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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둘도 많다"던 그 시절…사진 속에 비친 생활상 32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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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가운데 요즘엔 국가 차원에서 출산을 적극 장려하지만 1970~80년대엔  ‘둘도 많다’  ‘삼천리는 초만원’ 같은 포스터를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학생을 밀어 넣고는 차 문을 탕탕 치며 ‘오라이!’ 를 외치던 버스안내양도 기억납니다. 초등학생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세상이지만 집에 전화기 한 대 있으면 큰 재산이고 동네 자랑거리였던 것도 불과 몇십년 전입니다.  
  

까막눈은 안된다 …50~60년대 문맹퇴치운동 활발
60~80년대 어린이날 즈음에 우량아 선발행사 곳곳서 
1969년 낭비줄이자며 가정의례준칙 등장 …99년 폐지 
교환원없는 장거리자동전화(DDD) 전국망 87년 구축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의 생활은 그만큼 많이 변했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최근 『기록과 테마로 보는 대한민국(생활편)』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에서 '4H 운동'까지 32개 주제를 통해 광복 이후 우리의 주요 생활상을 사진과 함께 보여줍니다. 버스안내양 뿐 아니라 쥐잡기 운동, 타지 경진대회 등 지금은 잊혀진 흥미로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염태정 기자 yonnie@joongang.co.kr,  [사진 제공: 국가기록원] 
  
  
라디오 공장 작업모습(1962)

라디오 공장 작업모습(1962)

  
1. 응답하라 아날로그 시대여 - 라디오 공장의 작업 모습(1962) 
1959년 치약을 만들던 락희화학(LG화학의 전신)은 최초의 국산 라디오 ‘금성A-501’을 선보였다. 라디오는 당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등을 통해 빠르게 생활 속으로 파고들었다. 국산 라디오가 생산되고 7년 후인 1966년에는 국내 최초의 흑백 TV가 등장하며 안방극장 시대를 열었다.   
  
제2주년 가정의례준칙선포기념식(1971)

제2주년 가정의례준칙선포기념식(1971)

  
2. 가정의례준칙 -  제2주년 가정의례준칙 선포기념식 (1971) 
 1960년대 말 산업화가 진행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예전에 비해 화려한 가정의례가 늘어났다.  정부는 1969년 1월 낭비를 줄이자며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을 만들고 이 법의 시행령에 ‘가정의례준칙’을 넣었다. 좋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자유를 억압한다는 시각도 있었다. 가정의례준칙은 1999년 폐지됐다.   
  
제1차 가족계획전국대회(1963)

제1차 가족계획전국대회(1963)

  
3. 가족계획 - 제1차 가족계획전국대회(1963) 
 6ㆍ25 전쟁 이후 본격적인 베이비붐이 시작되면서 한 가정에 4~5명 자녀는 보통이었다. 인구는 빠르게 늘었다. 1961년 인구 증가 억제을 위한 가족계획사업이 펼쳐졌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같은 구호도 등장했다. 지금은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률 속에 국가 차원서 출산을 장려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위안 잔치(1972)

할아버지 할머니 위안 잔치(1972)

  
4. 경로우대제도 - 할아버지ㆍ할머니 위안 잔치 (1972)

 1982년 경로우대제가 실시됐다. 65세 이상의 노인은 국가나 자치단체의 운송 시설. 기타 공공시설을 무료 또는 할인된 요금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이른바 ‘지공거사(지하철 공짜로 타는 노인)’는 경로우대제의 산물이다. 고령 인구가 늘면서 무료 이용을 둘러싼 논란도 일고 있다. 
  
김장배추 나르기(1957)

김장배추 나르기(1957)

  
5. 김장 - 김장배추 나르기(1957) 
 입동 전후,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도시나 농촌이나 김장 담그기에 나섰다.  김장은 기나긴 겨울의 첫 준비였다. 여자들이 김장을 하면 남자들은 구덩이를 파고 김칫독을 묻었다. 지금은 마트에서 사온 김치를 김치냉장고에 보관하는 집이 늘고 있다.      
  
전국농업기계전시회(1974)

전국농업기계전시회(1974)

  
6. 농업기계화 - 전국농업기계전시회 (1974) 
 1960년대 이후 농기구 현대화가 본격화됐다. 도시화로 농촌 인구가 빠르게 줄면서 농업 기계화는 시급한 일이었다.  재산 목록 1호는 소 대신 경운기가 차지했다. 경운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논을 갈고 나면 이웃의 논을 갈아주면서 돈도 벌고 인심도 얻었다.   
  
한 자리에 모여 라디오 듣는 가족(1957)

한 자리에 모여 라디오 듣는 가족(1957)

  
7. 라디오 방송 - 한 자리에 모여 라디오 듣는 가족들(1957) 
 최초의 라디오 방송은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에서 시작했다. 당시 라디오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경성방송국은 1945년 8ㆍ15 광복 이후 서울중앙방송국으로 바뀌면서 국영방송이 시작됐다. 1954년 12월 15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방송사인 기독교방송(CBS)가 첫 전파를 발사했다.   
  
라면공장작업 모습(1972)

라면공장작업 모습(1972)

  
8. 라면 - 라면 공장 작업 모습 (1972) 
  국내에 처음 선보인 라면은 1963년 9월 출시된 삼양라면이다. 처음엔 소비자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밥과 국, 반찬을 먹어야 한 끼 식사를 했다는 인식이 컸다. 하지만 혼분식 장려책에 간편한 조리법, 시원하고 얼큰한 국물이 인기를 끌면서 라면 판매를 빠르게 늘었다. 2016년 소비량은 약 36억개.   
  
문맹퇴치 교육 공로자 표창식(1953)

문맹퇴치 교육 공로자 표창식(1953)

  
9. 문맹퇴치 운동 - 문맹퇴치 교육 공로자 표창식(1953) 
1920년대 당시 2000만 국민 중 80~90%가 문맹이었다. 광복이후 문맹퇴치가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야학과 천막학교 등을 중심으로 문맹퇴치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다. 문교부에서는 1954년 ‘전국 문맹퇴치 5차년 계획’(1954~1958) 추진했다.   
  
추석송편빚는 가족(1957)

추석송편빚는 가족(1957)

  
10. 설과 추석 - 추석 송편 빚는 가정(1957) 
일제 강점기 일본은 우리의 전통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세시 명절을 억압했다. 광복 후 정부가 ‘신정’을 유일한 설, 휴무일로 지정해  전통의 설을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1989년 공휴일 규정이 고쳐지면서 설이 제대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설과 추석엔 민족의 대이동이 이뤄지지만 요즘엔 역귀성도 흔하다.   
  
제1회 계량의 날 기념식(1966)

제1회 계량의 날 기념식(1966)

  
11. 미터법 - 제1회 계량의 날 기념식( 1966) 
 10월 26일은 계량의 날이다. 세종대왕이 계량법을 통일한 날이라고 한다. 근대 이전 길이는 척, 무게는 관을 주로썼다. 1961년에  법정 계량의 기본 단위를 미터법으로 하는 ‘계량법’이 제정됐다. 1964년 1월엔 미터단위를 사용토록 했다. 2007년 7월부터는 ㎡, ㎏, 리터(L) 등 미터법을 의무화했다.   
  
안내양이 있는 버스승차 모습 (1961)

안내양이 있는 버스승차 모습 (1961)

  
12. 버스안내양 - 안내양이 있는 버스 승차모습 (1961) 
  버스안내양은 1920년대 후반 처음 등장했다. 선망의 직업이었다. 광복이후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버스 안내양 제도는 1961년 재도입됐다. 대부분 지방에서 도시로 돈 벌러온 누이들 이었다. 1975년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주인공 영자도 버스안내양을 했었다. 버스 안내방송ㆍ자동문 등이 도입되면서 안내양은 사라졌다.   
  
일광절약시간제 제정에 관한 문건(1949)

일광절약시간제 제정에 관한 문건(1949)

  
13.  서머타임제 - 일광절약시간제 제정에 관한 문건(1949) 
 서머타임제는 18세기 후반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이 고안했다. 우리나라는 1949년부터 서머타임제를 실시했다. 그러다 1961년 잦은 시간 변경이 혼란을 일으킨 다는 이유로 폐지됐다. 그러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1987년 시행됐다가 2년만인 1989년 폐지됐다.   
  
제 39회 어린이날 기념식(1961)

제 39회 어린이날 기념식(1961)

  
14. 어린이 날 - 제 39회 어린이날 기념식 (1961) 
 소파 방정환 선생은 1922년 3월 색동회를 조직하고 5월1일을 어린이 날로 정했다. 광복 후 1946년 5월 5일을 어린이 날로 했다. 1975년부터는 공휴일로 지정됐다.  1950~60년대 어린이 날에는 창경원 등에서 기념식도 열렸다. 1957년엔 ‘어린이 헌장’도 제정됐다.   
  
연탄공장작업모습(1963)
추천 1

작성일2017-10-04 08:22

결론은미친짓이다님의 댓글

결론은미친짓이다
그땐..
그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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