970년에는 신민당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미국의회 의원 등에게 매수활동을 벌인 박동선 사건을 비롯 청와대 도청사건, 현대아파트 불법분양 사건, 공화당 성낙현 의원의 여고생 추행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긴급조치 하에서, 그마저 어용야당이라는 비판을 받는 야당의 처지에서 치러진 선거결과는 그야말로 예상 밖으로 나타났다. 선거인 총수 1,948만 9,490명 중 77.1%의 투표율을 낸 가운데 공화당 68명, 신민당 61명, 통일당 3명, 무소속 22명이 당선되었다. 53개 지역에서는 공화ㆍ신민당 후보가 동반 당선되는 사태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신민당이 32.8%의 득표율을 차지하여 공화당의 31.7%보다 1.1%를 앞섬으로써 사상 처음으로 야당이 여당의 득표를 앞서는 ‘이변’을 가져왔다.

그 결과 공화당은 9대 때의 73석보다 5석이 줄고 신민당은 52석에서 9석이 늘었다. 게다가 공화당은 대도시인 서울과 부산에서 고전했다. 한편 제3기 유정회 의원 77명의 추천은 12월 19일 밤 발표되었는데 신규가 52명, 재추천이 25명이었다. 당시 국민이 시국에 대한 의사를 표명하기는 총선 밖에 없었고, 총선을 통해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거부하는 표심을 드러냈다.

유신체제의 여러 가지 모순구조 중의 하나는 선거제도였다. 대통령선거는 어용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단일후보를 두고 투표하여 99.9%의 득표 당선자를 내는가 하면, 국회의원의 3분의 1석을 대통령이 추천하도록 하고, 임기 6년제의 지역구 의원은 여야의 동반당선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런 구조상의 모순 때문에 신민당이 투표율에서 1.1% 앞서고도 3분의 1 의석도 차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신민당은 선거 후 “신민당이 공화당보다 전체 득표에 앞선 것은 평화적 정권교체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며, 민주주의 수호의 결전에서 신민당이 완승했다는 의미이지만 선거제도의 모순으로 3분의 1의석밖에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는 토로에서도 선거제도의 모순은 잘 드러났다.

신민당은 12ㆍ12총선에서 공화당보다 많은 득표를 한 것을 대여투쟁과 대정부 비판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국민의 요구로 받아들이면서 원내투쟁을 강화해나갔다. 1.1%의 승리를 등에 업고 등원한 신민당 의원들은 박정희가 총선민의 따위는 아랑곳 없이 국회의장 후보로 유정회 출신 백두진을 내정하면서 강경한 입장을 천명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이같은 신민당의 방침에 대해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서 의장선출 과정에서 퇴장할 경우 ‘심각한 사태’가 초래될 것이라고 역시 강경하게 맞섰다. 신민당은 이에 대해 “반대할 방법까지도 강요하는 여당의 태도는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대응했다.

그러나 타협안이 마련되어 국회 본회의 의장선출에는 대표최고위원인 이철승을 비롯한 신도환ㆍ이충환ㆍ유치송ㆍ고흥문ㆍ김재광 등 최고위원과 원내총무 송원영만이 참석, 백지투표로 반대의사를 밝혔으며, 비주류의 김영삼 등 14명은 의사당에 들어왔다가 투표 전에 퇴장했다. 나머지 신민당 의원들과 친야 무소속 의원 7명은 본회의장에 입장하지 않았다.

‘백두진 파동’은 다가올 대격동의 오픈 게임에 불과했다. 1.1% 승리는 결국 10ㆍ26사태로 연결되어 박 정권의 종언을 고하는 새벽의 나팔소리와 같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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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9-23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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