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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승만 대통에 대한 비교적 중립적인 기록 제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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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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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승만 시대(10) 프린스턴대서 박사학위..귀국, 청년 교육..105인사건으로 일제 피해 망명길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우드로 윌슨을 만나다

  하버드 대학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승만은 뉴욕으로 옮겨 왔다. 그는 유니언 신학교 기숙사에 머물면서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갔다가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알게 된 어네스트 홀 목사를 만났다. 홀 목사는 이승만의 딱한 사정을 듣고 나서 그에게 뉴저지의 프린스턴 대학으로 옮길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다음 날 아침 이승만은 그로부터 속달 우편을 받았다. 봉투  안에는 프린스턴 행 기차표와 함께 프린스턴 역에서 만나자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승만은 당장 프린스턴으로 갔다.    프린스턴에 도착하자, 홀 박사는 이승만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장 찰스 어드만에게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신학대학원 기숙사인 칼빈 클럽에서 무료로 먹고 자면서 대학원 정치학과에 다니도록 주선해 주었다. 1908년 9월 학기로 입학이 허용된 것이다.

프린스턴에 있는 2년 동안 이승만은 미국에 온 이래로 가장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학비와 생활비 걱정이 없었기 때문에 공부에만 열정을 쏟았다. 신학대학 기숙사(알렉산더홀과 핫지홀)에 머물면서 신학 강의도 듣고 신학생들과도 친해졌다. 신학대원장 찰스 어드먼, 대학원장 앤드루 웨스트, 그리고 총장 우드로 윌슨은 모두 이승만을 도우려고 했다.
 
  특히 윌슨 총장 부부와 세 딸은 그를 집으로 자주 불러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둘째 딸인 제시가 이승만에게 동정적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교육사업을 하고 있을 때 결혼 청첩장을 보낼 정도로 가깝게 느꼈다.

윌슨 총장은 손님들을 만날 때마다 이승만은 장차 한국 독립을 되찾을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그를 강연 연사로 추천했다. 프린스턴에서 이승만은 국제법과 외교사를 전공했다. 그리고는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이란 제목의 박사학위 청구 논문을 제출했다.

  논문은 1912년에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되었다. 그리고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공해상의 중립 문제가 떠오르면서,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1910년 6월 14일 졸업식에서 이승만은 윌슨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것은 윌슨이 총장으로서 참석한 마지막 졸업식이었다.

  그 길로 윌슨은 대학을 떠나 뉴저지 주지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1912년 11월에는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사 학위는 받았지만, 이승만은 돌아갈 나라가 없었다. 그가 박사 학위를 받은 지 두 달 뒤인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었기 때문이다.

박사학위 논문이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되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서양에서 전시중립제도가 정착하는데 미국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과정을 밝힌 것이었다. 즉, 미국의 탄생과 함께 전시에도 중립국들의 통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국제관행이 만들어진 과정을 추적한 것이다.

전시에 통상의 자유를 방해한 나라는 주로 해군이 강한 영국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은 영국에 대해 전시에도 통상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계속 주장했다. 미국은 1812년에 영국과 전쟁을 하면서까지 중립의 권리를 지키려고 했다.

  나아가 미국은 그러한 통상의 자유를 중남미 대륙으로 확장시키기도 했다. ‘먼로 독트린’이 바로 그러한 미국의 의지를 표현한 외교적 원칙이었다. 그것은 중남미의 식민지들이 유럽의 모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그들의 독립을 승인하고 중립국의 권리로 정당화해 주었다.

  그후 “미국의 중립 관행”은 제네바 국제중재재판소와  1908년의 런던회의에서 인정됨으로써 국제법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전시중립론은 자유주의적인 미국식 국제법이었다. 미국은 유럽의 해양 강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그것을 계속 천명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정착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논문 주제로 중립의 문제를 다룬 것은 한말의 개화파들이 그것을 한국의 독립 보존 방법으로 생각했던 데서 시작되고 있는 것 같다. 한 때 한국인들은 유길준의 경우처럼 영구중립을 열렬히 희망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가 된 고국땅에 돌아와 YMCA 활동을 하다

박사학위를 받고도 갈 곳이 없어 실의에 빠진 이승만에게 서울 기독청년회(YMCA) 총무 G. G. 그레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에 돌아와 일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떠난지 6년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1910년 9월 3일 그는 뉴욕에서 영국의 리버풀로 가는 배를 탔다. 태평양 항로를 택하지 않고 대서양 항로를 택한 것은 유럽의 나라들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의 리버풀에서 배를 내린 이승만은 런던, 파리를 구경했다. 그리고는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만주에 도착했다. 만주에서 한반도로 들어 올 때 그는 한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일본 관리들에게 여행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슬픔을 맛보야야 했다.

그리고는 1910년 10월 10일 기차로 서울역에 도착했다. 조국이 일본에 병탄된 한달반 뒤였다. 그리고 6년 만에 부친을 만났다.    그는 제일 먼저 한국인들의 큰 지도자였던 이상재(李商在)를 찾아 갔다. 이상재는 한성감옥서 시절 이승만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후 기독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승만을 아들처럼 아끼고 있었다.  서울 YMCA에서 이승만은 학생부 간사와 청년학교 학감으로 강연을 하고 성경을 가르쳤다.

당시 이승만은 최고 학력의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수많은 청년들이 모여 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영향을 받아 미국 유학의 꿈을 키웠다.  그들 가운데는 임병직, 이원순, 허정 등이 있었다.

  1911년에는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전국을 다니면서 교회와 학교를 방문했다.  그는 강연과 설교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자유주의 사상을 불어넣고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려고 했다.    그 때문에 일본 헌병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특히 윤치호가 경영하는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에서 모인 하령회(夏令會) 이후로 일본헌병의 감시가 심해졌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종로학당 교장으로만 일했다. 5년 7개월의 감옥 생활을 겪었던 그에게 체포의 악몽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105인 사건’과 함께 조여오는 일본의 압박
 
  그러나 그러한 이승만의 신중한 처신도 오래 갈 수 없었다.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해 개신교 세력의 민족운동을 타도하려 했고, 그 파장이 이승만에게도 밀려 왔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평안북도 선천의 기독교계 신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데라우찌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조선총독부의 사건 조작이었다. 그 사건으로 135명의 한국인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심문 도중에 3명이 고문으로 숨졌고 많은 사람들이 옥살이를 했다. 그 사건의 대표급 인물인 윤치호(尹致昊)는 3년형을 살았다. 

  이승만도 위험한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지만, 당장 체포되지는 않았다. 당연히 그도 체포대상이었지만, 한국 YMCA 총무였던 필립 질레트, 그리고 일본 YMCA 지도자인 존 모트 같은 미국인 선교사들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잘 알려진 이승만을 체포하면 미국과 일본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일어날 것이라고 일본인들을 위협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 있던 동북아시아 감리교 책임자 해리스 감독이 ‘105인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한국으로 온 것도 그의 체포를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아서 브라운 박사의 한국 방문도 이승만에게 도움이 되었다. 일본에 잠시 와 있던 하버드 대학 총장 찰스 엘리엇의 105인 사건 진상 조사 활동도 이승만의 체포를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보호막도 오래 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남은 길은 애국계몽 운동을 그만두든가, 아니면 한국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날 것을 적극 권유했다. 

  그때 마침 세계 감리교 총회가 1912년 5월 미국 미네소타 주의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 회의는 4년마다 열렸다.    이승만은 주변 인물들의 도움으로 거기에 참석할 한국 대표로 뽑힐 수 있었다. 그가 한국 대표로 뽑히는 데는 배재학당 동창이자 인사동 중앙감리교회 책임자인 이경직(李璟直)목사의 도움이 컸다.    이승만은 37회 생일인 1912년 3월 26일에 회의 참석을 이유로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실제로는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망명 길이었다. 


[연재] 이승만 시대(11) 타이타닉 침몰..하와이를 독립운동 기지로, 학교와 교회를 세우다
4. 독립을 찾는 길은 외교뿐이다
                                 
다시 미국으로 망명...타이타닉 침몰 뉴스를 듣다
 
  배는 중간기착지인 일본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가마쿠라에서 한인 유학생들을 만난 후, 도쿄 YMCA에서도 한인 유학생들에게 강연을 했다. 강연을 들은 청년들 가운데는 나중에 한국의 지도자로 활약할 이인, 송진우, 안재홍, 김병로, 최두선, 현상윤 등이 있었다.

  그리고는 1912년 4월 10일 요코하마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 배에는 이승만처럼 미네아폴리스 세계 감리교 총회에 참석할 해리스 감독도 있었다. 해리스는 이승만에게 일본을 비난하지 말고 일본의 한국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일 것을 신신 당부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항해 도중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그 유명한 호화판 여객선 타이타닉 호가 북대서양에서 빙하와 부딪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사람은 캐나다의 빅토리아에서 배를 내려 미국의 시애틀을 거처 감리교 총회가 열리는 미네소타의 미니애폴리스로 갔다.

  회의는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교사였던 노블 박사와 한 방을 썼다.    이승만에게도 연설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한국은 비록 나라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교회만은 일본 교회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된 교회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대해 미국인들을 비롯한 서양인 대표들은 반대했다.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이 교회만 독립된 채 남으면 서양 선교사들의 활동이 어렵게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총회는 지금까지 감리교 선교부가 해 온 대로 일본 정부와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그러므로 1912년 5월 말에 총회가 끝났을 때, 이승만에게 남은 것은 허탈감뿐이었다.  돌아갈 나라도, 직장도 없었다.

장로교 선교사로서 경신학교 교장인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가 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연희전문학교의 교수 자리를 제안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승만은 신변만 보장된다면 귀국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렇지만 대학 설립이 뜻대로 되지 않았던지 언더우드로부터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 후 6개월 동안 이승만은 할 일을 찾기 위해 시카고, 프린스턴, 봍티모어 등지를 다니며 친지들을 만났다. 교수 자리를 얻을 생각도 해보았다. 프린스턴 대학 은사인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민주당 전당대회를 참관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윌슨의 둘째 딸 제시의 도움으로 1912년 6월 19일에 윌슨과 그의 가족들을 뉴저지 주 시거트의 별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1912년 11월 18일에는 <워싱턴포스트>지와 인터뷰도 했다. 그렇지만 그전과는 달리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일본을 공격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하와이를 독립운동 기지로 삼다

  갈 바를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멀리 하와이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왔다. 한성감옥 동지였던 박용만(朴容萬)이 하와이로 와서 한인 교육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였다.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 출신으로 네브라스카 대학을 졸업하고 하와이로 먼저 가서 <국민회보> 편집인 일을 맡고 있었다.

  이승만은 1913년 2월 3일 호놀루루에 도착했다. 도착한 즉시 그는 서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전보를 받았다.

  하와이에는 이승만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존 와드먼 박사가 그 지역 감리교 감리사로 있으면서 한인 학생들을 위한 한인기숙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한인기숙학교는 기숙사를 갖춘 6년제 남자학교였다. 영어와 한국어로 교육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지리, 한문도 가르치고 있었다.

  와드먼은 일본 영사관에서 주는 지원금도 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한인들의 반발을 샀다. 한인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한 민족의 고유성을 유지시키고 싶어했던 것이다. 따라서 와드먼은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때 이승만이 하와이에 온 것이다. 그래서 와드먼은 즉각 이승만에게 한인기숙학교 운영을 넘겼다.

이승만은 우선 교민들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하와이 군도의 여러 섬을 찾았다. 교민들은 파인애플 농장에서 저임금의 고된 노동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보다 더 시급한 것은 자녀 교육이었다. 한인들은 멀리 외롭게 떨어져 있는 농장들에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 아이들은 아예 교육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이승만은 우선 급한 대로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여 한인 소녀들을 호놀룰루로 데리고 와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보육원에 맡겼다. 그리고 나서는 교포들의 도움을 얻어 기숙사가 있는 ‘한인 기독여학원’을 세웠다. 교민들은 이승만의 교육 활동에 대해 크게 만족해 했다.     
 
  그러나 와드먼 박사가 하와이 감리교 감리사직을 물러나고 프라이 박사가 그 후임으로 오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신임 감리사는 미국 감리교 본부의 방침에 따라 인종통합주의 교육을 시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인,중국인, 일본인 학생들을 구분하지 않고 섞어 교육시킴으로써 보통의 미국 시민을 육성하려는 것이었다.  그 경우에 한인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기 위한 한국어 교육과 한국 역사 교육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었다. 

민족의식의 수련장인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

  고민하던 이승만은 결단을 내렸다. 1916년 가을 그는 한인 학생들에게 민족 교육을 시키기 위해 미국 감리교 선교부와 손을 끊은 것이다. 그리고는 교민들의 도움을 얻어 기숙사를 갖춘 한인기독학원(Korean Christian Institute)을 세웠다. 그것은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남녀공학제(共學制) 학교였다.

학교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한인기독교회(Korean Christian Church)을 세웠다. 그 교회는 1939년에 릴리하 스트리트 1832번지에 서울의 광화문을 모방한 건물을 세웠다. 그 교회는 미국의 어떤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 교회였다.    그러나 한인들 가운데는 여전히 감리교회에 남고자 하는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인기독교회의 설립으로 한인 교회가 둘로 갈라지는 결과가 되었다.

  이처럼 이승만이 교회의 분열을 각오하면서도 미국의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초교파적인 교회를 세우려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인기독교회’가 미국의 어느 교파에 속한다는 것은 교단의 감독을 받아야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교민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 한인교회 재산이 미국의 교단본부에 귀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자신의 교회가 어느 한 교파에 속한다는 것은 다른 교파의 한인들을 멀리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위해 힘을 모으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한인기독학원’은 1920년에 뜻밖의 위기를 맞았다. 하와이 지방 정부가 교육법을 바꾸어 공립학교 학력만을 인정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립학교인 ‘한인기독학원’ 학생들은 정식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치러야만 했다.

  게다가 하와이 지방 정부는 공립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특별교육세까지 거두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사립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는 학부모는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세금만 더 내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인들이 자녀들을 ‘한인기독학원’에 보내기를 꺼려했을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도 ‘한인기독학원’은 살아남았다. 그것은 1919년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이 됨으로써 유지가 가능하게 되었다. 하와이 교민들은 임시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 학교를 존속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연재]이승만 시대(12) 안창호와 이념 갈등, 암살 당할 뻔...<태평양 주보> 발간

<한국교회핍박>과 <태평양주보>

  다른 한편으로 이승만은 틈틈이 시간을 내어 1913년에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의 수난 사건인 ‘105인 사건’을 기록한 《한국교회핍박》을 펴냈다. 그 책에서 그는 일본이 한국의 개신교도들을 탄압하게 된 것은 개신교를 통해 자유주의(自由主義) 혁명사상이 일본제국 전체에 퍼져나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개신교는 인간의 평등과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상 숭배를 거부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천황 숭배를 거부하게 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일본의 군주제, 봉건제, 군국주의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당시 한국 교회는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학교를 세우고 토론의 방법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민주주의 방식이 관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늘어나, 미국과 통상이 시작된지 30년이 못된 1912년에, 기독교인은 25만명(또는 37만명), 예배당은 500 곳, 기독교학교는 962개에 이르렀다.  또한 교회 안에서는  노름, 주색잡기, 술,담배의 금지와 같은 청교도적 윤리가 강조되고 있었다. 그것은 근면성을 키워 한국인들이 언젠가는 부강한 나라를 세우게 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승만의 주장에 따르면, 서양에는 동양에는 없는 혁명 사상, 즉 백성에 의한 정부 전복 사상이 있었다. 그런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은 인종 때문이 아니라 종교, 즉 기독교 때문이었다. 예수는 미천한 자로 태어나 불쌍한 자와 병든 자를 대변하던 최초의 ‘혁명 주창자’였기 때문에 신약성서를 공부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혁명사상을 갖게 된다는 것이었다.
 
  기독교가 혁명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로서 이승만은 중국의 신해혁명이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를 그대로 놓아 두면 혁명 사상이 퍼져 나가고, 동양에 처음으로 기독교 문명에 토대를 둔 기독교 국가가 탄생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기독교를 탄압하고, 나아가 한국교회를 일본교회에 합병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러한 생각으로 동포들을 계몽하고 국내외 소식을 알리기 위해 <태평양 잡지>를 발간했다. 그것은 나중에 <태평양주보>로 이어졌다.


무장투쟁론이 아닌 외교독립론에 따른 독립운동

  하와이에서 그는 일부 한인들과의 갈등으로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다. 이승만이 처음 하와이에 왔을 때, 한인 단체로는 대한인국민회가 있었다. 그것은 주로 강원도 출신의 박용만과 평안도 출신의 안창호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학력의 이승만이 오면서, 하와이 한인 사회의 주도권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하와이는 미국 전체 한인의 4분의 3이 사는 곳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는 데 가장 유리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더욱더 갈등이 커질 가능성이 있었다. 

  갈등은 독립운동 방법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박용만은 한국의 독립은 무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무장투쟁론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군사학교인 ‘대조선 국민군단 병학교’를 설립하고, 하와이의 외진 숲에 청년들을 모아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와는 달리 이승만은 외교독립론(外交獨立論)을 주장했다. 한국인의 독립은 우리의 무력으로는 불가능하므로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으로 멸망할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미국 정부와 미국 여론의 지지를 얻어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에게 무장투쟁은 한국인들을 ‘테러리스트’로 보이게 할 위험이 있었다.  설사 한국인들이 무장을 갖추어 일본인들과 싸우게 된다 할지라도, 미국과 영국은 일본 편을 들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앵글로색슨족의 두 강대국은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보여줄 군중시위(群衆示威)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3 •1 운동 전부터 국내의 개신교 계통의 독립운동가들과 비밀리에 연락하고 있었다. 그것은 평안북도 선천의 미동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료선교사 알프레드 샤록스가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왔을 때 시작되었다.

  그리고 3 • 1운동 이후에는 태평양위원회, 흥업구락부에 소속된 신흥우, 유억겸 같은 개신교계 지식인들을 통해 계속 관계를 유지했다. 한인 지도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1915년 5월에 박용만이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인 <국민보>를 통해 이승만을 연거푸 공격한 다음부터였다. 

  이승만도 <스타불레틴>과 <호놀루루 애드버타이저>같은 미국 신문을 통해 반박했다. 그 후 박용만은 중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으나, 어느 독립운동가의 오해를 사서 살해되는 불행을 당했다.

이승만의 충실한 후원조직인 대한인동지회
 
  이승만은 안창호(安昌浩) 지지 세력 또는 흥사단 세력과도 갈등을 겪었다. 안창호는 주로 중국에 머물면서 미주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지지자들을 모으고 있었다. 안창호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영어도 잘 못했지만, 뛰어난 웅변술과 사람을 끄는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대한인국민회에서 강한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조직인 흥사단(興士團)을 이끌고 있었다.

  이념에 있어서 두 사람은 비슷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지역적인 차이가 있었다. 안창호는 주로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 출신들 속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와 달리 이승만의 지지자들 가운데는 서울, 경기를 중심으로 한 기호 지방 출신이 많았다. 특히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부녀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념적인 차이도 있었다. 안창호는 독립운동가들을 단결시키기 위해서라면 사회주의자들도 끌어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좌우합작론(左右合作論)의 성격을 띤 대공(大公)주의와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기 때문에 안창호가 하와이를 방문하면서도 이승만에게는 알리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 오해는 두 지도자보다도 추종자들 사이에서 더 심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안창호 추종자에게 암살될 뻔한 적도 있었다.
 
암살을 계획했던 사람은 오진국이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 방에서 박용만을 권총으로 쏘아 부상을 입힌 적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승만을 암살하기 위해 하와이로 가는 배를 탔지만, 도중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조직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상해에 5개월간 있었을 때 그것을 더욱 더 느꼈다. 그래서 그는 1921년 하와이로 돌아 오는 즉시 그의 추종자들을 모아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를 조직했다.  김노디, 이원순, 최백렬 같은 인물들로 이루어진 동지회는 이승만에 대해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이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동지회는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에도 지부를 두었다. 이승만은 그들의 후원으로 1939년까지 한글과 영어로 된 <태평양주보>를 발간할 수 있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1917년, 미국 대통령 윌슨은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14개조 원칙을 발표했다. 그 속에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이  표명되자, 강대국들의 지배 밑에 놓여 있던 피압박 민족들은 독립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다.

  이승만은 1917년 10월 29일 뉴욕에서 열린 약소민족대표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마사리크가 이끄는 체코인들이 주축이 된 모임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평생 후원자가 될 변호사 존 스태거즈(John Staggers)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1919년 초에 제1차대전의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교전국들이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열 예정이었다.  이승만은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했다. 프린스턴 대학의 스승이었던 윌슨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할 것이므로, 그 회의에서는 한국인의 독립 호소가 먹혀 들 것도 같았다.

  그 준비를 위해 이승만은 1919년 1월 6일에 호놀루루를 떠나 본토로 갔다. 그리고 2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과 의논한 다음 한인대회를 열어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미국인들에게 보여주자고 결정했다. 두 사람은 대회 초청장을 교포들에게 발송했다.

  이승만은 대학원 시절 은사였던 윌슨 대통령을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내무장관을 통해 보내온 윌슨의 회답은 파리에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인 대표가 회의장에 나타나면 일본의 항의로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미국 정부는 이승만에게 여권조차 발급해 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좌절감을 느꼈다. 게다가 몸 마저 아팠다. 그때 그의 절친한 동지인 정한경(鄭翰景)이 위임통치 청원서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어차피 한국이 당장 독립을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장차 완전 독립을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당분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밑에 두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우선은 어떻게 해서든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일로 보였던 것이다.

  사실 한국의 위임통치는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일본은 전승국에 속했기 때문에 그 식민지를 빼앗길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조차 할 수 없게 된 터였으므로, 이승만은 우선 그렇게라도 해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19년 3월 3일 이승만은 정한경과 공동명의로 백악관에 보내 미국대표단이 파리 평화회의에 제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문서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단지 이승만이 그의 비판자들로부터 맹렬히 비난을 받는 구실이 되었을 뿐이었다.    사실 그 문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려지지 조차 않았을 정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샌프랜시스코의 국민회와 친안창호계 인물들이 운영하는 <신한민보>가 그 내용을 싣고 그것을 상해에 전달함으로써 이승만을 비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정한경은 그 이후에도 계속 위임 통치론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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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9-2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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