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가 쓴 ‘이승만 대통령’ 책… 1년 만에 1만부 넘게 팔린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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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달이 만난 사람] <이승만 건국 대통령 이야기>의 저자 정현채 씨
송의달 선임기자
입력 2021.08.14 10:15
작년 6월 말 나온 책 <엄마가 들려주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 이야기>는 네 가지 측면에서 독특하다. 먼저 저자가 대학교수나 전문 연구자가 아닌 두 명의 자녀(대학생, 고교생)를 키우는 가정주부이다. 출간 1년 1개월여만에 우파(右派) 서적으로 드물게 5쇄를 찍어 1만1000여부나 팔렸다.
또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로 굳게 믿고 있던 출판사 대표의 생각을 180도로 바꾸는 ‘회심(回心·마음을 돌이켜 먹음)’의 기적을 낳았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공간에서 일반 시민들 상대로 공모하는 크라우드(crowd) 펀딩 기법으로 출판 비용을 마련했다.
자녀 두 명을 키우는 평범한 가정주부 정현채 씨가 쓴 이승만 대통령 일대기. 사진과 삽화, 용어 설명 등이 많아 읽기 쉽고 유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보담 제공
자녀 두 명을 키우는 평범한 가정주부 정현채 씨가 쓴 이승만 대통령 일대기. 사진과 삽화, 용어 설명 등이 많아 읽기 쉽고 유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보담 제공
◇“부모세대에도 자신있게 추천하는 책”
전문가들의 이 책에 대한 반응도 호평(好評) 일색이다.
“자녀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자라주기를 원하는 부모라면, 이 책을 꼭 읽게 하라고 권하고 싶다. 성인이 된 내 아이들에게도 이 책을 읽게 할 것이다”(전미란 공주대 교수), “학생들 뿐 아니라 부모 세대에게도 이 책을 자신있게 추천한다.”(이인호 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
이달 9일 낮 저자인 정현채씨와 도서출판 ‘보담’의 김샛별(33) 대표를 서울 광화문 주변에서 만났다. (※정 씨는 개인 생활 보호를 이유로 정면 사진촬영을 고사했다.)
- 보통 시민이 이승만 대통령 책을 쓴 배경이 궁금하다.
“2015년, 중학교 2년과 초등 4학년이던 두 딸이 역사 공부를 시작할 무렵 지역도서관에 갔었다. 그곳에 있는 많은 역사 책들의 99%는 좌파 성향 일색이었다.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否認)하고 북한 주체사상은 교묘하게 미화하고 있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공로 조차 부정하고 있었다.”
◇“처음엔 책 불가능해 보였지만 뜻 품으니 길 열려”
정씨는 “기적과도 같은 대한민국 건국 역사를 누군가가 써 주기를 3년이나 기다렸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 ‘나라도 한 번 써보자’며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이승만(왼쪽), 박정희.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왼쪽)과 한국 경제 발전을 이끈 박정희 대통령/조선일보DB
- 과거에 한 번이라도 책을 낸 적이 있나?
“전혀 없다. 대학 시절(80년대 후반 학번) 운동권 논리에 동조했으나 결혼 후 전업 주부로서 두 아이를 쭉 키워왔다. 책 쓰는 게 처음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뜻’을 품으니 ‘길’이 열리더라.”
1년간 작업한 정 씨는 2019년 8월 초고(草稿)를 들고 수소문 끝에 같은 기독교 신자인 김샛별 대표를 만나 출판을 의뢰했다. 그러나 미술 디자인 전공자인 김 대표는 한국현대사에 관심이 없었을 뿐 더러 이승만을 혐오하고 있었다. 김샛별 대표의 말이다.
◇“독재자로 생각...원고 다 읽고서는 펑펑 눈물 쏟아”
“무조건 ‘이승만은 독재자’라고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었다. 단지 출판을 거절할 핑계를 찾으려 했을 뿐이다. 이승만 원고를 만진다는 것 자체가 창피해 사무실 밖으로 나가 비상구 계단에 가서 봤다. 그런데 원고를 다 읽는 순간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이런 위대한 건국대통령을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게 너무 죄송스러웠다. ‘책을 꼭 잘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이 절로 들었다.”
1965년 7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장례식 모습. 영결식이 열린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남대문과 제1한강교를 지나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10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고인을 애도했다./공보처
1965년 7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장례식 모습. 영결식이 열린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남대문과 제1한강교를 지나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10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고인을 애도했다./공보처
그는 “모국(母國)인 대한민국의 근원 조차 몰랐던 내가 부끄러웠고 더 이상 ‘헬조선’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며 “그해 9월부터 10개월간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 ‘크라우드 펀딩’은 어땠나?
“2019년 11월부터 인터넷을 통해 알렸는데 4개월 동안 200여분이 2만원부터 100만원까지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후원해 주셨다. 놀랐고 감사한 일이다. 이런 책에 목말라 하는 국민들이 많음을 확인했다.”
2019년 7월 18일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에서 '미안하다 청년들아'를 주제로 열린 이승만 서거 54주년 추모 세미나./연합뉴스
2019년 7월 18일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에서 '미안하다 청년들아'를 주제로 열린 이승만 서거 54주년 추모 세미나./연합뉴스
◇200여명 십시일반으로 참여...‘청소년 도서 1위’ 올라
- 힘들거나 어려웠던 점은?
“정부의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에서 이승만 대통령 사진자료를 사용하려 했다. 그런데 그의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사진들은 ‘상업적 이용 금지’ 표시가 붙어 있었다. 반대로 부정적인 사진들은 ‘자유 다운로드’ 표시가 돼 있더라. 정부가 자료 이용을 선별·제한하고 있는 듯 했다.”
“진짜 순수한 마음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과 한 일들을 정리하고자 했다. 사진과 삽화, 용어 설명, 연표 등을 많이 넣어 일반인들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시장에서 독자들의 반응도 좋아 이 책은 작년 7월 교보문고의 청소년 국내도서 부문 판매 1위에 올랐다.
송의달 선임기자
입력 2021.08.14 10:15
작년 6월 말 나온 책 <엄마가 들려주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 이야기>는 네 가지 측면에서 독특하다. 먼저 저자가 대학교수나 전문 연구자가 아닌 두 명의 자녀(대학생, 고교생)를 키우는 가정주부이다. 출간 1년 1개월여만에 우파(右派) 서적으로 드물게 5쇄를 찍어 1만1000여부나 팔렸다.
또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로 굳게 믿고 있던 출판사 대표의 생각을 180도로 바꾸는 ‘회심(回心·마음을 돌이켜 먹음)’의 기적을 낳았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공간에서 일반 시민들 상대로 공모하는 크라우드(crowd) 펀딩 기법으로 출판 비용을 마련했다.
자녀 두 명을 키우는 평범한 가정주부 정현채 씨가 쓴 이승만 대통령 일대기. 사진과 삽화, 용어 설명 등이 많아 읽기 쉽고 유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보담 제공
자녀 두 명을 키우는 평범한 가정주부 정현채 씨가 쓴 이승만 대통령 일대기. 사진과 삽화, 용어 설명 등이 많아 읽기 쉽고 유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보담 제공
◇“부모세대에도 자신있게 추천하는 책”
전문가들의 이 책에 대한 반응도 호평(好評) 일색이다.
“자녀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자라주기를 원하는 부모라면, 이 책을 꼭 읽게 하라고 권하고 싶다. 성인이 된 내 아이들에게도 이 책을 읽게 할 것이다”(전미란 공주대 교수), “학생들 뿐 아니라 부모 세대에게도 이 책을 자신있게 추천한다.”(이인호 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
이달 9일 낮 저자인 정현채씨와 도서출판 ‘보담’의 김샛별(33) 대표를 서울 광화문 주변에서 만났다. (※정 씨는 개인 생활 보호를 이유로 정면 사진촬영을 고사했다.)
- 보통 시민이 이승만 대통령 책을 쓴 배경이 궁금하다.
“2015년, 중학교 2년과 초등 4학년이던 두 딸이 역사 공부를 시작할 무렵 지역도서관에 갔었다. 그곳에 있는 많은 역사 책들의 99%는 좌파 성향 일색이었다.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否認)하고 북한 주체사상은 교묘하게 미화하고 있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공로 조차 부정하고 있었다.”
◇“처음엔 책 불가능해 보였지만 뜻 품으니 길 열려”
정씨는 “기적과도 같은 대한민국 건국 역사를 누군가가 써 주기를 3년이나 기다렸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 ‘나라도 한 번 써보자’며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이승만(왼쪽), 박정희.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왼쪽)과 한국 경제 발전을 이끈 박정희 대통령/조선일보DB
- 과거에 한 번이라도 책을 낸 적이 있나?
“전혀 없다. 대학 시절(80년대 후반 학번) 운동권 논리에 동조했으나 결혼 후 전업 주부로서 두 아이를 쭉 키워왔다. 책 쓰는 게 처음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뜻’을 품으니 ‘길’이 열리더라.”
1년간 작업한 정 씨는 2019년 8월 초고(草稿)를 들고 수소문 끝에 같은 기독교 신자인 김샛별 대표를 만나 출판을 의뢰했다. 그러나 미술 디자인 전공자인 김 대표는 한국현대사에 관심이 없었을 뿐 더러 이승만을 혐오하고 있었다. 김샛별 대표의 말이다.
◇“독재자로 생각...원고 다 읽고서는 펑펑 눈물 쏟아”
“무조건 ‘이승만은 독재자’라고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었다. 단지 출판을 거절할 핑계를 찾으려 했을 뿐이다. 이승만 원고를 만진다는 것 자체가 창피해 사무실 밖으로 나가 비상구 계단에 가서 봤다. 그런데 원고를 다 읽는 순간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이런 위대한 건국대통령을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게 너무 죄송스러웠다. ‘책을 꼭 잘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이 절로 들었다.”
1965년 7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장례식 모습. 영결식이 열린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남대문과 제1한강교를 지나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10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고인을 애도했다./공보처
1965년 7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장례식 모습. 영결식이 열린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남대문과 제1한강교를 지나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10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고인을 애도했다./공보처
그는 “모국(母國)인 대한민국의 근원 조차 몰랐던 내가 부끄러웠고 더 이상 ‘헬조선’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며 “그해 9월부터 10개월간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 ‘크라우드 펀딩’은 어땠나?
“2019년 11월부터 인터넷을 통해 알렸는데 4개월 동안 200여분이 2만원부터 100만원까지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후원해 주셨다. 놀랐고 감사한 일이다. 이런 책에 목말라 하는 국민들이 많음을 확인했다.”
2019년 7월 18일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에서 '미안하다 청년들아'를 주제로 열린 이승만 서거 54주년 추모 세미나./연합뉴스
2019년 7월 18일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에서 '미안하다 청년들아'를 주제로 열린 이승만 서거 54주년 추모 세미나./연합뉴스
◇200여명 십시일반으로 참여...‘청소년 도서 1위’ 올라
- 힘들거나 어려웠던 점은?
“정부의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에서 이승만 대통령 사진자료를 사용하려 했다. 그런데 그의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사진들은 ‘상업적 이용 금지’ 표시가 붙어 있었다. 반대로 부정적인 사진들은 ‘자유 다운로드’ 표시가 돼 있더라. 정부가 자료 이용을 선별·제한하고 있는 듯 했다.”
“진짜 순수한 마음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과 한 일들을 정리하고자 했다. 사진과 삽화, 용어 설명, 연표 등을 많이 넣어 일반인들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시장에서 독자들의 반응도 좋아 이 책은 작년 7월 교보문고의 청소년 국내도서 부문 판매 1위에 올랐다.
추천 1
작성일2021-08-14 11:02
산울림님의 댓글
산울림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 대통령은 적어도 세 가지 최초 기록의 보유자다. 미국 <타임(TIME)>지(誌) 표지(1950년 10월16일)에 등장한 최초의 한국인, 미국 대학교에서 최초로 박사학위(1910년)를 받은 한국인, 뉴욕 시내(브로드웨이)에서 카퍼레이드(1954년 8월2일)를 한 최초의 외국 국가원수 기록이다.
1947년 미 군정청(軍政廳)이 1000명의 서울 시민을 상대로 실시한 ‘대통령 후보자 여론조사’에서 이승만(43.9%)은 김규식(18.5%), 여운형(17.5%), 김구(15.2%)를 2~3배 차이로 압도했다.
그의 장례식날(1965년 7월 27일)에는 영결예배 장소인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남대문, 제1한강교를 거쳐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100만명 넘는 시민들이 나와 애도(哀悼)했다.
1947년 미 군정청(軍政廳)이 1000명의 서울 시민을 상대로 실시한 ‘대통령 후보자 여론조사’에서 이승만(43.9%)은 김규식(18.5%), 여운형(17.5%), 김구(15.2%)를 2~3배 차이로 압도했다.
그의 장례식날(1965년 7월 27일)에는 영결예배 장소인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남대문, 제1한강교를 거쳐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100만명 넘는 시민들이 나와 애도(哀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