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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秋 (만추) 박 원 재(강원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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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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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22 호
만추(晩秋)
박 원 재(강원대 강사)

  대학 때 은사 한 분이 80이 넘은 연세에 시집을 내셨다.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철학의 대가이신지라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분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일상의 소회들을 감성적 언어로 맛깔스럽게, 그러면서도 결코 부박하지 않게 버무려내신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누가 보더라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드신 것이 분명함에도 “잠 깼다/ 살아 있음의 경이로움/ 소음의 도시에 까치 소리/ 고음으로 도드라지게 울린다”며 감각의 건재함을 자랑하신다. 

  그러면서 “유일한 자가용”인 몸에 대해 “36년도 출고, 시발보다 오래 굴려온/ 아날로그와 디지털 기능의 복합형/ 엔진만은 아직 벤츠 못지않은/ 이륜구동의 국산 특제”(윤사순, 「자가용」)라며 호기로움도 곁들이신다. 

  몸은 시간에 순응해도 마음은 오히려 더욱 젊어지는 이런 모습을 뵈니, 나이듦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대중가요 노랫말이 절로 떠오른다.


풍요와 성취, 고독과 상실

    계절의 눈은 목하 가을의 한복판을 지나는 중이다. 바야흐로 ‘만추(晩秋)’로 접어드는 것이다. 아직 단풍이 맹렬한 기세로 아랫녘을 점령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 단어를 벌써 입에 올리는 것이 망설여지는 면이 없진 않지만, “한계령 넘기 시작하던/ 단풍 예대로/ 새재 대재 다 넘었다”(윤사순, 「단풍」)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우물에서 숭늉 찾는다고 탓할 일만도 아니다. 

  뭐 밖에서만 찾을 거 없이, “나뭇가지 사이로/ 잎들이 떠나가네/ 그림자 하나 눕네”(강은교, 「가을의 시」)라는 범상한 표현이 전혀 범상치 않게 느껴지는 게 요즘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이를 증명한다. 어쨌든, 아무렇거나, 마음은 이 때문에 이미 이 매혹적인 단어의 유혹에 자발적으로 무장해제 당할 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만추’가 얼마나 매혹적인가 하는 것은 그 이웃말들, 그러니까 ‘만춘(晩春)’과 ‘만하(晩夏)’ 그리고 ‘만동(晩冬)’은 애저녁에 생명력을 잃고 사전 속에 빈사 상태로 누워있는데, 이 단어만 계절병처럼 연례행사로 사람들의 마음을 전염시킨다는 사실이 잘 말해준다. ‘10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노랫말 덕분에 이맘 때 어간이면 어김없이 불리는 어떤 유행가처럼. 

  만추가 주는 인상은 상반적이다. ‘결실’로 상징되는 풍요와 성취의 이미지가 한 편에 있다면, 다른 편에는 ‘쇠락’으로 상징되는 고독과 상실의 이미지가 있다. 물론 정답은 없다. 둘 모두 어디까지나 사람의 감수성이 계절에 덧씌운, 이른바 ‘감정이입(感情移入)’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마음의 작용이 만들어낸 자의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하지만 삶 자체가 태생적으로 주관성의 덫을 벗어날 수 없음을 생각한다면 어떤 사물에 대해 마음의 자의성이 구축하는 이미지의 강고함이 거꾸로 삶을 흔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김광균, 「추일서정」)하는 무가치와 무의미의 푯대인 반면, 

  다른 이는 그것이 타는 연기 속에서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잘 익은 개암 냄새”를 맡으며,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이효석, 「낙엽을 태우며」)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모든 것은 마음 하기에 달린 것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상투어가 그 상투성을 벗는 대목이다. 어쩌면, 아니 단언컨대, 진리는 상투적이다. 상투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오랜 시간의 침식을 견뎌내며 아직도 유통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꺾이고 시들고 떨어지는 것이 가을이라 생각하면 “처음에는 자작대는 빗소리에 바람 소리 같더니/ 돌연 솟구쳐 물결 부딪치는 소리 내다가/ 마치 파도가 밤중에 일렁이고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치는 듯하고/ 사물에 부딪치는 모습은 쩽그렁쩽그렁 쇠붙이 울리는 듯한”(구양수, 「추성부」) 심란한 이미지로 만추는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36년도 출고’된 ‘이륜구동의 국산 특제’를 굴리면서도 ‘소음의 도시’ 속 도드라지는 ‘고음의 까치 소리’에서 ‘살아 있음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삶의 내공에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요량이 없다. 

 

비워야 들리는 소리

  이치가 이러하다면, 만추의 ‘쇠락’마저도 ‘끝’으로만 여길 일은 아닐 성싶다.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서정주, 「푸르른 날」) 드는 것이 단풍일지라도 그 변절을 한갓 종말의 징표로만 읽지 말 일이다. ‘지침’은 다른 의미로 곧 숙성이고 곰삭음이다. 울다가 뿐만 아니라 웃다가도 지치는 것이 우리 일상이 아닌가? 

  그러니,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르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결국은 조금씩 취해 가지고/ 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서정주, 「행진곡」)이라며 삶의 고단함을 넋두리하더라도, 쇠락을 통해 재생을 준비하는 만추의 소리에는 그래도 귀를 열어둘 일이다. 

  몇 해 전 자신의 지론대로 무소유의 삶을 일관하다가 종국엔 몸까지 말끔히 비워버린 어느 선승의 다음과 같은 말을 죽비소리로 삼아서. “열린 귀는 들으리라! 한때 무성하던 것들이 져버리고만 들녘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소리 없는 소리를”(법정, 『서 있는 사람들』).

  듣기 위해선 또한 그 선승의 가르침처럼 좀 더 비워야 할 것이다. 진정한 충만은 빔 속에 깃든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하여 때로는 “이 좋은 가을에/ 나는 정말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여러 번 일러줬는데도/ 나무들은 물 버리느라 바쁘고/ 동네 개들도 본체만체”하는 것이 섭섭해 “소주 같은 햇빛을 사발때기로 마시며/ 코스모스 길을 어슬렁거”(이상국, 「용대리에서 보낸 가을」)리며 계절의 허허로움을 달래더라도 그 코스모스의 귀는 닮아야 한다.
“바람을 떠나보내며 흔들리는 코스모스 햇살의 칼로 제 몸을 저며 바람을 잊지 않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얇아진” 그 귀 말이다. 그래야만 “바람이 불지 않아도 바람을 듣고/ 흔들리지 않아도 울”(김주대, 「코스모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글쓴이의 다른 글 읽기
글쓴이 / 박 원 재
· 강원대 강사
· 전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 중국철학

· 저서
〈유학은 어떻게 현실과 만났는가〉예문서원, 2001
〈철학, 죽음을 말하다〉 산해, 2004 (공저)
〈근현대 영남 유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한국국학진흥원, 2009 (공저)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글항아리, 2013 (공저)

· 역서
〈중국철학사1〉간디서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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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8-11-0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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