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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친일, 친북,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교적 중립적 기록 제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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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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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자유총선거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바꾸기 위해 미국으로
   
미⦁소공동위원회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유엔 총회에서 정부수립 문제를 직접 호소해 보기 위해 미국에 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번에 기회를 놓치면 한국은 다시 긴 고난의 시기를 당하게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한국문제의 유엔 상정에 대해 우익은 대찬성이었다. 그래서 우익진영의 통합기구인 민주의원은 그에게 ‘민주의원의장 및 대한민국대표’라는 직함을 주고, 1만 달러의 여비를 보태주었다.

그러나 하지는 이승만이 자기를 제치고 워싱턴 정부를 직접 상대하겠다는 데 대해 분개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미군정의 방해로 쉽게 떠날 수 없었다. 당시 한국인들이 해외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미군이 군용기나 군함을 제공해야 하는 데, 미군정이 이승만에게 그러한 편의를 제공할 리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승만은 동경의 맥아더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맥아더는 서울로 군용기를 보냈다.

이승만은 1946년 12월 4일 김포 비행장을 출발해 도쿄에 도착했다. 맥아더는 동경에서 미국까지 군용기를 제공하려 하였으나, 미 국무부가 반대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민간항공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하와이를 거쳐 12월 7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칼튼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조속한 정부 수립을 위해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해 줄 것을 호소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정부 관계자는 어느 누구도 그를 만나 주려 하지 않았다. 그의 반공⦁반소주의는 미 국무부의 좌우합작노선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언론기관과 문서를 통해 우회적으로 정계와 일반대중에게 자신의 의지를 알리려 했다. 

  그래서 독립운동 시절의 미국인 후원자들이 그를 위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로버트 올리버 박사, 변호사 존 스태거스, 원로 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 프레스턴 굿펠로 대령,  프레데릭 브라운 해리스 목사 등이었다. 이승만에 의해 이미 민주의원 대표로 파견되었던 임영신(任永信)과 오랫 동안 구미위원부를 맡아 운영해오던 임병직(林炳稷)도 그들을 도와 열심히 뛰었다.

미국정부에 자유총선거를 제의하다

이승만이 국무부에 제출한 서한의 핵심적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남한에 일단 과도정부를 세웠다가 때가 되면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정식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것, 그리고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할 때까지 미군은 남한에 주둔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에 덧붙여 이승만은 미 국무부 안에는 공산주의 동조 자들이 있는 것 같으며, 남한의 하지 중장도 좌익들에게 유리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북한에서 소련군은 50만 공산군을 양성하고 있는 데 비해, 남한에서 미군은 전혀 그러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남한은 북한에 의해 끌려다닐 위험에 놓였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제의에 대해 미국의 여론은 호의적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은 유럽, 발칸반도, 중동에서 소련의 팽창 야욕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도 바뀌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 공감했다.

이승만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하지 중장도 1947년 2월 미국으로 갔다.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정부수립만이 한반도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 방법이라는 기존의 정책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하지 중장은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고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과정에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는 데, 그것이 이승만의 남한 과도정부 수립 주장을 정당화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1947년 3월 12일 마침내 소련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유화정책에서 강경정책, 포위정책으로 바뀌게 되는 ‘트루먼 선언’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받고 있던 그리스와 터키를 경제적,군사적으로 도우려는 의도에서 발표된 선언이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대항해 싸우는 모든 국민에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었다. 그것이 발표된 다음 날 감격한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감사의 서한을 보냈다. 뒤이어 마샬 국무장관은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의 비협조를 규탄하고 남한에서 독자적인 정부수립 계획을 추진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남한과도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그런데도 국무부 관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피점령국 담당 차관보 존 힐드링 장군을 제외하고는, 국무부의 어느 누구도 이승만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전쟁장관 패터슨을 만나려고 했을 때, 국무부 관리들은 그가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며 주한미군의 입장을 어렵게 만드는 인물이라고 자문해 줌으로써, 면담요청을 거절하도록 했다. 그처럼 미 국무부 안에는 이승만에게 적대적인 좌파 관료 세력이 강했던 것이다.

김구의 쿠데타를 막기 위해 서둘러 귀국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나자, 김구가 움직였다. 그는 미군정이 우익진영을 소외시키고 좌우합작위원회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는 데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김구는 미군정이 만든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분쇄하기 위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1947년 1월 민주의원,비상국민회의,독촉국민회 등의 우파 단체들을 모아 자주 독립 반탁운동협의회’를 열었다.

미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미군정과 충돌하지 않도록 시위를 자제할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민주의원에 보냈다. 그러나 김구는 반탁시위를 격렬히 벌이는 한편, 비상국민회의,민족통일총본부,독립촉성국민회를 통합하여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는 비상국민회의에 민족통일총본부와 독립촉성국민회를 흡수한 다음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의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명칭을 ‘국민의회’로 바꾸었다. 그리고 나서 김구는 국민의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정부로 선언하고,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이승만을 추대했다. 그리고 미국의 이승만에게는 “주권선언 시기 도래”라는 전문을 보내 그간의 상황을 알렸다.

1947년 3월 5일 김구는 미군정장관 브라운을 만나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그것에 정권을 넘겨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정청은 그것을 정권탈취를 위한 쿠데타 기도로 보고, 김구를 처벌하려 했다. 이것은 모두 이승만이 없는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이승만 계의 사람들이 김구의 행동에 반발했다.

그러자 임시정부 세력은 대표적인 이승만 지지자인 배은희(裵恩希)에게 폭력을 휘둘러 입원하게 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승만은 워싱턴에 더 머무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김구가 임시정부 세력을 주축으로 미 군정청에 대해 쿠데타를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귀국을 서둘렀다. 

또다시 미 국무부 좌파에 의한 귀국 방해
 
이번에도 국무부는 이승만의 귀국을 방해했다. 군용기를 타야 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1947년 4월 1일을 출발일로 정하고 도쿄까지의 운임으로 900달러라는 큰돈을 지불했다. 그러나 출발 전날 저녁 갑자기 국방부로부터 군용기 탑승 허가가 취소되었다는 전화가 왔다. 이승만의 귀국이 군용기를 배정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연락이 국무부로 왔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그때 마침 민간 항공사인 노스웨스트의 동경 노선 시험운행 비행기가 4월 8일에 미니애폴리스를 떠날 예정임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 지지자인 힐드링 장군은 이승만이 그 비행기를 타도록 주선했다. 그러나 하지 장군이 발행하는 한국 입국허가서는 얻지 못한 채 불안한 상태로 미국을 떠났다. 입국허가서는 국무부 소관이었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승만의 귀국을 방해한 국무부의 핵심 인물은 극동국장인 존 카터 빈센트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연재]이승만 시대(29) 미국, 이승만을 연금...소련에 굴복..."미국놈 믿지마라" 국민들 분노
이승만 지지로 돌아선 중국의 장개석
 
노스웨스트 항공편으로 동경에 도착한 이승만은 2시간 동안 맥아더를 만났다.  그리고는 장개석(蔣介石)을 만나기 위해 상해를 거처 난징(南京)으로 갔다. 장개석은 원래 김구 지지자였지만, 모택동의 공산당과 싸우게 되면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중국 대표인 유어만(劉馭萬) 공사를 통해 김구에게 이승만과 협력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다.

두 사람은 공산주의에 대한 대처 방안을 놓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는 장개석이 제공했다. 그러나 이승만을 태운 중국 비행기가 미 군정청으로부터 서울 착륙 허가를 얻는 과정에서 또 한 차례 복잡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7년 4월 21일 서울에 도착했다. 4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는 그의 귀국을 환영하는 우익진영의 성대한 국민대회가 열렸다. 그만큼 한국인들 사이에는 남한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것이다. 

그날 연설에서 그는  그동안 남한에서 총선거가 지연된 것은 하지 중장이 공산주의자들과 합작을 고집했기 때문인데, 이제는 미국이 좌우합작을 단념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남북통일 정부를 세우기에 앞서 남한과도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고집할 필요가 없이 곧바로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동안 김구가 주도하는 국민회의가 자기를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추대했는 데도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이승만은 기자회견에서 미 국무부 차관보 힐드링과 정부 수립 절차를 밟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하지 중장은 즉각 반박 성명서를 내고 미국 정부는 그렇게 합의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는 더욱 더 나빠졌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다
 
그러는 사이에 1947년 5월 21일 서울 덕수궁에서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좌익들은 대환영이었다. 그들은 곧 임시정부가 수립된다고 선전했다.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도 환영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투쟁위원회의 명의로 미⦁소공동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질의서를 보냈다.

즉, 신탁통치와 독립정부 수립은 서로 모순되는 것인데, 앞으로 그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 분명하게 밝혀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사용되는 민주주의란 말은 ‘소련식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인지,아니면 ‘미국식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결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회의는 1차 때와 마찬 가지로 꼭 같은 문제로 맴돌았다. 신탁통치 반대자들을 협의 대상에 포함시킬 것이냐 아니냐는 것이었다.  결국 그 문제에 대해서는 미군측이 양보하고 말았다. 그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이 된 개인이나 정당⦁사회단체는 모스크바협정에 반대하거나 반대를 선동할 수 없도록 했다. 즉,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면 반탁투쟁을 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미군측이 우파의 언론 자유를  제한하게 된 것은  빨리 소련군과 합의하여 한국인의 정부를 세워놓고 철수하려는 급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익은 분개했고, 이 때 “미국놈 믿지 말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이승만은 미국이 언론자유의 원칙을 포기하고 한국을 배반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김구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따라 우익학생단체인 전국학생총연맹(전학련)을 비롯해 청년단체들은 격렬한 반탁,반소 시위를 벌였다.

미군정청에 의한 가택 연금
 
그러나 우익 가운데서도 한민당과 한독당 일부 세력은, 이승만과 김구의 호소와는 달리,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했다. 그에 따라 협의대상에 포함되기 위해 신청마감일인 6월 23일까지 신청서를 낸 남한의 정당과 사회단체는 425개에 이르렀다. 그러자 소련군측은 다른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 그들 가운데서 반탁투쟁위원회에 가입해 있는 정당⦁사회 단체들은 제외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남한의 우익은 물론,중간파 마저 협의대상에서 제외시키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앞으로 세워질 임시정부의 주도권은 좌익에게 넘어 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미군측은 언론자유의 명분을 들어 소련군측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에 따라 회의는 결렬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는 동안 미 군정청은 이승만을 가택연금 상태에 두었다. 회의 진행에 방해가 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에 따라 이승만은 라디오 방송 출연은 물론, 일반인과의 접촉마저 금지되었다. 전화도 철거되고, 편지도 검열을 받았다. 미국인들도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했다. 졸지에 그는 미국의 적(敵)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에게 1947년 여름은 최악의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미 군정청이 지지하는 김규식과 여운형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좌익은 1947년 2월의 국대안반대투쟁, 2⦁27구국투쟁, 3월22일의 총파업, 7⦁27군중투쟁을 거치면서 폭력으로 나갔다. 그에 따라 남한 땅은 사공도 목적지도 없이 흘러가는 배와 같아 보였다.


[연재]이승만 시대(30) 김구, 자유총선 반대-소련에 동조...미국은 이승만 싫어해
자유총선거를 촉구하기 위한 민족대표자대회

제2차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던 1947년 7월, 이승만은 남한에서 자율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단계로서 민의(民意)에 기반을 둔 정부수립운동 단체를 만들려고 했다. 민의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과도입법의원에서 통과된 보통선거법에 따라 투표를 통해 단체를 조직함을 의미했다.  이승만은 독립촉성국민회 조직을 이용해 7월 5일부터 몇 일간에 걸친 전국적인 선거에서 한국민족대표자(대의원) 200명을 선출했다.  그 선거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은 우익진영이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민족대표자대회’는 밑으로부터 투표에 의해 선출된 대의원들에 의해 구성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임시정부 인사들이 위로부터 선정된 대의원들로 구성된 국민의회와 달랐다.

민족대표자들은 독립촉성국민회 회의실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참석한 가운데 제1회 한국민족대표자대회를 열었다. 그것은 과도정부의 조속한 수립을 촉구하는 동시에, 앞으로 그 임무를 수행할 단체는 한국민족대표자대회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장에는 배은희, 부의장에는 명제세와 박순천이 뽑혔다.

한국민족대표자대회는 조소앙이 의장으로 있는 국민의회와 통합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김구와 한독당이 남한의 자유총선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이승만도 단호한 태도를 보이려고 했다. 그래서  1947년 9월 16일 국민의회의 주석 추대를 거절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때 미 국무장관 마샬이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의 상정을 제안하는 연설을 했다는 것이 보도되었다. 우익진영은 전폭적으로 환영했다. 이승만은 그것을 계기로하여 남한의 자유총선거를 한층 더 강하게 주장했다.  뒤이어 한국민족대표자대회는 총선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그 위원회의 지방 대표들은 총선거일을 빨리 정해 줄 것을 미군정에 촉구했다.

그리고 나서 우익진영의 71개 정당⦁사회단체는 1947년 9월부터 열리게 될 유엔총회에 참석하여 한국문제에 대해 발언할 한국민족대표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10월에는 마샬 제안의 달성을 기원하는 국민대회를 여는가 하면, 총선촉진국민대회도 열었다. 11월에 이승만은 북한의 공산군이 남침을 준비한다는 보도를 언급하면서 하루 바삐 정부를 세워 국방군을 조직해야 남한의 공산화를 막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때인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유엔감시하의 남북한총선거를 결의했다. 사태는 이승만이 예견한 대로 진전되고 있었다.그 때문에 대중에게 그 동안 미국정부는 어리석었고 이승만은 선지자 같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이승만의 자유총선거안을 반대한 세력들

이승만 주도의 남한총선 관철 운동이 남한지역의 다수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방면에서 견제를 받았다.

남한의 좌익들은 총선거가 분단을 영구화시키려는 음모라고 비난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 사수를 선언했다.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 소련군측 대표 스티코프를 통해 1948년초까지 미,소 양군의 동시 철수를 제의했다. 이미 북한의 군사력을 키워 놓았기 때문이었다. 북한정권은 스티코프의 제안을 지지하는 군중대회를 연달아 개최했다.

놀라운 것은 그때쯤 해서 김구와 한독당이 이승만을 견제하는 세력에 가담하게 된 사실이었다. 그것은 미국무부가 하지 중장에게 이승만의 남한 총선거 추진을 억제하라고 지시했던 시기와 일치했다. 1947년 10월 15일 김구는 미군정 장관 브라운과 비밀회담을 가졌는 데, 그후부터 중도파와 손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김구는 마음 속으로 이승만의 민족대표자대회와 관계를 끊고, 조소앙의 남북협상론에 따라 ‘남북대표회의’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김구의 행동에 대해 근민당,조선공화당,사회민주당과 같은  중도좌파의 군소 정당들이 호응했다. 그래서 ‘남북요인회담’ 개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좌익의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도 환영했다.

1947년 11월 5일 김구의 한독당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한국에 올 것에 대비하여 근민당,민중동맹,사민당,신진당,청우당 등 10여개의 중도파 군소정당들과 합동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총선거 준비를 위해 미⦁소 양군을 즉시 철수시키고 남북정당대표자회의를 소집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김구가 소련의 주장에 동조하는 입장으로 태도를 바꾸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당황한 한민당 간부들은 김구를 찾아가 한독당이 우익진영으로부터 이탈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승만의 총선거 운동에 대한 가장 큰 견제 세력은 미 국무부였다. 당시 미 국무부는 소련이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에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내부방침을 정해 놓았으면서도, 이승만 주도의 남한총선거 관철투쟁을 억제한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미 국무부가 이승만을 싫어했다는 것은 다음의 경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민족 대표가 유엔총회에 참가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우익은 이승만을 선정하고 중도파는 김규식을 선정했을 때였다. 미국의 유엔대표 오스틴은 과도입법의원만이 대표를 보낼 자격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는 데, 그것은 이승만을 거부하고 김규식을 인정하는 발언이었다.

미국에서 이승만을 괴롭혔던 교포들도 귀국

해방이 되자 미국에서 이승만에 맞섰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인사들도 귀국해서 건국사업에 참여하려고 했다. 그에 따라 1945년 8월 15일 전경무는 미 국무부와 전쟁부에  편지를 보내 영어통역 등의 방법으로 미군정을 돕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귀국 협조를 요청했다. 미 국무부는 대환영이었다. 미국 정부에 맞서 왔던 이승만과는 달리, 그들은 샌프랜시스코 유엔창립총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 국무부에 늘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귀국이 동지회나 주미외교위원부의 대표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이루어졌던 것에 비하면, 그것은 파격적인 대우였다. 따라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국 안의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미국정부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1945년 11월 4일 14명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그들 가운데는 한시대, 김원용, 송종익,전경무,김호,정두옥 등이 있었다. 그리고는 하지 중장의 요청에 따라 정치,경제,문화,교통 등의  황에 관한 조사에 착수했고, 12월에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에서 그들은 모든 정치단체들이 김구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따라서 그 조사보고서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중심으로 모든 정치세력을 통합하려는 이승만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임시정부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좌우합작이라는 공통점이었다. 그 때문에 김구의 임시정부가 비상정치회의를 창설했을 때 한시대,김호,송종익이 참여했던 것이다.

좌파와 손을 잡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들

그러나 비상정치회의가 비상국민회의로 이름이 바뀌고 28명의 최고정치위원이 미군정의 자문기구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으로 임명되자, 김호 등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들은 반발했다. 그 단체가 우경화하고 친미적이 되었다는 이유에서 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김구의 반탁총동원위원회와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연합하여 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은 탈퇴했다. 그것은 이승만을 포함함으로써 우파 단체가 되었다는 이유에서 였다.

임시정부 중심으로한 좌우통합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1946년 4월부터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한시대,김호,전경무는 중도세력을 모아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고 했다. 미군정도 좌우합작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상황이 유리해질 듯이 보였다. 이승만이 1946년 6월 3일에 ‘정읍 발언’으로 남한의 과도 정부 수립을 촉구했을 때, 한시대는 통렬히 비판했다. 그러므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은 자연스럽게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되었다.

1946년 7월 도진호는 미⦁소공동위원회의 대표인 아놀드와 쉬티코프에게 메시지를 보내 좌우합작파인 김규식과 여운형을 돕도록 요청했다. 한시대는 좌우합작을 성공시키기 위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고 대중 강연회를 열었다. 그리고 미국의 한인 단체들로 하여금 김규식에게 격려의 전문을 보내도록 했다. 그리고는 1946년 9월에는 임시정부의 유동열,김붕준 등을 끌어들여 신진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가저 오지 못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들은 김호와 김원용만을 남기고 모두 미국으로 돌아갔다.

남은 두 사람은 하자 중장에 의해 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임명되어 적산관리문제와 민족반역자특별법을 다루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입법의원에서 제정한 조선임시약헌과 민족반역자특별법이 1946년 11월에 미군정청에 의해 거부되자, 분개한 김호와 김원용은 남북협상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1947년 5월에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북조선인민위원회와 교섭하자는 긴급 제안을 입법의원에 제출했다.

김호는 신진당 대표로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발언할 23명 대표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47년 9월 김호와 김원용은 다시 방향을 바꾸어 홍명희와 이극로의 중도파 통합운동에 가담하여 민주독립당을 결성했다. 그리고는 홍명희,이극로,박용희 등과 함께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민주독립당은 당시의 좌익들처럼 자주적인 민족통일정부 수립과 미⦁소양군 철퇴를 요구했다. 1947년 12월에 김규식을 중심으로한 중간파 정당의 연합 협의체로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자, 김호와 김원용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48년 1월에 한반도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서울에 오게 되자, 더 이상 할 일이 없게된 그들은 즉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들은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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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9-2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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