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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승만 대통령 시대에 대한 비교적 중립적 기록 제 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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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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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혁명가가 되었던 개화파 청년

'급진적 언론인' 독립협회 행동대원으로 활동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에 이승만은 한글신문인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을 발간하면서 언론인으로 국민계몽에 나섰다.    독립협회에서도 열심히 활동했다. 당시 독립협회는 서재필,이상재,남궁억,정교와 같은 개화파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들 밑에서는 이승만과 같은 배재학당 학생들이 행동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윤치호(尹致昊)가 회장을 맡으면서 더욱 더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주의적인 단체가 되어갔다. 윤치호는 이승만 보다 10세 정도 위인 개화파 지식인으로서, 1884년의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였던 아버지 윤웅렬을 따라 상해로 망명했다. 그리고는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부가 세운 중서학원을 다녔다. 그리고 나서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테네시의 밴더빌트, 조지아의 에모리 대학을 다녔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윤치호는 중서학원 교수가 되었다. 그의 부인은 1882년의 임오군란 당시 청 나라 군함을 이끌고 한국에 왔던 마건충의 조카딸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개화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부인과 함께 귀국했던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 때문에 부산 앞 바다의 절영도와 진해만을 해군기지로 조차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해 러시아의 야욕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리고는 만민공동회와 같은 군중집회를 열어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고 개혁 압력을 넣었다.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의가 열렸을 때 이승만은 가두연설로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는 총대의원으로 뽑혀 정부에 대한 투쟁에 앞장섬으로써 급진파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1898년 11월 5일 마침내 고종은 독립협회 탄압에 나섰다. 우선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했다. 그리고는 이른바 ‘익명서 사건’을 조작해 이상재, 남궁억, 양홍묵을 비롯해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했다.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共和制)를 도입하려 역적모의를 했다는 혐의였다.    회장인 윤치호는 몸을 피해 배재학당 구내의 아펜셀러 집에 숨었다. 이승만도 일단 그곳으로 몸을 피했다.

만민공동회에서 반정부 시위를 주도
 
  하지만, 이승만은 곧 밖으로 나와 수천 명의 군중을 이끌고 경무청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체포된 독립협회 회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연좌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을 새웠고, 이승만은 쉴 새 없이 연설했다.    이승만의 과격 행동으로 집안이 망하게 될 것을 걱정한 그의 아버지는 시위 현장까지 찾아와 그만둘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아펜셀러 박사도 찾아와 이승만을 말렸다.

  그때 고종이 태도를 바꾸어 개화파에 대한 유화책을 썼다. 체포된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하는 동시에, 개화파 성향의 민영환(閔泳煥)을 의정부 참정으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같은 독립협회 과격파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며 종각과 대한문 앞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자 고종은 다시 강경책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하여 1898년 11월 21일 정부는 ‘황국협회’의 보부상 패거리를 시켜 덕수궁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던 독립협회 회원들을 공격하게 했다.

  보부상들의 공격으로 시위군중은 산산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그들을 향해 자리를 지키라고 외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자신도 몸을 피해야 할 형편이었다. 이승만은 적들의 허점을 찌르기 위해 뒤로 도망가는 대신, 대담하게 보부상 무리 가운데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배재학당 쪽으로 태연하게 걸었다. 모두가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나타나자, 그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던 학우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학생들은 다시 이승만을 앞세우고 종로로 나갔다. 이승만은 단상에 올라 밤새도록 연설했다. 독립협회 회원 김덕구가 용산에서 피살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시위대는 더욱 더 흥분했다.  다음날 거행된 그의 장례행렬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가 체포되다

  1898년 11월 26일 고종은 개화파를 달래기 위해 왕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을 의회(議會) 비슷하게 운영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는 독립협회 회원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중추원 의관 50명 가운데 25명에 대한 추천권을 독립협회에 맡겼다.

  그에 따라 독립협회 회장인 윤치호가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23세의 젊은 이승만도 종9품을 받은 의관이 되었다. 개화파들은 그 기구를 통해 정부를 어느 정도 개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자 일본 공사관은 이들 개화파 민선 의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공작했다. 그래서 일본에 망명했던 친일파 청년들을 이승만에게 접근시켰다.

  이승만도 일본의 문명개화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친일적인 유신당의 청년들을 몇 차례 만났다.  그들 친일파 청년들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왕국이 러시아와 중국의 위협을 물리치고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일본은 러시아는 물론 미국과도 전쟁을 해서 거대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원대한 침략 야욕을 알게 된 이승만은 더 이상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마침내 기다리던 중추원이 열렸다. 회의가 시작되자 마자, 이승만은 국정 개혁의 방법으로 일본에 망명한 개화파들을 사면하고 그들의 지도자인 박영효(朴泳孝)를 중추원 의장에 임명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했다. 고종은 격분했다. 그에게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는 역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종은 이승만이 박영효 일파의 사면과 등용을 주장하는 배경에는 박영효를 중심으로하는 역적모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즉, 자신을 쫓아내고  황태자를 황제로 앉히든가, 아니면 군주제를 공화제로 바꾸려는 음모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므로 고종은 898년 12월 23일에 중추원을 해산하는 동시에, 독립협회 측 의관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독립협회 측 의관들은 모두 흩어져 몸을 숨겼다. 이승만도 남대문 근처의 미국 감리교 병원으로 숨었다.
[연재] 이승만시대(5) 종신형 죄수, 기독교에 입문..옥중학교 개설

탈옥했다가 다시 체포되다

  병원에 숨어 갑갑하게 지내고 있던 1899년 1월 9일, 의료 선교사인 해리 셔먼으로부터 환자를 왕진하는 데 같이 가자는 제의를 받았다. 통역으로서 이승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괜찮을 것 같아 바람도 쏘일 겸해서 따라나섰다. 그러나 병원을 나서자마자 사복 경찰들에게 체포당하고 말았다. 

  셔먼 박사는 즉시 미국 공사 알렌과 함께 외부(외무부)를 찾아가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승만은 자기의 통역이었을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셔먼을 비롯한 미국인 선교사들은 이승만이 고문을 당하지 않도록 면회를 자주 가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899년 1월 30일 경무청 고문인 미국인 스트리플링(설필림)이 이승만을 면회하러 왔다. 그 때 독립협회 동지 주시경이 따라왔다가, 두 자루의 권총을 몰래 전달하고 갔다. 면회자들이 돌아가자마자, 이승만은 <매일신문>에서 같이 일했던 최정식, 그리고 군수 출신의 서상대와 함께 권총으로 간수들을 위협하면서 감옥을 빠져나왔다.

  최정식과 서상대는 배재학당 구내의 영국인 엠벌리 집에 숨어들었다. 그리고는 한 달 가량 머물었다. 그런 다음, 어느 날 밤 서양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 몰래 서대문을 빠져 나갔다. 두 사람은 북쪽으로 향했다. 서상대는 무사히 만주로 탈출했다. 그러나 최정식은 진남포의 일본인 여관에 묵었다가 주인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오고 말았다.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직전까지 가다

  감옥을 탈출할 당시 이승만은 두 사람과 같이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시위대가 모여 있다는 종로로 달려갔다. 그러나 시위대는 없었고, 이승만은 다시 체포되었다.    한성감옥서로  끌려온 그는 황국협회 회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두 팔이 묶이고 양다리에 주리를 튼 상태에서 손가락 사이에 대나무를 넣어 비트는 잔혹한 고문이었다. 매일 곤장을 맞아 몸은 상처투성이었다. 

  저녁이 되면 발을 족쇄로 묶고 손에 수갑을 채우고 목에 나무칼을 씌워 독방에 내던져졌다. 나무칼을 쓰고서는 누울 수도 없었기 때문에 반쯤 앉은 자세로 밤을 새워야 했다. 그러다가 날이 밝으면 다시 끌려나와 고문을 당했다.  이때부터 평생 그에게는 감정이 격해지면 무의식적으로 망가진 손가락 끝을 입으로 부는 버릇이 생겼다. 

  이승만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신문기사가 나서, 놀란 아버지가 시신을 걷우러 감옥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이제 24세의 청년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인 것 같았다.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그의 머릿 속에는 배재학당 예배 시간에서 들은 설교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내용들을 곰곰이 음미해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강렬한 삶의 기쁨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 내 나라와 내 영혼을 구하옵소서"라고 크게 외치면서 간절히 기도 했다. 오랫동안 기도했다. 그러자 까닭 모를 평온함이 그를 감쌌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이다.

  마침내 탈옥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는 공교롭게도 그의 정적인 홍종우였다. 홍종우는 고종의 환심을 얻기 위해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을 상해에서 암살할 정도로 잔인한 인물이었다.
  재판정에서 서상대는 살기 위해 모든 책임을 이승만에게 떠넘겼다. 이승만은 너무 지처 있었고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제대로 진술조차 하지 못했다. 다행히 증거물로 제시된 권총이 한 발도 발사되지 않은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이승만은 사형만은 면했다.  1899년 7월 11일 그는 종신형과 함께 곤장 100대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진남포에서 체포되어 온 독립협회 동지 최정식은 사형을 당했다. 이승만은 7개월만에 일반 감방으로 옮겨졌다. 그리고는 5년 7개월의 옥살이가 시작되었다.

5년 7개월의 감옥생활에서 만난 은인들
 
  감옥에 있는 동안 이승만은 많은 은인들을 만났다. 감옥서장 김영선과 감옥 부서장 이중진은 수시로 찾아와 이승만을 위로하고 편의를 봐 주려고 했다. 배재학당 교사 D.A.벙커 박사, 그리고 장로교 선교사로서  경신학교 설립자인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 그리고 연동교회 목사인 제임스 게일도 면회를 자주 왔다.

  제중원의 애비슨 박사는 감옥으로 의약품을 보내기도 했다. 아펜셀러는 굶주리고 있는 이승만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기도 했다. 감옥 안의 정치범들 가운데는 배재 동문인 신흥우를 비롯해 이상재(李商在),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이준, 양기탁, 안국선과 같은 독립협회 동지들이 있었다.

  한성감옥 안의 정치범들 가운데는 교육 수준이 높은 양반 출신 개화파가 많았다. 특히 나중에 미국에서 깊은 인연을 맺게 될 박용만(朴容萬), 그리고 거물급 개화파 정치인인 유길준의 동생인 유성준(兪星濬)과 가까이 지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배운 영어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캐나다 선교사 해로이드 양이 넣어준 영어 신약성서를 큰 소리로 읽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손가락을 제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감방 동료가 책장을 넘겨주어야 했다.

  감옥서장의 협조로 많은 책과 잡지들이 이승만에게 전달되었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아우트루크>와 같은 미국의 인기 잡지, 그리고 피터 발리의 《세계사》, 윌리엄 스윈튼의 《세계사 개요》, 로버트 매켄지의 《19세기 역사》와 같은 영문 역사책을 넣어주었다.    이승만은 영문 잡지 내용 가운데 필요한 구절은 무조건 외웠다. 그 때문에 그의 영어 실력과 서양에 대한 지식은 놀랄 만큼 늘어 갔다.

  밤에는 몰래 들여온 양초에 불을 밝히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몰래 들여온 염료로 잉크를 만들어 불편한 손으로 잡지 책에다 쓰기 연습을 했다. 간수들은 보고도 모른 척해주었다. 그렇게 쓴 글은 감옥 밖으로 몰래 내보내져, 자신이 전에 발행을 시작했던 <제국신문>, 그리고 감리교계 잡지인 <신학월보>에 실렸다.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글의 필자가 이승만이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알고 있었다. 이승만의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는 고종의 후궁인 엄비(嚴妃)도 있었다. 엄비는 감옥 서장 김영선과 잘 아는 사이였으므로 이승만을 잘 보살피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이승만은 감옥안의 정치범들의 도움을 받아 옥중학교를 열었다. 학교는 15명의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로 시작했다. 어린이들은 죄수인 부모를 따라 감옥생활을 하게 된 죄수 아닌 죄수였다. 교육 내용은 서예, 산수, 지리, 일본어, 역사였다. 그리고 그것은 성인교육으로 발전했다.    선교사들로부터 기증받은 책으로 감방 도서실도 열었다. 이승만은 중국에서 발간된 청일전쟁의 교훈서인 《청일전기》도 번역했다. 그 원고는 1917년 하와에서 출간되었다. 

감옥에서 갖게 된 기독교 신앙

  감옥 생활 중에 이승만에게 일어났던 가장 큰 변화는 기독교 신앙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배재학당을 다닐 때 이미 이승만은 미국의 자유와 평등과 같은 자유민주적 가치들이 개신교(Protestantism)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선교사들이 넣어 준 미국 책들을 꼼꼼히 읽으면서, 개신교와 민주주의의 관련성을 더욱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 들이는 과정에서 깨달은 사실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그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예비된 것일 뿐만 아니라, 항상 돌보심을 받고 있는 고귀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칼빈의 예정설을 믿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자 그는 삶의 기쁨을 느끼고 삶의 목표를 갖게 되었다. 그에 따라 그의 감옥생활은 아침 기도로 시작해서 밤 기도로 끝나는 희망으로 가득찬 신앙인의 생활이 되었다. 감옥 안에는 군주제와 봉건제의 악폐에 대항해 싸웠던 개화파 정치범들이 많았다. 그들은 감옥생활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이승만이 읽어주는 성경을 아무 생각 없이 들었다. 간수들도 이승만의 감방 앞에 와서 들었다.

  그러다가 40여 명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기적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그 때문에 서양 선교사들도 이승만의 전도 방식에 큰 관심을 가졌다. 중국과 일본에서 몇 년을 선교해도 신도 1명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서양 선교사들에게 이승만의 선교 업적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이 감옥에 있는 동안(1899.1∼1904.8) 밖에서는 대한제국이 망해 가고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북위 39도를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1903년 3월에는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에 따라 감방에서도 수십 명이 콜레라로 쓰러졌다. 이승만은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    제중원의 애비슨 박사에게 급히 구호를 요청했지만, 미국인 의사의 진료가 허락되지 않아 약품만 보내왔다. 이승만은 애비슨의 지시대로 환자들에게 약을 먹였다.


[연재] 이승만시대(6) 옥중에서 '독립정신'을 쓰다..자유 대한민국의 설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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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독립정신> 원고를 완성

1904년 2월에 러-일 전쟁이 터졌고, 그 소식은 감옥 안에도 들려왔다. 전쟁 소식에 이승만을 비롯한 감옥 안의 정치범들은 통곡을 했다. 이제 대한제국(大韓帝國)은 두 강대국 가운데서 이기는 쪽에 먹힐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이승만은 영한(英韓) 사전 원고를 쓰고 있었다.  F 항목까지 진행된 상태였다. 그러나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몰려 있던 때라 이승만은 영한사전 원고를 쓸 기분이 아니었다. 유성준도 이승만에게 국민 대중을 위한 계몽서를 쓰도록 강력히 권유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영한사전 집필을 중단하고 <독립정신>을 쓰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원고는 감옥 생활 마지막 해인 1904년의 2월 19일부터 6월 29일 사이에 급히 쓰여졌다. 러-일 전쟁중이었다. 감옥 안이라 자료를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체계를 갖춘 단행본을 쓰기 보다는 문제가 되고 있는 52개의 주제들을 골라 논설 형식으로 썼다.

<독립정신>의 기본 주제는 조선왕국의 ‘독립 보존’이었다. 아직은 나라가 망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그가 그 문제에 대한 회답으로서 내린 처방은 조선왕국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가저다 줄 문명개화(文明開化)였다.

  이 책에서 놀라게 되는 사실은 이승만이 19세기말 20세기초의 조선인으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서양문명의 본질과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20대 이승만은 당시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던 유길준(兪吉濬), 윤치호(尹致昊)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높은 지적 수준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독립정신>의 주제는 대한제국도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이념에 토대를 둔 미국식의 민주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군주제와 신분제를 무너뜨리려는 위험한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그것의 폐지를 직접 주장하지 못하고, 미국의 제도를 길게 설명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이 책에서 이승만은 열강의 침략으로 어려움에 빠진 조선 왕국을 푹풍우를 만난 배에 비유했다. 따라서 조선이라는 배가 가라 앉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집권층인  선원들과 백성인 선객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문명개화를 위해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문명개화의 모델은 미국

  이승만은 문명개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이 미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유민주주의 정신의 근원이 되는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서’를 소개하고 있다. 그에 따라 책에는 ‘자연법’ ‘자연권’과 같은 낯 선 단어들도 언급되고 있었다. 

  또한 대통령제를 중심으로한 미국의 정치제도를 소개했다. 그리고 미국 헌법의 마지막 부분인 인권 조항, 즉 ‘권리장전’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당시에 미국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조선의 군주제와 신분제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민주정치를 전제정치,입헌군주정치와 함께 설명하면서 우리 나라에게는 입헌군주제가 적합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극단의 위험을 피해가고 있다.  그것은 어디 까지나 정치적 탄압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 책의 전체 분위기로 볼 때, 그는 마음 속으로 이미 공화주의자(共和主義者)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나중에 그가 감옥을 나와 미국 유학을 떠날 때 민영환의 주선으로 고종 황제가 만남을 요청했을 때 거절했던 경우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군주제는 없애야 될 악폐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승만은 조선의 집권층이 국제정세에 무지하고 겁이 많은, 따라서 자기 일신의 영달에만 관심을 가진 부패 무능 분자들로 보고 있다.

문명은 종교와 관계가 있다
 
  동시에 그들의 지배 이념인 유교가 공허하고 따라서 쓸모없는 이론임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승만은 동시대의 다른 개화파 지식인들과 마찬 가지로 “유교 망국론”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안으로 그는 한국인의 새로운 종교로 기독교(개신교)를 제시했다. 그 점에서 이승만은 오늘날 아놀드 토인비, 새뮤얼 헌팅턴으로 대변되는 문명사관 또는 문명충돌론의 기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즉,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 단위를 민족이나 국가 대신, “생활 방식”을 의미하는 문명(文明)이나 문화(文化)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생활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을 종교(宗敎)로 보고 있었다. 그 점에서 기독교(개신교)는 한국인들이 문명개화하기 위한, 다시 말해 “생활 방식”을 바꾸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서양문명을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그 근본 토대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부터 받아 들여야 했던 것이다. <독립정신>에서 이승만은 무지몽매한 백성들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임오군란과 동학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눈에는 어리석은 민중이 격정에 휘둘리어 폭동에 휘말림으로써 외국 군대를 끌어 들이는 빌미를 제공하고, 그 결과로 국토를 초토화시켰다는 것이다. 

  우매한 민중들의 맹목적인 외국인 배척 운동은 서양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그의 시각을 통해서 볼 때, 당시 개화파 지식인들과 농민 대중 사이에는 메꿀 수 없는 넓은 간격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무능하고 러시아는 사악

  <독립정신>에는 당시 한 반도를 둘러싸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강대국들을 보는 눈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중국(청)에 대해서는 가장 가혹하게 비판하고 있다. 중국은 노쇠하고 무능할 뿐만 아니라 사악하기도한 것으로 비치고 있다. 

  특히 중국이 1882년의 임오군란으로부터 1894년의 청일전쟁에 이르는 12년 동안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킨 사실이 조선왕국의 개화를 가로 막은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분개하고 있다. 원세개의 간섭 밑에서 조선왕국은 개화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군대의 주둔과 중국 상인의 진출 때문에  조선 땅에 다른 외국 군대를 끌어 들이게 되고 외국 상인들이 한반도 깊숙이 들어와 활동하게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은 조선을 속국이라고 주장하다가도 곤란한 일이 생길 때는 자주독립국이라고 말을 바꾸는 겁쟁이 나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이 문명개화하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중국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에 대해서도 아주 부정적이었다.  러시아는 후진국이고 전제적일 뿐만 아니라 한 반도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가진 음흉한 나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발 빠른 개화 의지, 그리고 강인한 인내심과 열정적인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경계해야 할 나라로 불신하기도 했다. 역시 이승만의 최대 우호국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세계 각국이 고유성을 버리고 하나의 문명으로 통합해 발전하고 있는 추세의 중심에 서 있는 문명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동맹(同盟)을 반드시 필요로하는 약소국 대한제국이 손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한반도에 대해 “영토적 야심이 없는” 유일한 강대국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독립정신>은 ‘세계화’와 ‘선진화’가 외처지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인을 위한 예언서, 또는 ‘문명개화’의 지침서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선구적인 업적이었다.

  그 원고는 반년만에 완성되어 밖으로 몰래 빼내 보관되었다.  그러다가 먼저 감옥을 나온 박용만이 1905년에 여행용 트렁크 밑바닥에 숨겨 미국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1910년 1월 로스앤젤리스에서 《독립정신》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미숙한 점이 있기는 하면서도, 그를 일생 동안 지배했던 정치사상의 기본 골격을 거의 모두 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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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9-21 15:53

진리님의 댓글

진리
[백년전쟁] 두 얼굴의 이승만
https://youtu.be/idbhQx10-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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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071 참 개 ㅈ 같은 미국의료 댓글[1] 새글첨부파일 Gymlife2 2024-04-25 52
105070 요즘 1캐럿 109불짜리 인조 다이아몬든 퀄리티 새글 pike 2024-04-25 142
105069 2년 무시당한 요청을 1시간 만에 들어준 이유 새글 3 원조다안다 2024-04-25 167
105068 갑부의 서민 체험 새글 4 원조다안다 2024-04-25 167
105067 친아버지한테 대포차 작업당한 아들 댓글[2] 새글 1 원조다안다 2024-04-25 138
105066 시상식에서 일침 날리는 코미디언 새글 5 원조다안다 2024-04-25 177
105065 장애인 주차구역 좁다고 민원 넣었더니 사라져버림 새글 원조다안다 2024-04-25 138
105064 다이나믹 코리아 근황 새글 원조다안다 2024-04-25 154
105063 '아이 한 명당 1억 원 준다면'... 댓글[1] 새글 2 원조다안다 2024-04-25 107
105062 54세 김혜수 댓글[1] 새글 3 원조다안다 2024-04-25 197
105061 60대 맞아?" 아르헨티나 미인대회 1위 나이 화제…직업도 화려 새글인기글 pike 2024-04-25 281
105060 재산 2조 원 남편, 이영애 소탈한 부산 봄나들이 “당일치기 부산 기차여행 새글인기글 pike 2024-04-25 216
105059 파리올림픽 금매달 목표 5개...비인기 종목 운동선수 사양길...인기종목은 메달 힘들어 새글 pike 2024-04-25 136
105058 미국 핵 타격의 문제 새글첨부파일 Gymlife2 2024-04-25 97
105057 방랑객아 댓글[3] 새글 자몽 2024-04-25 125
105056 미정부 틱톡문제로 대규모 소송물결 예상 새글 Gymlife2 2024-04-25 75
105055 박사님, 다른 집 사진을 잘못 올리셨네요 + 기적의 복숭아 나무 댓글[1] 새글인기글 13 오필승코리아 2024-04-25 228
105054 한국에서 논란의 중심! 베꼈다 논란인 뉴진스와 아일릿 뮤비 비교 새글 소소한행복 2024-04-25 131
105053 왜 그리 중국에 집착하나? 새글첨부파일 Gymlife2 2024-04-25 85
105052 미국 비자 신청 새글첨부파일 미이민 2024-04-25 50
105051 트럼프 최측근 입에서...한국 핵무장 고려 새글인기글 pike 2024-04-25 211
105050 전남편 살찐거 디스했다가 욕먹은 서유리 새글인기글 pike 2024-04-25 329
105049 다이아몬드 똥값됨, 2시간만에 어렵지 않게 뚝딱 만듬 댓글[1] 새글인기글 pike 2024-04-25 349
105048 뱅크카드서비스 장학생 모집 새글첨부파일 정미 2024-04-25 54
105047 테슬라 오토파일럿 사고로 `살인죄`, 워싱턴주 남성 체포 새글인기글 pike 2024-04-25 269
105046 판사 출신 변호사가 본 민희진 사건 새글인기글 pike 2024-04-25 287
105045 sanfo선생님 (올해도 매실 흉작이라서 구입 불가능 확인 하였습니다) 댓글[3] 새글인기글첨부파일 자몽 2024-04-24 299
105044 새로나온 발렌시아가 700만원짜리 옷 댓글[1] 새글인기글 pike 2024-04-24 640
105043 틱톡에서 노우트란 인스타그램 경쟁 앱 만든다. 새글 1 Gymlife2 2024-04-24 150
105042 5/16~5/23 샌프란<->옐로스톤 로드트립 새글인기글 DoyeonKim 2024-04-24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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