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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친일, 친북,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교적 중립적 기록 제 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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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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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승만 시대(20) OSS특수부대 추진...김구에 '선전포고' 촉구

소련의 한반도 개입 조짐이 나타나다
 
▲ 일본의 패망전야 소련의 한반도 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싸우던 시절 워싱턴의 이승만.
 
이승만이 볼 때, 일본이 제2차대전에서 패배할 경우에 그 식민지인 한반도는 소련에게 넘겨져 즉각 공산화될 위험성이 컸다.

  아니면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하는 좌우합작 연립정부가 들어서서 천천히 공산화될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한 이승만의 우려는 전혀 근거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언론보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3년 3월 하순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이 미국을 방문해 프랭클린 루스즈벨트 대통령을 만났을 때였다. <시카고 썬>지에는 두 사람이 소련이 한반도를 차지하는 문제와 신탁통치 문제를 상의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월드 어페어즈> 1943년 6월호에도 미 국무부가  한국인의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소련에 대한 특별 배려 때문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승만은 강대국들이 한국에 대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그러한 음모의 가능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45년 봄에 <한국 사정>이란 소책자를 발행해서 배포했다.

  그 책자에서 이승만은 중경의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소련이 구체적인 요구를 제시할 때까지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최종결정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은 미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일본과의 전쟁에 소련을 끌어들이려 했고, 그것에 대해 소련은 대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책자에서 이승만은 미국이 소련군의 도움을 얻기 위해 한국인과 같은 약소민족을 희생시키려는 것은 잘못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무장투쟁을 위해 한인특수부대를 창설하려 하다

    이승만은 흔히 외교독립론자로 무장투쟁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일본군과 싸울 한인 전투부대를 창설하려고 노력했다. 무장투쟁이 중경의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을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관계가 좋아진 김구의 임시정부에게 일본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도록 권유했다.그리고 미국정부에게는 무기대여법에 따라 임시정부를 원조하도록 촉구했다.

  보다 구체적인 문제로 들어가, 그는 미군 정보조정국(COI)에 대해 재미한인들로 독립적인 특수부대를 창설해서 일본에 대한 전투에 투입시켜 줄 것을 계속 요청했다.  미군과의 연결은 나중에 그 기구의 중국 책임자가 된 에쓴 맥도웰 게일과 알게 되면서 이루어졌다. 에쓴 게일은 이승만이 한국에 있을 때 아주 가까이 지내던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조카였다.

    게일을 통해 이승만은 그 기구의 책임자인 도노반과 2인자인 프레스톤 굿펠로우와도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1941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열린 여러 차례의 정보조정국 회의에도 직접 참석해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 이승만을 도와준 굿펠로가 서울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승만은 우선 그 준비를 위해 재미교포 청년인 장석윤(張錫潤)을 미군에 입대시켰다. 그에게는 중경의 김구와 연락하기 위한 이승만의 편지를 휴대시켰다.  1942년 6월 이승만은 미 전쟁부로부터 게릴라 훈련에 필요한 한인지원자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50명의 명단을 제출했다. 그들 가운데는 나중에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 일했던 장기영, 이순용, 장석윤, 김길준, 정운수, 김세선, 한표욱 등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부는 그 계획이 실현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채택하지 않았다.  정보조정국(COI)에서 이름을 바꾼 전략사무국(OSS)은 1944년 중국을 거치지 않고 한반도로 직접 한인 게릴라 부대를 투입하려는 냅코(NAPKO) 계획을 세웠다.

  미군에 입대한 장석윤은 일본군이나 일본군 노무자였다가 미군 포로가 되어 위스콘신 주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한인들과 접촉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포로수용소에 잠입해 사이판 노무자 출신 3명, 미얀마 전선에서 탈출한 학병 출신 3명을 특공대원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에 미국시민으로 미 육군에 입대한 뒤 OSS에 배속된 장석윤, 유일한 등 6명, 그리고 민간인 출신으로 OSS에 들어온 김강,변준호 등 7명이 합세했다. 그래서 모두 19명의 한인들이 이른바 ‘냅코’ 작전에 차출되었다.

  이들은 샌프랜시스코 연안의 한 섬에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훈련. 촬영,낙하산 훈련 등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끝낸 다음, 그들은 ‘냅코’ 작전에 대한 중국 및 태양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사령관들의 승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중국전구의 웨드마이어 장군, 태평양지역 육군사령관 맥아더 장군, 태평양 지역 해군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승인을 꺼렸다. ‘냅코’ 작전이 기존의 전투력을 분산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는 사이에 일본이 항복했다. 그에 따라 그 작전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말았다.     

중국 외교부장이 좌우합작을 강요하다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개입은 좌우합작이라는 명분 밑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컸다. 왜냐하면 당시 미 국무부는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국제문제를 해결한다는 정책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미국의 정책에 동조한 사람이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 T.V.쑹)이었다. 따라서 그는 반공,반쏘주의자인 이승만을 크게 괴롭힌 인물이 되었다.    송자문은 장개석 총통의 처남이었으면서도 소련과 공산주의자들과 내통하고 있던 기회주의자였다. 그 때문에 그는 궁극적으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의 공산당에게 패망하게 만드는데 기여했다.

  송자문은 일본이 패망해 한국이 독립될 경우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권력을 잡기를 바랬다. 특히 김규식• 김원봉• 조소앙과 같은 좌파 성향의 인물들이 집권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우파인 김구에게 중국 정부의 재정 지원을 미끼로하여 임시정부에게 김규식-김원봉과 같은 좌파를 받아 들이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 결과  1942년 12월에 임시정부가 ‘좌우합작’ 정부로 바뀌게 되었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변질에 대해 크게 분개했다. 그래서 중국의 김구에게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끊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구는 ‘좌우합작’을 해야만 중국의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송자문은 미국 정부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헐뜯었다. 너무나 분열이 심하고 허약해서 국제적 승인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중국이 겉으로는 일본과 대립하는 한국인들을 도우면서도 속으로는 한국의 독립을 바라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이중적인 행동이었다. 중국은 오랫 동안 한국을 자기네 속방으로 생각해 왔고, 그 생각은 제2차대전 당시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 때문에 중국은 자기 영토 안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끝까지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재]이승만시대(21) 미-소 결속에 '소련 위성국' 우려...흥사단-한길수등이 모략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과의 면담

  중국 외교부장 송자문의 이중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로서는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1943년 여름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의 이름으로 한반도 안에서의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관한 보고서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출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루스벨트는 이승만이 보내온 보고서를 송자문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물었다. 그때 송자문은 미국을 방문중이었다.  그러자 송자문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분열이 너무 심해 아무 힘도 쓰지 못할 것이라고 답변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승인을 막는 결정적인 발언을 했다.   

  1945년 3월 9일 이승만은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Anna Eleanor Roosevelt) 여사를 만날 기회를 얻었다. 이승만은 대통령 부인에게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군사 원조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보좌관들의 잘못된 보고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대통령에게 시정을 건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승만을 만난 다음 그녀는 그의 독립 운동과 인격을 높이 평가하는 글을 신문에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도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정부의 대외정책을 바꿀 수는 없었다.

유엔 창립 총회에서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마지막 호소

  독일의 항복을 한 달 앞 둔 1945년 4월, 연합국은 전후의 세계 평화를 유지할  기구로서 유엔을 창설하기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승만은 그 회의에 옵서버 자격으로라도 참석하여 한국 독립에 대한 연합국의 확실한 보장을 얻려고 했다.

  미국의 한인교포들도 그 회의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이념과 노선에 관계없이 모두가 협조하려 했다. 그 때문에 2개 대표단이 통합된 하나의 한국대표단이 구성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유엔 창립 총회가 열리는 샌프란시스코의 모리스 호텔에 한국대표단 본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나서 총회 사무총장인 알저 히스에게 한국 대표단의 옵서버 자격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거부당하고 말았다.  유엔 창립 총회장에 나타난 이승만이 회의장 안팎에서 느꼈던 분위기는 미국이 소련을 특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독일이 항복하는 즉시 미국이 소련을 일본과의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계산에서 나오는 것이 확실했다.

  이승만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근거는 많았다. 그것은 영국의 처칠 수상이 발칸 반도에 미군과 영국군을 상륙시킬 것을 끈질기게 주장했는데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끝까지 거부한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처칠이 발칸 반도 상륙을 고집했던 것은 그 지역의 나찌 독일군을 몰아내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지역에 대한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루스벨트가 처칠의 제안을  거부했다는 것은 발칸 반도를 소련에게 넘겨 줄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증거는 프랭클린 루스즈벨트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게 압력을 넣어 모택동의 공산당과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하도록 강요한 했던 사실이었다.  중국의 통치자인 장개석에게 독자적인 군대를 가진 모택동의 반란세력과 손을 잡으라는 것은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공산화를 받아들이라는 요구였다.

  이와 같은 압력은 모두 소련을 특별 배려하려는 데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 때문에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서도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해 줄 것으로 이승만은 확신했다.  따라서 한국인에게 독립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결국은 동유럽 국가들처럼 소련의 위성국으로 떨어질 것이 확실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러한 불행한 사태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얻으려 했다.

  그래서 그는 임시정부 승인 요청 서한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렇게 해주면 나중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연합국 감시 밑의 ‘자유선거’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로부터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승만을 반공주의자라고 괴롭힌 한인들

  그러한 이승만에게 닥친 보다 더 큰 문제는 미국교포들 가운데도 좌우합작(左右合作) 지지자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이들 한국인 좌우합작주의자들은 소련의 협조를 얻어서라도 독립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독립된 나라가 공산화가 되고 안 되는 것은 그 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친소-친공의 태도는 미 국무부 안에 있는 친소-친공적인 관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그들은 특별정치국장 알저 히스, 극동정치국장 존 카터 빈센트를 위시하여 핼도어 핸슨, 존 스튜아트 서비스, 올리버 에드워드 클라브 등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한국문제 담당관인 조지 맥퀸(George McCune) 박사도 있었다. 그는 평양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란 인물로서, 서북지방 출신의 안창호 계열의 흥사단 인사들과 가까웠다.

  이와 같은 한인 좌우합작파들 때문에 이승만은 미 국무부로부터 더욱 더 무시를 당했다. 이들 좌경한 일부 교포들은 이승만이 전체 한국인의 대변자가 아니라고 계속 비난했는데, 바로 그 사실을 미 국무부가 악용했던 것이다. 미 정부는 한국인들의 분열을 임시정부 승인 거부에 활용했던 것이다.
 
  그처럼 이승만에게 적대적이었던 인물들은 재미 한족연합위원회, 국민회, 흥사단, 교포신문인 <신한민보> 관계자들 속에 많았다.    그 가운데서 가장 격렬하게 이승만을 비판했던 좌파 인물이 한길수(韓吉洙)였다.

  그는 호놀루루 일본 영사관에서 정기적으로 돈을 받았던 것으로 밝혀진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거기서 얻은 정보를 미 국무부 하급 관리들에게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관심을 끌었다.  한길수는 김규식 계통의 조선민족혁명당, 중한동맹의 좌우합작 노선을 따랐기 때문에 미 국무부의 정책과도 맞았다.

  한길수는 미 국무부 관리들에게 이승만이 한국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보잘것 없는 인물이라고 폄하했다. 그리고 중경 임시정부는 몇 안 되는 늙은이들로 이루어진 사설단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헐뜯었다.

  그보다 더 이승만에게 위협적이었던 교포단체는 1941년 4월에 조직된 재미 한족연합위원회였다. 그것은 9개의 한인단체들이 호놀루루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해 결성한 한인사회 최대의 단체였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동지회도 참여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그 기구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중경 임시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이승만에게 주미외교위원부를 개조하라고 요구하면서 갈등이 일어났다.외교를 담당할 인원을 늘이라는 요구였다. 이승만은 그것을 인사 문제에 대한 간섭으로 생각하고 거부했다. 그러므로 1943년 12월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인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회를 탈퇴하게 되었다.

  그러한 이승만과 대한인동지회의 행동을 중경의 임시정부가 지지하고 나서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임시정부에 대한 보복으로 재정지원을 끊었다.


[연재]이승만시대(22) 얄타회담서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 밀약 폭로..
예언대로 소련군 재빨리 북한 점령
유엔창립총회에서 분열된 모습을 보이다
     
  그 결과로 워싱턴에는 교포들이 여러 갈래로 분열하여  별도의 조직들을 가지고 따로 따로 미국 정부를 상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는 중경 임시정부의 공식 외교기관으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1944년 6월부터 워싱턴 사무실을 열고 외교활동을 시작했다.  한길수도 1938년부터 중한민중동맹단의 외교대표와 민족혁명당 북미총지부의 외교대표로서 외교활동을 벌였다.


  1945년 4월에 유엔 창설을 위해 샌프랜시스코 회의가 열린다는 발표가 있었을 때, 여러 한인 단체들이 별도로 참가하게 될 형편이었다.  실제로 유엔창립총회 현장에는 김구의 중경 임시정부가 임명한 이승만의 임시정부대표단, 그리고 김원용,김호,전경무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임명한 이정근의 해외한족민족대표단이 모두 나타났기 때문이다.
 
얄타 밀약설을 터뜨려 세계를 놀라게 하다

  이승만은 모리스 호텔에 본부를 설치했다. 당장 시급한 것은 한국의 독립이었으므로 그것을 목표로 단결하자고 호소했다.
  모두가 찬성해 이승만은 통합한국위원회의 이름으로 회의 사무총장인 알저 히스에게 한국대표단의 옵서버 자격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부당했다.

  그때 한국인들에게 미 국무부의 좌우합작(左右合作) 노선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위해 중국 외교부장 송자문이 나타났다. 그는 한국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회의가 한창 진행중인 5월 22일에 한인 지도자들을 위한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항의 표시로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송자문의 의도에 대해 불신감을 가져온 터였다.

  그러자 ‘좌우합작’ 노선에 찬성하는 국민회 인사들이 통합 한국위원회로부터 탈퇴하고, 따로 본부를 차렸다.  그에 따라 한국인 대표단은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표단, 김원용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 한길수의 중한민중동맹단 대표단의 세 갈래로 분열되었다.  미국정부와의 관계에서 볼 때는 좌우합작을 거부하는 이승만이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승만에게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이 1945년 5월 14일에 폭탄선언으로 발표한 것이 이른바 얄타 밀약설이었다.  기자 회견에서 이승만은 유엔창립총회가 한국인 대표단의 참석을 거부한 것은 얄타 회담에서 한반도를 소련에게 넘기기로 비밀협약(秘密協約)을 맺었기 때문이라는 폭탄적인 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한 어느 소련인 망명객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유엔총회 회의장은 이승만의 선언으로 발칵 뒤집혔다.  미 국무부는 즉각 부인하는 성명서를 냈다. 그런데도 이승만이 계속 비난하자, 백악관이 직접 나서서 부인했다.  이승만 발언의 파장은 영국에까지 밀려 하원에서 의원들로부터 사실 여부를 묻는 질문이 나왔다. 답변에서 처칠 수상은 얄타에서 비밀협약은 없었지만, 많은 문제들 가운데서 “대체적인 양해”가 이루어진 것들은 있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바로 그 “대체적인 양해”가 이루어진 문제들 가운데 소련의 한반도 점령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미국정부로부터의 반박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자기의 의심이 옳다고 믿었다.  그러나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파견한 해외한족대표단은 이승만이 한국인의 대외적 신망을 추락시켰다고 비난했다.

우려했던 대로 소련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다

  이승만의 우려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저절로 확인되었다. 1945년 8월 12일부터 소련군이 북한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함에 따라, 미국과 소련 사이에 한반도의 일부를 소련에게 넘긴다는 밀약(密約)이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승만이 일본의 항복 소식을 라디오로 들은 것은 미국 시간으로 8월 14일 밤11시 워싱턴의 집에서 였다. 기쁜 마음에 교포들이 그의 집으로 달려왔다.

  그들에게 이승만은 소련의 행동에 대해 걱정했다. 미국이 일을 잘못 처리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싸우게 되어 피를 흘리게 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이승만이 우려했던 대로 치밀한 계획에 따라 빠른 속도로 김일성 정권을 세워 나갔다.  그리고는 시베리아에서 훈련시킨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내세워 공산화(共産化)를 추진했다. 그러한 경험은 소련이 제2차대전 말기에 동유럽 국가들을 점령하면서 얻은 것이었다.  소련군은 재빨리 남쪽으로 내려와 38도선에 경계초소와 진지를 만들므로써 북한과 남한의 교류를 막았다.  남북의  분단을 굳히려는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미군은 소련군 보다 거의 한 달이나 늦은 1945년 9월 7일에야 인천항을 통해 남한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사회주의자인 여운형은 공산주의자인 박헌영과 함께 재빨리 좌우합작의 성격을 띤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것은 그들이 서류상으로 급조한 정부를 미군으로부터 기정사실로 인정받으려는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주한미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그것의 승인을 거부했다. 그리고는 미 군정만이 남한 지역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선포했다.


미국, 반소주의자 이승만 귀국 방해

  이승만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한 나머지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려 했다. 그러나 국무부의 방해로 쉽지가 않았다.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처리해야 할 미국으로서는 반공주의자이며 반소주의자인 이승만이 나타나면 골치가 아플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승만이 미국 정부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올리버 박사는 그에게 미국정부의 좌우합작 정책에 따를 것을 간곡히 권유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승만은 정부 수립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좌우합작은 공산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조직이 없는 우파가 조직이 강한 좌파와 손을 잡았을 때, 우파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이오와의 시골로 쫓겨가 닭을 키우며 살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좌우합작에는 절대로 찬성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연재]이승만시대(23) 미, 이승만 귀국 막아..."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호소
좌우합작하면 공산화된다

미 국무부 좌파들에 의한 귀국 방해
 
이승만이 미 국무부로부터 얼마나 따돌림을 당했는가는 귀국 때 겪은 어려움에서 잘 알 수 있다.

  일본 항복의 소식을 듣는 순간에 이승만은 귀국하기 위해 미국 여권을 신청했다. 그러나 한반도는 군사 작전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여행 허가증을 얻어야 했다.

  이승만은 여행 허가증을 얻으려 했고, 미 국방부는 그를 위해 여행 허가증을 맥아더 사령부에 전보로 요청했다.
  그때 미 국무장관실로부터 국무부 여권과에 이승만에게 준 여권을 취소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여권에 적혀 있는 '주미한국고등판무관'이란 직위가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여권을 반납하고 그 직위를 삭제한 새 여권을 받았다.  그러자 다시 국무부로부터 이승만을 위한 수송편을 제공할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 설사 제공하게 된다 하더라도 일본의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국방부에 대해 맥아더 장군의 허가를 요청하는 전보를 쳐달라고 요청했다.  그러한 이승만의 요청에 대해 국방부는 국무부의 특별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국무부 여권과에 특별 허가를 요청했다.  그러자 여권과는 더 이상 그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이처럼 일이 복잡하게 꼬인 것을 보면 국무부 안에 분명히 이승만의 귀국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 국무부도 할 말은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한반도 문제를 놓고 소련과 협상해야 할 판에, 반공적이고 반소적인 이승만을 빨리 한국으로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 1945년 10월, 하지 중장과 아놀드 장군의 안내로 중앙청에서 귀국기자회견을 하는 이승만.
화동들이 축하 화환을 전달하기 위해 연단에 서있다.

33년만의 초라한 귀국
 
  그러므로 이승만은 해방이 된지 40일이 지난 1945년 10월 5일에야 미국을 떠날 수 있었다.그는 뉴욕의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하여 하와이, 괌을 거처 해방된지 두 달만인 10월 16일에 김포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때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같이 오지 못했다. 그녀는 3개월이나 더 늦은  1946년 1월에 가서야 시애틀에서 일본 가는 군 수송선을 타게 될 것이었다.

  이승만의 귀국은 비밀로 했다. 개인 자격이었기 때문에 단 한 명의 수행원도 없었다.그 때문에 김포 비행장에는 한 명의 환영객도 없이 몇 명의 미군들만 나왔을 뿐이었다. 미군 군용기에는 군복을 입은 사람만 탄다는 규정에 따라 이승만도 미 군복 차림이었다.

  그러나 그의 도착을 알리는 신문 호외가 나오면서 국민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도착 다음 날 아침, 이승만이 묵은 조선호텔 앞은 환호하는 군중으로 넘쳤다.  환영 인사들 가운데는 좌익들도 있었다. 명성을 지닌 이승만이 자기들이 서류상으로 급조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직을 맡아 주기를 희망하는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

  그 후 수많은 정파로부터 당수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이승만은 모두 거절했다. 그는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으려 했다. 그 자신도 정당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날 오전 이승만은 하지 중장과 아놀드 장군의 안내로 중앙청에서 기자 회견을 열었다. 외국인 기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는 영어와 한국어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10월 24일부터는 조선호텔을 떠나 숙소를 기업가 장 씨 소유의 돈암장으로 옮겼다.


▲ 귀국 후 돈암장에 머물 때의 이승만.(1945. 11) 왼편 맨 끝에 이승만의 비서 윤치영이 서있고,
 이 박사의 오른편에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 여사가 서있다. 나머지는 미군정 측에서 뽑아 보낸 경비원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에게 가장 시급했던 것은 정부를 세우는 일이었다.

국제 감각이 뛰어났던 이승만이 볼 때, 통일된 독립국가의 건설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미국에 있을 때부터 그는 강대국들이 한국인들에게 즉각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위험이 크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미국과 소련이 한국인의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일이 급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단결이 시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가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국민의 뜻을 모으기 위한 국민운동을 벌이려고 했다 한국인들이 분열되었다는 것을 세계에 보이면 강대국들이 독립을 늦추기 위한 구실로 이용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10월 23일에 65개 정당과 단체의 대표들을 모아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했다. 그것은 자기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단체들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체였다.

  이승만은  자신의 조직이 없이 개인자격으로 참여했다. 이승만은 그것을 정식 정부가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인의 의사를 미군정청에 전달하기 위한 민의기구로 생각했다.

  무엇 보다도 한국인의 단결된 모습을 강대국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일단 좌익들도 끌어 들이려고 했다.  그 때문에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기는 공산주의에 반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제정책 면에서 채택할 점이 많다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자기는 공산주의자들 가운데서 혁명을 고집하는 극렬 파괴분자들만을 거부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공산당의 박헌영, 인민당의 여운형과 접촉했다. 그에 따라 10월 31일 박헌영이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하게 되었다.    좌익들은 협조의 선결 조건으로 친일파 숙청을 요구했다. 그에 대해 이승만은 나라가 세워진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응수했다.  결국 이승만은 좌익들과의 타협이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1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직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공산당은 11월 23일 그를 비난하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탈퇴했다. 뒤이어 여운형의 인민당도 그렇게 했다.
  그 때문에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우파들만으로 구성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이름으로 11월 4일에 미 • 영 • 소 • 중 4대 연합국과 미국 국민에게 한국인의 자주독립 의지를 천명하는 ‘우리의 결의문’을 보냈다. 그것은 자유선거를 통한 조속한 정부 수립을 요망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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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9-2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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