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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교적 중립적 기록 제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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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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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승만 시대(7) 러-일 전쟁..출옥..고종 밀사로 미국 유학길
3. 해양문명권에 대한 적응능력을 갖추려하다

출옥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르다

  1904년 2월에 터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감에 따라 한성감옥의 정치범에 대한 석방이 시작되었다. 그에 따라 감방 동료들이 하나씩 자유를 찾고 있었다. 이승만을 아끼던 민영환과 한규설,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은 그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석방자 명단에 끼지 못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영영 감옥을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초조해졌다.

  거의 막바지인 1904년 8월 9일에 가서야 석방 허가가 났다. 간수가 감방 문을 열고 그에게 나오라고 손짓했을 때, 이승만과 그를 도와주려 했던 감옥서장 김영선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감옥 뒤뜰에서 처형당할 때 만세를 부르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던 애국자 장호익이 떠올랐다. 장호익은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개화파 장교로서 박영효의 쿠데타 실패로 잡혀 들어와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감옥 밖으로 나온 직후, 이승만은 전덕기 목사가 이끌고 있던 남대문 안쪽의 상동교회(지금의 새로나백화점 자리)에서 청년학교 교장을 맡았다. 

그때는 이른바 제1차한일협약으로 나라가 사실상 일본의 지배로 넘어간 상태였다. 일본은 군사적 목적에서 한반도의 어떤 시설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고종은 마지막으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쯤해서 미국도 기대할 만한 나라가 못되었다. 왜냐하면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국무부 관리들은 서양화를 추진해 가던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그러했다.      그러므로 대한제국에 대해 호감을 가진 외국인들은 소수의 미국인 교사들뿐이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제중원을 설립한 의료선교사로서 주한 미국 공사가 된 호러스 알렌이었다. 그는 미국 정부의 훈령과는 달리 대한제국의 편을 들었다가 미 국무부로부터 공사 자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그런데도 개화파 정치인인 민영환과 한규설은 유학을 떠나는 이승만을 통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해볼 생각이었다. 그것은 1882년에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居中調整) 조항에 따라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를 위해 미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조치였다. 

대한제국의 밀사 임무를 띠고 미국으로

  이승만이 미국 유학으로 진로를 굳힌 것은 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권유 때문이었다. 또한 아버지의 희망도 있었다.  아들이 과격한 행동을 하다가 또다시 감옥에 가거나 죽는 불행을 당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에 이승만은 민영환의 주선으로 고종 황제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가 집에 돌아 왔을 때 고종이 보낸 궁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고종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자신을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시키고 나라를 망친 무능한 군주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1904년 11월 4일, 29세의 이승만은 신분을 숨긴 채 인천항을 떠났다. 정부의 밀사 자격이었기 때문에 워싱턴의 대한제국 주미공사관에 보내는 정부 훈령을 가방 밑에 숨겼다. 동행자로 이중혁이란 청년이 있었다. 그는 이승만이 감옥에 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한성감옥서 부소장 이중진의 동생이었다.    두 사람을 태운 배는 목포와 부산을 거처 일본으로 향했다. 배가 항구에 머물 때마다 이승만은 일본 관리들에게 잡힐까 마음  졸였다. 그의 짐에는 조선정부의 밀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돈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일본까지 가는 배표와 선교사들의 소개장뿐이었다. 

  두 사람은 일본 고베 항에 도착해서 한국 교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미국인 선교사 로건은 이승만에게 여비를 보태 주기 위해 그가 운영하는 교회에서 특별헌금을 했다. 그 돈으로 두 사람은 하와이로 가는 조선인 노무자들과 3등 선실에 탔다.

하와이, 캘리포니아를 거처 워싱턴으로

  1904년 11월 29일 아침 배는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부두에는 윤병구(尹炳求) 목사와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의 존 와드먼 박사가 환영을 나왔다. 그들은 그날 저녁 호놀룰루에서 20km 떨어진 에바의 한인 농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200명 이상의 한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승만은 밤 11시까지 길게 연설했다. 집회 마지막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애국가를 부르고 헤어졌다.


그리고 나서 이승만은 윤병구 목사집으로 갔다. 밤새도록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 보존을 위한 방법을 의논했다. 일단은  앞으로 열리게 될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 보존  의지를 전달하도록 결정했다.  그 회의는 막 끝난 러-일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뉴햄프셔 주에서 열리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준비를 위해 이승만이 먼저 워싱턴으로 떠나고, 윤병구는 경비를 마련하는 대로 뒤따르기로 했다.이승만과 이중혁은 한인들이 모아준 30달러로 3등 배표를 샀다. 그리고는 1904년 12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거기서 두 사람은 두 아들을 한국에 선교사로 보내고 있는 휘시 부부를 찾아 갔다. 휘시 부부는 두 사람을 돕기 위해 샌안셀모 신학대학 학장에게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3년간 전액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졸업 후 한국에 선교사로 돌아간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한제국 정부의 밀서를 미국 정부에 전달해야 할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남쪽의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거기에는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에 유학하고 있던 옥중 동지 신흥우가 있었다. 그러나 여비가 모자라 이승만만 동부로 떠나고, 이중혁은 그대로 남았다.

[연재]이승만 시대(8) 루즈벨트 만나고...민영환 자결에 사흘 울다
‘문호개방’ 정책의 존 헤이 국무장관을 면담
 
  이승만이 탄 대륙횡단 열차는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싼타페를 거쳐 시카고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동부로 가는 기차를 바꾸어 타고, 1904년 12월 31일 밤 워싱턴 역에 도착했다. 남은 돈은 몇 달러뿐이었다. 싸구려 호텔에서 자고 다음 날, 이승만은 워싱턴의 아이오와 서클에 있는 주미대한제국 공사관을 찾았다. 공사관에는 이미 서울의 민영환으로부터 이승만을 도우라는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이승만은 하원 의원인 휴 딘스모어를 찾았다. 그는 서울 주재 미국 공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과 아는 사이였다. 딘스모어 의원은 존 헤이 국무장관과의 면담 주선을 약속했다.
 
존 헤이 국무장관은 문호개방(門戶開放)정책을 내세워 열강의 중국 분할을 막아 낸 것으로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면담 날짜를 기다리면서 이승만은 1905년 1월 15일 <워싱턴 포스트>지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일본이 조선 왕국을 침략하고 있음을 폭로했다. 그의 영어는 미국 신문기자들을 상대할 정도로 능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존 헤이 국무장관이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면담은 1905년 2월 20일에 가서야 겨우 이루어졌다. 그날 이승만은 딘스모어 의원과 함께 국무장관실에서 존 헤이와 30분 이상 만났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존 헤이 국무장관은 한국 선교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승만은 그의 문호개방 원칙을 한국에도 적용해 독립을 보존해 주도록 요청했고, 존 헤이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기쁨에 찬 이승만은 본국의 민영환과 한규설 앞으로 자세한 면담 보고서를 보냈다. 딘스모어 하원의원도 이승만의 보고서 사본을 서울 주재 미국 공사에게 보냈다. 그러나 일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얼마 안 있어 존 헤이 장관이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시어도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짧은 면담

러-일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한 포츠머스 회담이 열리기 한 달 전인 1905년 6월, 미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가 하와이에 잠시 들렀다. 그는 친선 사절단을 이끌고 동양 순방을 떠나는 길이었다. 일행 가운데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과 사위도 있었다. 

  하와이 교민들은 한인들의 독립 보존 의지를 태프트에게 전달할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윤병구 목사의 주도로 대대적인 환영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는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미국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해 개입해줄 것을 요청하는 4천명 하와이 교민의 청원서를  전달했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회의 존 와드먼 목사는 한인 대표인 이승만과 윤병구가 미국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태프트 장관의 소개장을 얻어냈다.

윤병구 목사는 그 소개장과 한인들의 청원서를 가지고 이승만이 기다리고 있는 워싱턴으로 갔다. 두 사람은 필라델피아로 가서 서재필과 함께 청원서를 다듬었다. 그때 시어도 루스벨트 대통령은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뉴욕 시 동쪽 롱아일런드 오이스터 베이에 있는 별장 사가모 힐에 가 있었다. 그래서 1905년 8월 4일 두 사람은 기차를 타고 뉴욕을 거쳐 그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대통령 비서에게 청원서와 소개장을 전달했다. 회답이 오래 걸릴지 모른다는 비서의 말에 풀이 죽어 호텔로 돌아왔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날 저녁 대통령 측으로부터 다음날 아침 9시 정각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기뻐하는 두 사람을 미국인 기자들이 호텔로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외교관 정장을 빌려 입고 사가모 힐에 도착했다. 그들이 막 접견실로 안내되었을 때, 밖에는 포츠머스 회담에 참석할 러시아 대표단의 위테 백작 일행이 마차를 타고 도착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우선 러시아 대표단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승만과 윤병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한인들의 청원서를 훑어보고 나서는, 그것을 워싱턴의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 정식으로 미 국무부에 제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대통령의 친절에 감동한 두 사람은 흥분과 희망에 들떠 호텔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기자들에게 에워싸여 축하를 받았다.

  워싱턴의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가기 위해 두 사람은 서둘러 기차역으로 갔다. 흥분한 나머지 숙박료로 20달러의 큰돈을 내고 거스름 돈도 잊었기 때문에 호텔 직원이 돌려주기 위해 기차역까지 쫓아오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역만리서 충정공 민영환의 죽음을 슬퍼하다

  두 사람은 뉴욕을 거쳐 다음 날 이른 아침 워싱턴에 도착했다. <워싱턴 포스트>지에 자신들에 관한 기사가 난 것을 보면서 힘이 솟았다.  두 사람은 아침 식사를 하자 마자 서둘러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갔다.

  그러나 공사 김윤정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차가왔다. 그는 서울로부터 훈령을 받지 않는 이상 그 청원서를 미 국무부에 보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어느 사이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을 예상하고 이미 일본 공사관과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두 사람은 정오까지 그를 붙들고 설득했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김윤정은 문도 열지 않은 채, 당장 떠나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면 쫓아버리라고 흑인 경비원에게 명령했다. 낙담한 두 사람은 문 밖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대한제국은 일본이 강요한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잃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지 얼마 지난 1905년 9월 10일 이승만은 서울의 민영환으로부터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편지와 함께 활동비 300 달러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두 달 후인 11월에 민영환이 일본의 만행에 분개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승만은 사흘 동안을 울었다.

  주미공사 김윤정은 일본에 대한 협조 대가로 나중에 전라북도 지사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분노한 교민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몰래 귀국해야 했다. 그러다가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에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었다.
[연재]이승만 시대(9) 조지 워싱턴大서 고학, 하버드에서 받은 설움
조지 워싱턴 대학을 힘들게 졸업하다
 
한일병탄때 이승만은 학생 신분이었다. 그는 1905년 2월에 30세의 나이로 조지 워싱턴 대학 콜럼비안 학부에 입학했던 것이다. 배재학당의 학력을 초급대학 과정으로 인정받아 2학년 2학기에 편입되었다.

  입학은 워싱턴의 카베넌트 장로교회 루이스 햄린 목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서울의 장로교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 목사의 소개장을 통해 햄린 목사를 알게 되었는데, 그가 시무하는 교회에 조지 워싱턴 대학 총장이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1905년 4월 23일 부활절에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대학에서 등록금은 면제받았지만, 생활비가 문제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여러 도시의 YMCA와 교회를 돌면서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 내용은 한국인의 풍습과 그것에 적응하려는 미국인 선교사들에 관한 것이었는데, 인기가 있어서 <워싱턴 포스트> 등 여러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1905년에서 1907년에 이르는 3년 동안에 그는 110회의 강연을 했다. 그만큼 그의 영어는 유창해졌다.  그러나 미국인 청중은 대부분 일본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야욕을 이해시키기가 힘들었다. 그 때문에 그는 미국인들과 다투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감리교계 실력자로 <크리스천 애드보켓>지의 편집인인 레오나드 박사를 공격한 사건이었다. 동양 순방을 마치고 온 레오나드 박사는 뉴저지 주의 오션그로브 강당에서 행한 연설에서 일본이 조선의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그 연설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잡지에 실린 내용을 읽고 분개했다. 그리고는 길게 항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애즈버리파크의 <프레스>, 뉴어크의 <모닝 스타>같은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그를 격렬히 비판했다.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2년 반 공부하는 동안에 이승만은 주로 교양과목을 들었는 데, 특히 유럽사와 미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은 서양인들이 어떻게 해서 문명개화(文明開化)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목적을 달성했는가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이승만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강연으로 시간과 정력을 많이 빼앗긴 데다가,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용만을 통해 한국에서 데려온 그의 어린 아들 봉수(태산)를 돌보는 것도 큰 문제였다.  아들을 돌 볼 수가 없어서 필라델피아의 미국인 가정에 맡겼다. 하지만 아들은 1905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디프테리아로 죽었다. 이승만은 아들의 죽음도 지켜 보지 못하는 불행을 겪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1907년 6월 5일에 대학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에게 계속 관심을 보여온 <워싱턴 포스트> 신문에는 졸업식에서 이승만이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스티븐스 암살사건으로 하버드 대학을 떠나게 되다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하자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이승만이 한국으로 돌아가 선교 활동에 헌신하기를 바랬다. 이승만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누구 보다도 서울의 아버지가 맹렬히 반대했다. 한국에 돌아오면 감옥에 갈 위험이 크다는 것이었다. 5년 7개월을 감옥에 있어야 했던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공부를 더 하기로 하고, 1907년 9월에 하버드 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주변의 미국인들 가운데는 그 대학이 너무 진보적이고 세속적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버드에서 그는 미국사와 유럽사를 전공했다. 강연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공부에 전념했다. 그 때문에 그는 1년 안에 석사 학위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끝내고 논문 제출만 남겨두게 되었다.

  그때 학업을 중단시키게 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 교포 장인환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찬양하고 다니던 미국인 D. W.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살해했던 것이다. 스티븐스는 일본 정부가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임명한 친일적 인물로서 시오더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였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잘 모르는 미국인 대중은 그 사건을 단순하게 살인 사건으로만 보았다. 그 때문에 한국인은 폭력을 좋아하는 테러리스트 민족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그러한 미국인들의 편견은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면서 더욱더 굳어졌다.

  그러한 편견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이승만이었다. 스티븐스 암살 사건 이후 한국인들에 대한 인상이 나빠짐에 따라, 지도교수는 그의 면담 요청마저 거절했다. 석사 학위를 받기 위해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관한 논문을 써서 조교에게 제출했지만, 지도교수로부터는 심사에 관해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하버드 사회에서 이승만은 아무도 만나주지 않는 외톨이 신세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강연을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체 대외 활동을 중지했다. 강연장에서도 미국인 청중들이 일본에 대해 호의적인 것을 보고 좌절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하버드를 떠났다. 나중에 그는 결국 하버드에서 석사학위를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1910년 2월에 가서였다. 

덴버에서 한인 애국동지 대표자대회를 열다

  절망 상태에서 방황하던 이승만은 우선 미국을 비롯한 해외의 한국인들을 단합시키는 일을 해보고자 했다.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그는 하와이의 윤병구 목사와 함께 1908년 7월 콜로라도 주 덴버의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한인애국동지대표자대회(Korean Patriots' Delegation Convention)’를 열었다. 모두 36명이 참석했는데, 그 가운데는 멀리 상해, 런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대회는 이승만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소수의 동포들이 모여 보았자 망국의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쓰러져 가는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보자는 애국심으로만 이루어진 모임일 뿐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그 지방의 신문인 <덴버 리퍼블리칸>이 그 모임에 대해 보도를 해주고, 스탠포드 대학 총장 데이비드 스타 조던 박사등 한국인들에 동정적인 소수의 미국인들이 격려차 참석해 준 사실이었다.

  대회는 조국의 독립 유지를 위해 해외 한인들의 힘을 모으자는 원론적인 결의로 끝났다. 그리고는 첫 사업으로 고국의 동포들에게 세계 정세를 알려 줄 책자를 발간할 출판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폐회사에서 의장인 이승만은 한민족이 일본에 의해 결코 말살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을 피력했다. 한국인들은 4천 년 이상 독립을 유지해온 강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대회가 끝난지 며칠 뒤에 이승만은 영국으로부터 한 통의 격려 편지를 받았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영국의 신문기자로서 대한제국 말기에 조선에 체류하면서 <한국의 비극>을  쓴 프레데릭 맥켄지였다. 그는 강대국들 틈에서 주권을 빼앗겨 가는 “불쌍한” 한국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려고 애를 썼던 친한파 인사였다. 

  편지는 덴버 대회 초청장을 받았지만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인들은 망국의 불행을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서 부강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말이었다. 한국사회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기독교(개신교)로 개종하고 있으므로 기독교를 통해 서양의 선진문명을 제일 먼저 받아들여 근대화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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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9-2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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