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의령군 궁류면 운계리에 있는 궁류시장의 모습. 1982년 4월26일 밤 궁류지서 소속 우범곤 순경은 이곳 운계리 시장통을 따라 마을을 헤집으며 18명의 민간인을 사살했다.

경남 의령군 궁류면 운계리에 있는 궁류시장의 모습. 1982년 4월26일 밤 궁류지서 소속 우범곤 순경은 이곳 운계리 시장통을 따라 마을을 헤집으며 18명의 민간인을 사살했다.



[토요판] 르포

‘우순경 사건’ 30년, 의령 현장을 가다








청와대서 궁류지서로 좌천
인사불만에 주벽, 난폭한 성격…
4개 마을 돌며 카빈총 난사
반나절새 56명 죽고 35명 총상


전두환정권, 민심 달랜다며
아스팔트 깔고 저수지 만들어
마을은 발전했다지만
평촌리만 가구 절반이 떠났다


딱 30년 전, 그러니까 1982년은 기억할 만한 해였다. 그해 3월27일 프로야구가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엠비시(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를 시작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약 보름 뒤인 4월10일 군사정권은 ‘의식개혁 국민운동’이란 것을 시작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부정의식의 잔재를 과감히 추방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국민의식 속에 뿌리내리게 하겠다”며 정직과 질서, 창조, 책임 등 ‘의식개혁 9대 실천요강’을 발표했다. 그러고 보면 각종 뇌물수수와 압수품 절도, 밀수 등 세관 공무원의 부패 양상을 보여준 한국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도입부의 시대적 배경도 1982년 3월이었다.


의식개혁 국민운동이라는 이름의 관제 캠페인이 시작된 지 보름 남짓 지난 4월26일 경남 의령군 궁류면의 오지마을에서는 역사상 최악의 대량살인(mass murder) 사건이 벌어졌다. 우범곤 순경 총기난사 사건, 줄여서 ‘우 순경 사건’이었다. 이상현 동국대 명예교수(경찰행정학과)는 이 사건을 가리켜 “한국에서 벌어진 대표적 대량살인 사건으로 경찰 스스로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사건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범죄와의 전쟁’ 선포 뒤 경찰이 대량살인극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궁류 주민은 우범곤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지난달 1일 경남 마산역을 거쳐 의령군 궁류면으로 향했다. 궁류는 여전히 외진 시골마을이었다. 마산에서 궁류를 오가는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요금 5만원이 넘는다는 말에도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궁류면으로 가자는 말에 마산에 사는 택시기사 김아무개(60)씨는 묻지도 않은 지역소개를 시작했다.


“우 순경 사건 알지예. 궁류라카면 이쪽 사람들은 다들 그 사건 떠올립니다. 전국적으로도 그때 의령군 궁류 이름이 많이 났다 아닙니까. 그 사건으로 정말 많이 시끄러웠거든예.”


우 순경 사건이란 당시 의령경찰서 궁류지서에 근무하던 우범곤(당시 27살) 순경이 지서 및 예비군 무기고에서 훔친 카빈 소총과 수류탄으로 반나절 만에 민간인 56명을 사살하고 35명에게 총상을 입힌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경향신문>과 <한국일보> <동아일보> 등 당시 사건을 기록한 몇몇 신문을 보면 우 순경은 1981년 4월부터 서울의 한 ‘특수근무처’(청와대)에서 근무하다 ‘주벽이 심하고 성격이 난폭하여’ 8개월 만인 같은해 12월 궁류지서로 사실상 ‘유배’됐다. 의령경찰서 궁류지서는 일선 경찰서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작은 ‘4급지’에 속했다. 사건의 주요 원인은 좌천에 따른 인사불만이라는 것이 당시 정부가 꾸린 ‘사고원인조사반’의 결론이었다.




우 순경 사건의 원인은 또 있었다. 그의 난폭한 성격과 주벽 탓이었다. 당시 언론 보도와 궁류면 주민의 말을 종합하면 우 순경은 궁류지서에 내려온 직후 궁류면 압곡리에 살던 애인 전말순(당시 25살)씨와 교제를 시작했다. 우 순경은 1982년 초 전씨와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시작했으나, 그녀 집안에서는 평소 주사가 심한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겨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건 직후 일부 언론을 통해 공개된 그녀의 일기장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라며 집안의 결혼 반대를 암시한 대목이 나온다. 사건 당일 술에 취한 우 순경이 궁류면 주민에게 방아쇠를 당기며 내뱉은 말은 ‘이 더러운 세상’ ‘순경 못해먹겠다’ 등이었다.


마산을 떠난 택시는 이내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왕복 2차로 지방도로로 접어들었다. 택시기사 김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들어오면서 보셨겠지만 이 길이 그때만 해도 모두 비포장도로였거든예. 그런데 우 순경 사건 터지고 군민들 마음 달랜다고 전두환 정권이 있는 거 없는 거 다 안 해줬습니까. 지금도 이 길이 이렇게 꾸불꾸불하지예. 급하게 하다 보이 확장도 안 하고 그냥 아스팔트 부어가 싸악 포장했다 아닙니까.”


우 순경 사건 직후 전두환 정권이 가장 먼저 챙긴 것은 피해자 보상이었다. 군사정권 초기 민심이반을 막으려는 조처였다. 사건 발생 닷새 만인 같은해 5월1일 부산지방검찰청 차장검사를 위원장으로 한 국가배상심의위원회는 사망자 1인당 최고 1900만원이 입금된 통장을 전달했다. 배상법에 따르면 사망자 가운데 60살 이상 노약자의 배상금은 83만5000원으로 결정됐으나, 배상위는 이 금액이 너무 적다며 최하 금액을 300만원으로 일괄조정해 지급했다.


또 배상금과 별도로 사망자 장례비 30만원과 조위금 600만원도 유족에게 건넸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유족에게 지급된 보상금은 사망자 1명당 최고 3200만원에 육박했다. 일가족 6명을 잃은 박아무개(당시 19살)씨는 가족 사망 보상금으로만 1억원이 넘는 돈을 받았다. 순경 초임자(군필자)의 한달치 급여가 13만3000원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열흘간 사건 현장을 취재했던 김충식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은 지난 10일 “당시 서울 청운동의 10평대 시영아파트 값이 850만원이었으니까 상당히 많은 돈이 보상금으로 지급됐던 기억이 난다”고 밝혔다.



“지역발전하고 사람 목숨하고 바꾼 거지예”
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사망자 배상금 지급일에 맞춰 현장을 찾아가 103억여원 규모의 ‘궁류마을장기개발계획’에 서명했다. 이 계획에는 궁류면 벽계리의 저수지에 둑을 새로 쌓고, 궁류에서 인근 시·군으로 연결되는 산골길을 모두 포장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시 정권은 이외에도 사망자 및 부상자 가족의 학비·의료비 면제, 예비군 훈련 연기 등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주민 지원 방안을 내놓았다. 전 대통령도 개인 자격으로 2억3900만원을 유가족 성금으로 내놓았다.


“어떻게 보면 사람 목숨하고 (지역발전과) 다 바꿨다고 보면 되지예. 그런데 자식 먼저 보내고 마누라나 영감 보낸 사람의 마음이야 어디 그렇습니까. 저기 저수지 보이지예, 저게 그때 맨든 거 아닙니까.”


택시기사 김씨가 턱끝으로 궁류면 벽계리에 있는 벽계저수지를 가리켰다. 저수지 주변에는 벽계관광지가 조성돼 있었다. 길을 새로 닦고 둑을 높여 관광지를 만든 궁류는 분명 예전보다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하지만 사건 직후 한번 마을을 떠난 궁류 사람, 특히 피해자 가족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사건 당시 118가구에 619명의 주민이 살던 평촌리만 해도 2012년 1월말 기준으로 57가구에 114명의 주민만 남아 있다.


궁류면 평촌리 입구에 사는 서진규(75·농업)씨는 얼마 남지 않은 피해자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서씨는 30년 전 사건을 누구보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부인 박봉순(당시 43살)씨가 그때 우 순경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집사람만 죽었나. 조카도 죽고 제수도 죽고, 7촌 아지매에, 9촌 아재까지 그때 우리 집안 사람 여럿 죽은기라. 하이고, 그때 일은 말도 몬하지.”


사건 당일 우 순경은 탈취한 무기로 토곡리, 압곡리, 운계리에서 모두 28명을 사살한 뒤 이곳 평촌리까지 아무런 제지 없이 들어왔다. 마침 그날 서씨 등 평촌리 주민 상당수는 문두출씨 상가에 모여 있었다. 사건 초기 언론은 우 순경이 만취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전하고 있다. 반면 문씨 상가에서 우 순경을 직접 목격한 서씨 등은 그의 정신이 비교적 멀쩡했다고 주장했다. 우 순경이 나타난 까닭을 알 길이 없던 평촌리 주민은 그에게 술을 권하기도 했다.


“상갓집에서 3000원을 봉투에 넣어가 부의금까지 냈다고. 문상을 마친 우 순경에게 ‘우짠 일이고’라며 말을 건넨 뒤 보이까 카빈이 두 자루, 허리에 찬 수류탄이 두세개 뵈는데, 카빈에 탄창이 끼워가 있었거든. 내가 술 한잔 가온나 해서 묵이니까 총을 내려놓고 가만히 받아묵더라고. 그런데 나랑 같이 있던 한명규(당시 53살)가 총을 탁 치면서 ‘실탄도 없는 총 머할라고 갖고 다니노’ 하니까 그 자리에서 한명규하고 마을 이장 박종덕(당시 45살)이를 쏴죽인기라.”


놀란 서씨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우 순경이다!”를 외치며 상가 앞 자신의 밭으로 도망가 바짝 엎드렸다. ‘따닥’ 하는 총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저러다 우리 동네 사람 다 죽인다’ 하는 생각은 드는데 우짜겠나. 내가 뛰어가가 해결할 것 같으면 모르지만 그러면 나도 죽는긴데. 일단 내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드는 기지. 그때 우리 집안 동생들이 총소리 듣고 뛰어나갔다가 마이 죽었지.”


궁류면에는 사건 당일부터 이튿날까지 봄비가 내렸다. 밭에 엎드린 채 봄비를 맞던 서씨는 콩 볶듯 하는 총소리를 드문드문 세 시간 넘게 들었다. 우 순경은 뚜렷한 이유 없이 문두출씨 상가에서 초상을 치르던 부인 조을순(당시 56살)씨와 문씨의 손자·손녀 및 친인척 6명 등을 죽였다. 상주 문천군(당시 30살)씨는 아버지 장례를 치르다 어머니와 아들딸까지 잃은 것이다.


총소리는 이튿날인 4월27일 새벽 3시40분께 서진규씨의 9촌 아재 서인수(당시 61살)씨 집에서 그쳤다. 우 순경은 문씨 상가에서 24명을 사살한 뒤, 마지막으로 서씨 집을 찾아가 그의 일가족 4명을 한방에 몰아넣은 채 수류탄을 터뜨려 함께 목숨을 끊었다. 우 순경의 광란이 모두 끝난 뒤 문씨 상갓집으로 돌아온 서진규씨는 가슴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부인 박씨를 발견했다.





우범곤 순경은 마지막 범행 장소인 평촌리 문두출씨 상가에 침입해 문상객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 뒤 서인수(당시 61살)씨 집(오른쪽 사진 가운데)을 찾아가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서진규(75·왼쪽 사진)씨 뒤쪽 건물이 들어선 자리가 당시 문씨 상가 터다.

우범곤 순경은 마지막 범행 장소인 평촌리 문두출씨 상가에 침입해 문상객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 뒤 서인수(당시 61살)씨 집(오른쪽 사진 가운데)을 찾아가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서진규(75·왼쪽 사진)씨 뒤쪽 건물이 들어선 자리가 당시 문씨 상가 터다.



소총·수류탄 훔친 우순경
우체국 가서 전화교환원 쏘고
마을 통신부터 끊어놓았다


다른 경찰들 근무시간에 온천
범인이 자폭한 뒤에야 출동
그땐 반성 운운하더니
요즘도 치안센터 문 닫아놓더라


평촌리 범인 자폭현장은 30년째 방치
지난달 2일 서진규씨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마지막 범행 장소였던 서인수씨 집을 찾았다. 30년이 흘렀지만 사건 현장은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집이라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집터였다. 남은 것은 대문과 돌담이 전부였다. 대문도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30년 전 수류탄 폭발 이후 그대로 방치된 것이다. 서진규씨는 평촌리 주민 수가 줄어든 한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평촌리가 원래 달성 서가 집성촌이었던기라. 내 9대 선조가 되는 분이 먼저 들어왔으니까 1대에 30년씩 약 300년 전 이리 온긴데, 내 어릴 때만 해도 서씨 집안이 50~60가구는 됐지. 우 순경 사건 터져가 죽고 남은 사람은 또 객지로 마이 나가 지금은 한 20가구 정도 남았나.”


경찰이 현장에 나타난 것은 우 순경이 서인수씨 집에서 폭사로 범행을 마무리한 뒤였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우 순경의 범행 경로를 제때 파악하지 못해 허둥댔고, 이와 달리 범행을 저지른 우 순경은 용의주도했다. 당시 우 순경을 제외한 궁류지서 소속 3명의 경찰 가운데 2명은 근무지를 이탈한 채 온천에서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나머지 한명은 비번이었다.


범행 당일 무기를 탈취한 우 순경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궁류지서 바로 옆 궁류우체국이었다. 당시 우체국은 전화교환 업무를 기본적으로 하고 있었다. 전화통화를 하려면 수동식 전화를 들어 교환원을 먼저 호출하던 시절이었다. 4월26일 밤 10시께 궁류우체국을 찾은 우 순경은 전화교환 업무를 하고 있던 전은숙(당시 21살·여)씨 등 2명의 교환원을 모두 사살했다. 우체국에서 숙직을 하던 집배원 전종석(당시 36살)씨도 덩달아 총에 맞아 숨졌다. 궁류면의 모든 전화가 불통이 됐다.


궁류면 운계리에서 벽천횟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옥순(51·여)씨는 당시 궁류우체국 4명의 교환원 가운데 한명이었다. 전화교환 업무는 각 조 두명이 24시간씩 근무한 뒤 맞교대하는 방식이었다. 이씨는 사건 당일 오전 9시 24시간 근무를 마치고 전씨 등과 교대했다.


“옛날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많이 안 나오나. 손잡이를 돌리면 교환실이 바로 나오는기라. 그러면 우리들이 받아가 연결해주고 그러는데, 둘이 다 죽었으니 전화 받아줄 사람이 어딨겠나. 우리는 그 사건 터지고 한 일주일은 무서버가 교환실을 몬 드갔다.”


궁류면의 통신을 끊은 뒤 우 순경이 찾아간 곳은 압곡리에 있는 애인 전말순씨의 집이었다. 여기서 전씨에게 총상을 입히고 4명을 사살한 우 순경은 다시 운계리로 방향을 틀었다. 중상을 입은 전씨는 이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며칠 뒤 숨졌다. 우 순경은 운계리에서 자신이 우체국에서 살해한 교환원 박미숙(당시 21살·여)씨의 아버지 박인길(당시 41살)씨 집을 찾아가 일가족 5명을 추가로 사살했다. 이 마을에서는 모두 18명이 우 순경의 카빈총에 목숨을 잃었다. 박씨는 또다른 교환원 이옥순씨의 외삼촌이기도 했다. 우 순경 사건은 아직도 이씨에게 큰 상처로 남아 있다.


“참 사람으로 할 짓 아니다. 외삼촌 집은 운계리 시장통에서도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자기가 미숙이를 먼저 죽였으니까 그 가족들 마저 다 죽인다고 일부러 찾아간 거지 싶다. 그 사건 나고 그 집을 그대로 놔뒀다가 재작년인가 새로 지었는데, 지금도 그때 생각나가 그쪽으로 잘 안 간다 아이가.”


운계리에서 숨진 18명의 사망자 명단에는 전병태(77) 전 궁류면장의 둘째아들 달배(당시 19살)씨의 이름도 있다. 전 전 면장은 지난달 2일 우 순경 사건은 사실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했다.






사건 직후의 <동아일보> 1면 보도. 사망자는 나중에 56명으로 밝혀졌다.

사건 직후의 <동아일보> 1면 보도. 사망자는 나중에 56명으로 밝혀졌다.



사건 한달 전 부패신고 묵살만 안 했어도…
“사건의 일차적 원인은 잘못된 경찰 인사 때문입니다. 그런 얄궂은 사람을 순경으로 채용한 것도 문제이지만 서울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사람을 의령경찰서 가운데서도 가장 오지인 궁류지서로 보내지 않았어요. 잘못된 사람이면 경찰서에서 징계하거나 교육을 시켰어야지 오지로 보내버리면 되겠어요.”


실제로 우 순경은 1981년 12월 궁류지서로 오자마자 주민을 상대로 활동비 갈취 등 독직 행위를 일삼았다는 것이 주민의 증언이다. 우 순경 부임 직전까지 평촌리 이장을 지낸 서진규씨는 “이장을 지낸 사람은 궁류지서 소속 경찰 등 공무원에게 술 받아주는 역할을 많이 했다”며 “우 순경에게도 지금으로 치면 한번에 10만원 정도씩 이런저런 명목으로 챙겨주곤 했다”고 전했다.


전병태 전 면장은 우 순경 사건이 벌어지기 한달 전쯤 당시 사회정화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의령경찰서장을 만나 우 순경 등 궁류지서 소속 경찰의 부패 실태 및 지역내 부정적 평판을 전달했지만 묵살당했다고 주장했다. 사회정화위원회란 전두환 정권이 사회정화 및 반부패 환경 조성을 위해 꾸린 정부기구를 가리킨다. 그는 “그때는 공직사회 부패가 워낙 심해서 경찰 역시 업소를 다니며 공공연히 돈을 걷었다”며 “경찰에 대한 지역내 평판이 좋을 리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 순경 사건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도 경찰 조직이 안고 있는 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우 순경 사건 터지고 경찰이 반성한다 어쩐다 그랬지만 경찰에 대한 신뢰는 계속 떨어지잖아요. 요새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궁류지서가 지금은 궁류치안센터로 바뀌었는데 얼마 전 교통범칙금을 내러 갔더니 문이 잠겨 있어요. 경찰에게 기대하는 것은 범죄 예방인데, 치안센터 간판을 걸어놓고 문을 닫아놓으면 이게 되겠어요?”


이에 대해 박정주 궁류치안센터 소장은 “궁류치안센터는 중심 파출소인 유곡파출소에서 나온 한명이 상주하며 주간에만 근무하도록 돼 있다”며 “주간근무 시간에도 외근과 민원을 모두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출입문에 연락처를 남겨놓은 채 자리를 비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의령/글·사진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노태우엔 정치적 기회…경찰 수사권 독립엔 악재


우 순경 사건이 1980년대 한국 사회에 남긴 흔적은 컸다.


1980년 8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진 ‘체육관 선거’를 통해 당선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우 순경 사건에 따른 민심 이반을 우려했다. 무고한 민간인을 상대로 총기를 난사한 범인이 경찰 신분, 게다가 청와대 경비대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전두환 정권이 느낀 위기감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전두환 정권의 서슬에 눌린 언론은 그의 청와대 경비대 근무 경력을 그대로 쓰지 못하고 ‘서울의 한 특수근무처’라는 식으로 표기했다.)


전 대통령의 선택은 발빠른 문책인사였다. 그는 사건 발생 이틀 만인 4월28일 우 순경 사건의 책임을 물어 서정화 내무부 장관의 사표를 수리하고 그 자리에 노태우 당시 체육부 장관을 앉혔다. 체육부 장관 임명 한달여 만에 다시 정부 주요 부처를 이끌게 된 노 장관에게는 우 순경 사건이 일종의 정치적 기회로 작용했다.


다음날인 29일에는 사건의 직접적 책임자에 대한 형사처벌이 이어졌다. 우선 사건 발생 직후 꾸려진 정부합동조사반은 초동진압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책임을 물어 최재윤 의령경찰서장과 허창순 궁류지서장, 김진우 경장 등을 직무유기 등 혐의로 구속했다. 또한 의령경찰서의 상급기관인 경남도경의 주요 간부들도 인사관리 등의 이유로 크고 작은 문책을 당했다.


경찰이 뼈아파할 만한 대목은 따로 있었다. 우 순경 사건이 당시 경찰 안팎에서 막 시작된 경찰 수사권 독립 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는 사실이다. 경찰 수사권 독립이 처음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였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가 이듬해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내리기 직전까지 사회 각 분야에서는 민주화 요구가 쏟아졌다. 경찰 조직에서도 퇴직 경찰모임인 경우회의 주도로 경찰 수사권 독립을 처음으로 공식 제기했다.


경찰로서는 무엇보다 중요했던 시기였지만 수사권 독립을 요구하자마자 경찰 관련 범죄가 연이어 터졌다. 1980년 4월에는 경남 진해경찰서 정보과 소속 천재율 순경이 도박판에 침입해 권총을 들이대며 현금 38만원을 빼앗아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81년 8월에는 서울 용산경찰서 수사과 하영웅 순경이 피살된 윤경화씨(용의자로 지목된 조카며느리의 이름을 딴 ‘고숙종 사건’으로도 불림) 집에서 현장조사를 벌이다 예금증서 3장을 빼돌린 사실이 뒤늦게 적발됐다. 경찰은 ‘하 형사 사건’을 스스로 ‘경찰 최악의 난’이라며 국민을 상대로 엎드려 절을 하는 퍼포먼스도 열었다.


우 순경 사건이 벌어진 것은 경찰이 하 형사 사건으로 국민 앞에 사죄한 지 불과 7개월 만이었다. 게다가 경찰은 우 순경 사건 직후 대응 실패의 책임을 면하려 경찰 상황실 근무기록부를 찢어 없애는 등 사건 은폐를 시도했다는 사실까지 정부합동조사반의 조사 결과 드러났다. 당시 사건을 취재한 김충식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전 <동아일보> 기자)은 “우 순경 사건 취재에서는 조사반 소속 이종찬 검사(전 청와대 민정수석)가 경찰의 사건 은폐 사실을 밝혀내며 경찰 관계자에게 호통을 치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수사권 독립을 요구하던 경찰이 여전히 검찰의 수사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임준태 동국대 교수(경찰행정학과)는 지난 10일 “1980년 당시 경찰은 개헌 논의와 맞물려 수사권 독립 등을 포함하는 형사사법체계의 변화를 꾀했다”며 “경찰로서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는데 경찰관이 연루된 불미스러운 사건이 빚어지면서 경찰이 주장하는 제도변화가 쉽지 않게 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우 순경 사건은 언론계에도 일정한 영향을 줬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라 중앙 일간지의 지방 주재기자 철수를 강제했다. 겉으로는 한국신문협회의 자율결의에 따른 결과로 포장했지만 신문협회 뒤에는 신군부의 압력이 있었다. 언론을 정권의 통제 아래 두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대신 신군부는 지방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 보도의 경우 <연합통신> 보도에 의존하도록 했다.


연합통신의 지방 취재 독점의 폐해가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우 순경 사건이었다. 사건은 4월26일 밤 9시께부터 시작됐지만 27일치 조간신문은 우 순경 사건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못했다. 연합통신이 텔렉스로 1보를 타전한 시각은 27일 오전 6시30분이었다. 연합통신의 엉성한 기사를 중심으로 사건을 보도해야 했던 27일치 석간신문의 관련 기사 역시 엉성했다. 사건이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중앙 일간지가 현장에 급파한 기자들이 기사를 송고하기 시작한 27일 오후부터였다.


우 순경 사건이 일단락되자 중앙 일간지와 민한당 등 야당은 언론사 지방주재 제도의 부활을 앞다퉈 요구했다. 유창순 국무총리도 1982년 5월8일 국회에 나와 “지방주재기자 부활 문제는 언론계 전체의 의견을 들어 신중히 검토하고 합리적으로 결정하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중앙 일간지 기자의 지방주재가 다시 허용된 것은 이른바 6·29 선언 직후인 1987년 8월이었다.


최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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