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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친일 , 친북,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교적 중립적 기록 제 10회, 종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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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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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승만 시대(31) 소련, 총선거 거부, 北 단독정권 강행
9. 대한민국은 세워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정부수립 문제가 유엔의 손으로 넘어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뒤늦게나마 미국 정부가 소련의 팽창 야욕을 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인들은 동유럽과 이란에서 소련에게 속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뒤늦게나마 미국 정부도 반소 • 반공 노선을 따르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가 내전으로 공산화(共産化)의 위험에 놓이게 되자, 미국은 1947년 3월에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경제적 • 군사적 원조를 약속하는 ‘트루먼 선언’을 발표했다. 그것은 이승만이 바라던 방향이었다. 그에 따라 미국의 대외정책이 바뀌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조짐들이 보였다.

미 군정청의 제3대 군정장관으로 임명된 윌리엄 딘 소장이 1947년 4월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이승만의 심복인 임병직을 만난 사실이었다. 미군정이 지금까지 이승만에 대해 보여 주었던 비우호적인 태도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그리고 이승만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미 국무부 극동국장 존 카터 빈센트도 물러났다.      1947년 8월 국무장관 대리 로베트는 미⦁소공동위원회와 신탁통치안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방안을 찾을 회의를 열자고 소련 • 영국 • 중국에 제의했다.

예상했던 대로 소련은 즉각 거부했다.

그러므로 새로 국무장관에 취임한 마셜은 9월 17일 앨리슨 계획에 따라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갔다. 미국이 남한에서 정부를 세우는 쪽으로 정책이 굳어졌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미국에게는 남한에 빨리 정부를 세워놓고 ‘품위있게’ 철수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때까지 남한은 주둔비가 엄청나게 많이 들면서도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지역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는 남한이 공산화되든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마침내 유엔 총회 본회의는 1947년 11월 14일 표결에서 찬성 43, 반대 0, 기권으로 미국안을 채택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유엔 감시 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해 남북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이승만이 바라던 바였다.

▲ 좌우합작을 추진한 미소공동위원회, 미군정사령관 하지(왼쪽)와 북한의 소련 군정사령관 슈티코프.

유엔임시한국위원단 안에서도 좌우합작론이 우세

유엔에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문제로 충돌했다. 미국은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세워 놓은 다음 미군과 소련군이 모두  철수하자는 것인 데 반해, 소련은 미군과 소련군을 모두 철수시킨 다음 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7년 11월 14일의  유엔총회 결의안에 표시된 임무를 수행하도록 9개국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할 것도 결의했다. 소련은 유엔의 자유총선거 결정이 불법이라고 비난했다. 

유엔은 선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서울에 파견했다.  위원단은 9개국 대표로 이루어졌지만, 공산국인 우크라이나가 참석을 거부함으로써 8개국만 오게 되었다.  1948년 1월 8일 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환영대회에는 20만의 엄청난 군중이 모였다. 그만큼 남한에서는 정부 수립에 대한 갈망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 김일성은 평양에서 개최된 군중대회에서 위원단이 북한에 한 발짝도 들여 놓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소련군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소련군사령관을 방문하겠다는 서한에 대해서도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소련의 유엔대표인 그로미코가 소련은 유엔임시한국임시위원단에 참여하지도 않고 협조하지도 않을 것임을 유엔사무총장에게 통고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
 
▲ 유엔한국위원단 단장 메논.

서울에 온 유엔임시한국위원단도 남한에서만 정부를 세우는 데 대해 호의적이 아니었다. 환영대회장에서 단장인 메논은 북한에도 애국자들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남한만을 협의대상으로 삼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것은 좌우합작, 남북협상의 가능성을 거론한 것으로서, 유엔임시한국위원단 역시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저 있었던 것이다. 분개한 이승만은 항의 표시로 대회 도중에 자리를 떴다. 그러므로 이승만을 비롯한 우파 지도자들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상대로 현실에 맞는 결정을 내려주도록 설득해야만 했다. 그 중심축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김성수(金性洙)였다.

우선 단장인 인도 대표 메논부터 설득해야 했다. 그는 나중에 소련 대사를 오랫동안 지냈을 정도로 친소적이고 친공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인도는 중립을 표방하면서 친소적인 대외정책과 사회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부단장인 시리아의 무길도 껄끄러웠다. 당시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지하는 미국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는 좌파정부나 또는 좌우합작 정부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 대표들은 소련의 편을 들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8개국 가운데서 미국과 남한 우파를 지지할 나라는 필리핀, 중국, 엘살바도르의 3개국 뿐이었다. 그러므로 남한에 정부가 세워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자유총선거를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설득시키기 위해 이승만과 김성수는 미 군정청 경무부장인 조병옥과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으로 하여금 영어 잘하는 사람들을 모아 환영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그러고는  환영대회, 환영만찬, 환영음악회 같은 행사를 열어 주었다.

▲ 시인 모윤숙.


특히 단장인 메논에게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 다행히도 문학을 좋아하는 메논이 만찬 모임에서 여류 시인 모윤숙(毛允淑)을 만나면서 문제는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문학적인 대화가 오가면서 메논의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부단장인 시리아의 무길의 태도도 바뀌기 시작했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미군 사령관과 소련군 사령관에게 자유총선거 실시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하지는 즉각 지지 회신을 보냈다. 그러나 슈티코프는 서한의 접수 여부조차 확인해 주지 않다가, 결국 유엔한국위원단의 북한 방문을 거부함으로써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북한에서 선거를 하게 되면 이미 만들어진 공산 정부가 해체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고민에 빠졌다. 북한이 자유총선거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유엔 본부와 상의하기 위해 유엔 한국위원단 단장인 메논이 뉴욕으로 갔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 포럼 대표>
[연재]이승만시대(32) 아슬아슬..대한민국 탄생 못할 뻔 했다!
유엔소총회가 남한만의 총선거를 결의
 
미국 레이크서섹스의 유엔소총회는 서울의 유엔임시한국위원단으로부터 앞으로의 활동방침에 대한 지시를 요청받고  1948년 2월 19일부터 한국문제를 토의했다. 회의장 밖에서는 임병직과 임영신이 자유총선거 실시안이 통과되도록 각국 대표들을 상대로 열심히 로비 활동을 벌였다. 소련 대표는 소총회가 유엔헌장을 위반한 것이라며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미국 대표는, 남북한 동시 총선거가 불가능하다면, 유엔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남한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에 이미 사실상의 공산정권이 세워졌으므로 남한에서도 정부를 세우기 위한 선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경우에 남한에 전체인구의 3분의 2가 살고 있으므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북한지역 몫으로 남겨두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권 밑에 있던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들은 미국의 이러한 주장에 적극 반대했다. 남한만의 선거는 분단을 고착시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캐나다는 소련과 같은 의견이었다. 유엔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권한이 없으므로 종전처럼 미소공동위원회에 맡겨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선거는 하되 정부수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엔에 보낼 한국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1948년 2월 26일 유엔소총회는 미국안을 놓고 표결에 붙여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가결했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활동 가능한 남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의한 것이다. 해방후 2년의 귀중한 시간 낭비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남한에서도 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이 보이게 된 것이다. 이승만의 또 다른 승리였다.

하마터면 대한민국이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그러나, 메논이 유엔 소총회의 결의안을 가지고 서울에 돌아왔을 때,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내부에서 격렬한 토론이 4일간이나 계속되었다. 메논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 대표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그 문제는 투표로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1948년 3월 12일 표결에 붙였을 때, 찬성 4표, 반대 2표, 기권 2표로 선거 실시안이 통과되었다. 놀라운 결과였다. 이승만과 김성수를 중심으로 한 우파 진영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찬성이 4표가 된 것은 메논의 인도가 찬성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성향의 캐나다와 호주 대표들은 예상대로 반대했다. 그렇지만 시리아와 프랑스는 다행히 반대하는 하지 않고 기권했다.

만일 인도와 시리아가 원래 예상했던 대로 반대에 가담했다면, 반대가 5표가 되어 남한 선거안이 부결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5⦁10선거가 실시되지 못해 대한민국이 세워지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좌파와 중도파의 5.10 선거 반대 운동

좌익은 선거를 못하도록 폭동 공세로 나갔다. 그리하여 1948년 2월에는 이른바  ‘2.7구국투쟁’이라는 폭력사태가 일어났다. 남로당은 몰래 지령만 내리고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공개적 선동은 좌파연합 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의해 이루어졌다. 행동은 그것의 외각단체인 전국노동자평의회(전평)이 맡았다.

좌익들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 반대, 남조선 정부 수립 반대, 미⦁소 양군 동시 철퇴, 친일반동분자 타도,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등을 요구하며 전국적인 파업을 벌였다. 그들은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전신⦁전화선을 끊고, 전신주를 부러뜨리고, 기관차를 파괴했다. 학생들도 민주학생연맹의 선동으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경찰의 대응이 강력해지자, 좌익들은 산 속으로 숨어 들었다. 그리고는 ‘야산대’라는 무장 게릴라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 이승만 박사가 하지 사령관에게 김구(가운데)를 소개하고 있다.ⓒ
그처럼 어수선한 시기에 1948년 2월 10일 김구는 ‘3천만동포에 읍고함’이라는 제목의 감동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자기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미군철수에 반대하는 우파들을 가리켜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하는 것처럼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제 김구는 우익 진영에서 좌익 진영으로 넘어 가고 있는 듯이 보였다. 

마지막 순간에 김구를 끌어 안으려 하다
 
이승만은 그러한 김구를 끌어 안으려고 했다. 김구가 협력하지 않으면 유엔소총회가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의해도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김구 설득에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중국대표로 서울에 와 있던 유어만(劉馭萬)도 가담했다. 중국정부의 장개석은 모택동의 중국공산당과 내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자기의 도움을 받았던 김구가 좌익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1948년 2월 10일 유어만은 하루 종일 이승만,김구,김규식 3거두를 여러 곳에서 만나게 함으로써 자유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에 합의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하지 중장도 이제는 김구와 김규식에게 남한만의 총선거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미 1월 13일에 미 국무부의 앨리슨이 서울을 방문해 이승만과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합의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지 중장은 2월 12일 이승만, 김구, 김규식 3거두를 그의 관저로 초청했다. 그리고는 선거 계획에 합의하여  통일된 의사를 유엔에 알리도록 설득했다. 이승만은 대찬성이었다. 그러나 김구(金九)와 김규식(金奎植)의 태도는 애매했다.

그러다가 2월 16일 두 김씨는 남북 통일정부 수립 방법을 찾기 위해 남북회담을 열자고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제의함으로써 남한의 자유총선거를 거부했다. 그들은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세워 보겠다는 결심을 내린 것이다.

그러자 이승만은 잠시 중단하고 있던 남한총선거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2월 22일의 성명을 통해, 그는 이 말 저 말 듣고 아무것도 못하고 앉았다가는 공산화하고 말 것이므로, 우선은 죽었던 나라를 한편에서라도 살려 놓아야 전체를 살릴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정계는 건국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한 번 분명히 갈라졌다. 이승만과 김성수를  한편으로 하는 우파와 김구와 김규식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남북협상파 사이에 대결 구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오래간만에 이승만, 하지 중장,미 국무부 사이에 협조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 포럼 공동대표>
[연재]이승만 시대(33) 김구, 김일성 만나 '선거 반대' 성명..공산당은 남한전역서 폭동
이승만의 집권 가능성을 우려하는 세력들

 자유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 방침이 세워졌는데도,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정부가 세워지게 되면 하지 중장은 이승만이 아닌 김규식을 권력의 자리에 앉힐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이승만의 집권을 반대한 사람들 가운데는 미 군정청의 고위 관리인 정일형 같은 흥사단 계통의 한국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승만이 독재자가 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집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지 장군을 움직여 이승만을 제압할 인물로 서재필(徐載弼) 박사를 미국으로부터 불러왔다. 그러나 서재필은 나이가 너무 많은데다가 미국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그들이 바라던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미군정의 연장을 하지 장군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1947년 9월 5일 미군정의 고위층 한국관리들로 이루어진 ‘남조선 과도정부 정무위원회’는 미군정을 연장해야 한다고 미국 정부에 요청하는 서한을 비밀리에 보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여론의 지탄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비밀로 했다. 그 때문에 그것이 제출된 사실은 두 달 후인 11월 초에 가서야 알려지게 되었다.


38선 팻말 앞에서 비서 선우진(왼쪽 끝), 아들 김신, 유중열 기자(오른쪽 끝)와 기념촬영을 하는 김구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을 만나러 38선을 넘은 김구(가운데)일행.(1948.4.19)

 1948년 3월 29일 선거인 등록이 시작되자 좌익은 남한 총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파업,시위,폭동,파괴 활동 등의 폭력행위를 벌였다. 선거인 등록을 방해하기 위해 선거사무소 습격과 방화, 선거위원과 입후보자 및 그 가족 살해, 경찰관 살해 등을 벌였다.

북한의 김일성도 남한총선거 반대 성명을 내고 군중집회를 개최함으로써 남한지역에서의 자유총선거 반대투쟁을 부채질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3월 12일 공동성명을 통해 남한만의 선거를 공식적으로 분명히 거부했다. 분단을 영구화시킬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중도파와 함께 총선거를 반대하는 ‘7거두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한 반대 운동에는 미군정의 고문자격으로 와 있던 서재필도 참여했다. 그 때문에 선거 일자가 5월 10일로 결정되었지만, 과연 선거를 치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남북협상파의 등장과 북한의 선거 지연 공작

남북협상은 이미 1947년 10월부터 중도파 정당들의 연합체인 각정당협의회에 의해 추진되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좌익들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채 중도파 정당들 속에 파고 들어가 있는 프락치들을 동원하여 남북협상을 제의하도록 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으로부터 온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들이 들어가 있던 신진당이었다.

1947년 12월, 남북협상 노선에 찬성하는 중도파 군소정당 14개가 연합하여 김규식을 의장으로하는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했다. 그것은 남한단정반대와 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할 것을 결의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좌익들의 ‘2.7구국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2월 16일에  남북협상을 제의하는 비밀서신을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냈다.  그러나 북한으로부터는 오랫 동안 회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3월 16일에야 회답을 보내왔다. 소규모의 남북지도자연석회의를 평양에서 열자는 것이었다.  두 김씨는 크게 고무되어 한독당,민족자주연맹,국민의회를 묶어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결성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김일성정권은 평양방송을 통해 4월 14일에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하니, 통일정부 수립을 논의하자고 제의해 왔다.  그리고는 5 •10 선거에 반대하는 남한의 17개 단체를 초청했다. 물론 이승만을 비롯해 우파는 북한에 초청되지 않았다. 북한의 제안은 남한의 선거를 미루기 위한 책략이었다. 남한에서 정부가 서지 못해 혼란에 빠지게 되면 혁명이나 무력남침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철수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철수를 소리 높여 요구했던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으로 가려고 하자, 이승만은 두 김씨가 김일성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라고 적극 말렸다. 사실 두 김씨와 북한정권 사이에는 사전에 회의에 관한 아무런 협의가 없었기 때문에, 평양에 가더라도 성과는 불투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낸 ‘문화인 108명 연서 남북회담 지지성명’과 같은 것이 나오는 마당에, 두 김씨가 북한으로 가지 않겠다고 의사를 번복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결국 김구는 1948년 4월 19일 북한으로 떠났다. 김규식은 건강을 이유로 이틀을 미루다가 떠났다.

남한의 정부수립을 반대한 평양 4•30공동성명

1948년 4월 20일 김구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가 그 전날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회의는 남한측 핵심인물인 김구와 김규식이 도착하기도 전에 북한의 계획대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회의 일정에 관한 아무런 협의도 없었기 때문에, 김구는 회의 3일째인 4월 22일에 가서야 처음 참석해 축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회의는 다음 날 사실상 끝났다. 북한 마음대로 작성한 일정에 대해 불쾌하게 여긴 김규식은 아예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회의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각본에 따라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때문에 남쪽의 참가자들은 당초 우려했던 대로 준비된 잔치에 참여만하는 꼴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김규식 일행은 남한에서 5⦁10선거로 세워질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된 이른바 ‘4 • 30 선언’에 서명했다. 그것은 미국과 유엔, 이승만과 김성수를 비난하면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남한 단독선거를 파탄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는 북한이 이른바 민주개혁을 통해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로 발전할 토대를 굳히고 있다고 찬양했다.

4월 30일에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모임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회담이라기 보다는 회식을 하면서 말을 주고 받는 가벼운 간담회였다.  두 김씨는 38선으로 물길이 끊긴 연백평야에 물을 다시 공급하고 전기도 계속 보내달라고 요구했고, 김일성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날인 5월 1일에는 노동절 열병식을 참관했다. 그것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까지 참여한 성대한 군사 퍼레이드였다. 그것은 놀랍도록 강해진 북한의 군사력을 남쪽 참가자들에게 보여주려는 전시 행사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5월 5일에 서울로 돌아온 두 김씨는 평양회의가 우리 민족도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성공적인 것이었다는 뜻밖의 주장을 했다.  또한 그들은 4⦁30공동성명이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했다고 찬양하는 동시에, 북한은 남한에 전기 공급을 계속하고 연백평야에 물을 원활히 공급해 줄 것을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결코 민족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 것, 즉 북한에 의한 남침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선거 강행
그러자 두 김씨 세력과 좌파 세력이 참가하지 않는 상황에서 치르게 될 5⦁10 선거는 의미가 없다는 비판이 일어났다. 외국 언론도 동조했다. 그 때문에 또다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이 상황에서 과연 선거를 강행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긴급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결론은 선거를 취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거는 강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본격적인 선거 운동이 벌어졌다. 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좌익들의 유혈 테러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미 군정청이 자유로운 선거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이유로 감옥의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풀어준 것이 문제였다. 하지 중장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오기 전에도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테러 혐의로 체포된 669명의 공산주의자들을 사면한 바 있었다. 그런데도 5 • 10 선거를 앞두고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또다시 구속된 공산주의자들의 석방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 요구에 응했던 것이다.

석방된 공산주의자들은 선전선행대나 인민유격대 같은 조직을 통해 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테러 활동을 벌였다.  그 때문에 선거 과정에서 100여명이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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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승만 시대(34) 한반도 최초의 자유민주공화국 탄생-국호 '대한민국'
10. 한반도 최초의 자유민주공화국
   
한반도 최초의 자유총선거를 통한 건국
 
1948년 5월 10일,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치렀다. 3월 17일에 국회의원선거법이 제정되어, 만21세의 모든 남녀가 선거권을 가지고 만25세 이상의 모든 남녀가 피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

친일부역자에게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친일부역자란 일본정부의 작위 보유자, 제국의회 의원, 판임관 이상의 경찰관 및 헌병보 또는 고등경찰과 밀정행위자, 중추원의 부의장과 고문 및 참의, 부와 도의 자문 혹은 결의기관의 의원, 고등관으로서 3등급 이상의 지위에 있던 자와 훈7등 이상을 받은 자들을 가리켰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친일파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한 남북협상파는 공식적으로는 선거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도파들이 개별적으로 많이 입후보했고, 또한 적지않게 당선되었다. 우익진영 입후보자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5⦁10선거는 우려했던 것보다는 평온하게 진행되었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대표들과 직원들은 전국에 흩어져 투표를 감시했다. 많은 외국기자들도 투표진행 상황을 지켜 보았다. 좌익 중심의 ‘남조선단선단정반대투쟁위원회’가 총파업과 무장폭동을 선언했기 때문에, 주한미군이 특별경계령에 들어갔다.  그러나 3만5천 여명에 불과한 경찰로는 1만 3천 800여개에 이르는 선거등록사무소를 보호할 수 없었으므로, 갑자기  향보단(鄕保團)이 조직되었다.

향보단은 지역주민의 자치적인  향토방위조직으로서 각지의 우익 정당원들과 청년단원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전국적 조직이나 중앙의 지휘부가 없었다. 그것은 선거가 끝난 10여일 뒤에 미군정의 민정장관 딘과 민정장관 안재홍에 의해 해산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투표 방해로 100명 이상이 사망했지만, 제주도의 2개 선거구를 제외하고는 선거를 무사히 치렀다. 제주도는 4⦁3사건의 연장으로 좌익에 의한 투표 방해가 계속되어 2명의 의원을 선출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거인 명부에 등록한 사람은 전체 유권자의 86%를 넘었고, 그 가운데서 92.5%가 투표했다. 높은 투표율이었다.  유권자들의 높은 투표열기 때문에 좌익의 총선거 파탄 투쟁은 그렇게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보고서도 자유가 보장된 분위기에서 5 • 10선거가 치러졌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남한 인구가 한반도 전체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므로, 북한 지역이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선거는 전체 한국인들의 의사를 대체로 반영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5•10선거에서 우파는 압승을 거두지 못했다

이승만은 동대문구갑구에서 출마했다. 등록 마감일인 4월 16일까지 그는 단일 후보였기 때문에 당선은 확실해 보였다.
 
1948년 5월 10일 동대문 갑구 국회의원에 출마한 이승만후보가 이화동 투표소에서 투표하고 있다.
유엔감시위원단 감시아래 진행된 투표소 오른쪽 위에 붙어 있는 영문 '새국가의 탄생'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마감일이 지난 후 최능진이라는 정치 지망생이 미 군정청에 나타나 이승만 세력의 방해로 200명 추천인을 못 채워 후보 등록을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북지방 출신으로 미국에 있을 때 이승만에 적대적인 재미교포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흥사단 계통의 인물로 활동했다. 해방후에 미 군정청의 경찰 간부로 있다가 상관인 경무부장 조병옥과 충돌하여 해임된 사람이었다.

미 군정청은 이승만을 일방적으로 감쌌다는 비난을 듣지 않으려고 등록시한 이후 일주일의 시간을 주었다. 최능진은  200명의 추천인을 채웠으나, 가짜 이름이 많은 것으로 들어나 결국 후보 등록이 거부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찾아가 호소했다.그러나 조사 끝에 후보 등록을 방해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회답을 받았다.

198명의 당선자를 정당 소속으로 분류해 보면 우익은 압도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우파는 독촉국민회 55명, 한민당 29명, 대동청년단 12명뿐이었다. 그에 비해 무소속은 85명, 군소정단과 단체는 19명이었다. 무소속이 많았던 것은 우익 후보들이 난립하여 경쟁이 심했고,선거를 거부한 좌익세력이 중도파 입후보자들을 은밀히 도와 주었기 때문이다. 5⦁10선거가 끝난지 일주일이 조금 지난 5월 14일 북한은, 김구와 김규식이 전했던 약속과는 달리, 남한에 대한 전기 공급을 끊었다. 연백평야에 물도 공급하지 않았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투표로 정한 국호는 대한민국

1948년 5월 31일 이승만을 포함한 198명의 당선자들은 국회를 구성했다. 일단 나라는 세워진 것이다.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독립을 찾은 것이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면서 북한에서 월남해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그리고 개화⦁ 독립 운동의 대선배인 서재필 박사에게 축사를 부탁하고, 하지 중장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또한 그는 새정부가 1919년 3 • 1운동 직후에 서울에서 세워진 한성(漢城)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임을 밝혔다. 이승만은 정부 수립을 서둘렀다. 9월에 열리는 파리 유엔 총회에서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회는 30명의 의원으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를 구성해 헌법 초안 마련에 들어갔다. 그 조직에는 유진오와 권승렬을 비롯한 전문위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는 국호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시간 토론을 벌였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독촉국민회는 대한민국을 주장했다. 그래야만 새로 세워진 나라가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점, 그리고 민주공화국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한민당은 고려공화국을 주장했다.

결국 1948년 6월 9일 표결에 부처져, 대한민국이 17표를 얻어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를 누르고 결정되었다.

[연재]이승만시대(35) 첫 총리 안된 김성수 '反이승만' 선언

내각책임제 요소가 포함된 대통령중심제
 
▲ 1948년 7월24일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는 이승만

국호가 정해지던 6월 9일,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새로 세워질 정부의 형태는 대통령중심제가 좋다고 말했다. 그것은 헌법기초위원회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중심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립촉성국민회 의원들은 대통령중심제에 동의했으나, 한민당과 무소속계 의원들은 내각책임제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는 6월 11일 내각책임제 정부형태로 결정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6월 15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도록 설득했다. 독립촉성국민회도 이승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한 것은 조선왕국의 멸망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당파 싸움에 대한 나쁜 기억때문이었다. 새 나라는 국민의 단합과 정치안정을 위해서는 어느 한 정당에 권력이 쏠리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그 위험성을 가진 것이 한민당이라고 생각했다. 이승만이 볼 때, 한민당은 자기를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세워놓고 실권을 쥐려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어떤 정부형태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승만과 한민당 가운데서 정국의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민당계가 우세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는 자기네 계획대로 내각중심제가 포함된 헌법초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려고 했다. 그러자 6월 21일 이승만은 다시 헌법기초위원회에 나타나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했다. 만일 내각책임제가 채택되면 자신은 어떠한 직책도 맡지 않고 야인으로 남아 국민운동이나 벌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한민당은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 이외의 마땅한 대통령 후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제헌헌법은 갑자기 대통령중심제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내각책임제 요소가 상당히 많이 남게 되었다. 국무총리제를 두고 국회가 인준을 하도록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헌법초안은 국회 본회의로 넘겨져 6월 23일부터 7월 12일까지 토의가 진행되었다. 당시 국회 안에는 크게 3개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최대 세력은 60여명으로 이루어진 무소속구락부였다. 그것은 대체로 중도파와 좌파성향의 의원들로 이루어졌고 내각책임제를 지지하고 있었다. 두 번째 세력은 50여명의 의원들로 이루어진 3⦁1구락부였다. 그것은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 출신의 의원들과 우파성향의 일부 무소속 의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로 해야 하지만 초대대통령만큼은 당시의 어려운 여건으로 보아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세 번째 세력은 한민당으로 내각책임제를 주장했다.

▲ 중앙청청사(구 총독부청사)에서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 왼쪽 단상에 초대국회의장 이승만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다
 
이와 같은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3개 세력은 헌법기초위원회의 의견을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7월 12일 1명의 반대를 제외한 전원 찬성으로 제헌헌법이 통과되었다. 헌법은 신생국 대한민국의 정체가 모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민주주의임을 명시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강했던 사회주의적인 사회분위기를  감안하여 경제⦁사회적 민주주의의 요소도 가미했다. 그래서 사유재산제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 재산권을 제한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근로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도 인정했다.

헌법은  7월 17일 국회에서 공포되었다. 그리고 국회는 7월 20일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했다.

미군정은 이승만이 아닌 다른 인물을 대통령에 선출되도록 공작했다. 하지만 국민과 국회의원들이 워낙 강력하게 이승만을 지지했기 때문에 공작은 먹혀 들지 않았다. 196명의 출석의원 가운데서 이승만은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것은 김구 13표, 안재홍 2표, 서재필 1표에 비하면 압도적인 것이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2차까지 가는 투표에서 이시영이 133표를 얻어 62표를 얻은 김구를 앞섬으로써 당선되었다.

▲ 1948년 8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건국내각을 구성한 이화장내 외딴 집. 그후 '조각당(組閣堂)'으로 이름 붙여지고 현판도 달았다.

1948년 7월 24일, 구슬비 내리는 중앙청 광장에서 73세의 노인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사에서 그는 여러번 죽었던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아 감격스럽기도 하고 책임감으로 두려운 생각도 든다는 말로 취임사를 시작했다. 또한 그는 새 나라 건설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새 백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우리 민족은 부패한 예전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새 길을 찾아 분발해야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다시 회복해서 세계문명국들과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경고했다. 우리 조국을 소련의 종노릇 시키기 위해 반역 행동을 하게 되면, 온 겨례가 원수로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건국세력의 분열

정부수립국민축하대회, 즉 정부수립 선포식을 8월 15일로 정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내각을 구성해야 했다. 무엇보다 국무총리 임명이 급했다. 국무총리 후보로 한민당은 김성수, 독립촉성국민회는 신익희, 한독당과 좌파 성향의 무소속 세력은 조소앙을 밀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북한에서 월남한 이윤영 목사를 지명했다. 이윤영은 지역적,당파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국가의 이익을 앞세울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북한동포를 배려한다는 홍보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이윤영은 국회에서 인준을 받는 데 실패했다.
 
▲ 고려대학교 설립자인 한민당 당수 인촌 김성수의 동상.(고려대구내)

▲ 동아일보 사주인 인촌 김성수는 건국내각에서 한민당이 홀대받자 이승만정권에 반대세력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두 번째 후보로 이범석을 추천했다. 그에 대해서도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이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거부하면, 정부수립선포일이 가까워 오고 있는 데다가, 건국초기부터 정치적 위기를 일으킨다는 비난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국회는 그를 인준해주었다. 그에 따라 8월 4일까지 모든 각료가 임명될 수 있었다. 새 나라의 정부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건국에 공로가 컸던 한민당은 자기 정당에 배정된 각료가 김도연 재무장관 1명 뿐인데 대해 크게 실망해 있었다. 따라서 그 당수인 김성수는 야당으로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 세력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것은 건국세력이 분열되는 순간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신생국의 앞길을 어렵게 만들 위험이 있었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 포럼 대표>
[연재]이승만시대(36) 김구 '인민군 내려오면 없어질 나라' 대한민국 무효화운동

남북협상파의 5.10선거 무효화 운동
평양에서 돌아 온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회의가 실패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 기간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6월초에 북한측이 평양에서 제2차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열자고 제의했을 때, 두 김씨는 거부했던 것이다.

▲ 평양에 간 김구(왼쪽)를 안내하는 김일성.(1948.4.)

그런데도 두 김씨는 5.10선거를 계속 비판했다. 선거가 끝난 직후에 김구는 선거가 자유롭지 못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고 비판했다. 그런가 하면, 제헌국회가 열린 자리에서 국회의장인 이승만이 그 국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말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기자가 질문하자, 김구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대답했다.  즉, 1919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의 대한민국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신생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는 김구와 김규식의 태도에 당황한 것은 장개석의 중국정부였다. 장개석은 독립운동 기간에 자기가 도와 준 임시정부 세력이 해방후에 세워질 새로운 나라에서 집권하기를 희망했다. 게다가 장개석은 모택동의 공산당과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김구와 김규식은 자기를 도와 반공전선에 서 줄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한 장개석의 뜻을 받은 중국공사 유어만(劉馭萬)이 1948년 7월 11일 김구를 방문해 이승만의 건국에 협조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한 권유에 대한 김구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자기가 이번에 북한에 가서 보니 공산군은 남한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가 강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소련은 마음만 먹으면 남한을 공격해 쉽게 인민공화국을 선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남한에 정부가 세워져도 곧 인민공화국이 되고 말 것이므로 건국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 점에서는 김규식도 생각이 같았다.
 
그러므로 두 김씨는 건국 무효화 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벌이기 위해 7월 21일에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했다. 당시 두 김씨는 명성을 지닌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이 신생국 대한민국에 미칠 영향은 적지 않았다.  두 김씨는 통일국가의 건설을 희망하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 때문에 북한의 정부수립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비난이 북한정권에게는 아무 타격을 주지 않고 그들이 살고 있는 남한정권에게만 타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국가의 탄생을 세계에 알리다
 
새로 태어난 대한민국은 해방 3주년이 되는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정부 수립 국민 축하대회를 열었다. 일본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부부도 참석했다. 경축 행사가 시작되기 전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어깨를 안고 한국이 북한의 공격을 받게 되면 캘리포니아를 지키듯 방위에 나설 것이라는 감격적인 말을 했다.


축사에서 이승만은 제일 먼저 북한 지역의 대표들이 참석하지 못한데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고 있음을 뚜렷이 밝혔다. 새 나라는 양반 계급만을 위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평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 제도를 구현해 갈 것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양반과 상놈, 부자와 빈자, 남자와 여자,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이 모두 똑같이 대우받는 평등주의의 나라가 될 것임을 언명했다. 따라서 이제는 모든 사람이 균일한 기회와 권리를 가지고, 개인의 신분을 존중하고, 노동을 우대하며, 법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게 보호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것은 나중에 일민주의(一民主義)라는 이름으로 표현될 내용이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뿌리가 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말부터 마음 속으로나마 서양의 민주주의 국가의 방식을 모방하여 공화주의의 사상과 관습을 조용히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 동안 개신교회 안에서 민주주의적인 방식이 뿌리를 내려 온 사실을 지적한 것이었다.  또한 신생 대한민국은 국민 스스로가 자기들을 위해 세운 자기들의 정부라는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이 정부는 소련군이 방해하는 북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실시된 총선거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승만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므로,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권리 장전’의 이름으로 보장하고 있는 언론과 집회,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보호할 것임을 강조했다.
 
▲ 노동자와 농민을 사랑한 서민기질의 이승만. 한복차림 대통령.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도 인정한 자유주의자

그러면서도 이승만은 당시의 시대적 요청을 감안하여 사회민주주의에서 나타나는 복지 입법을 약속했다. 그는 농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법에 따라 농지개혁을 시행할 것을 약속했다. 그 목표는 소작제도를 철폐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농민에게 자주성을 부여하고 생산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은 지주에 대한 적당한 가격이나 현물보상의 방식으로 농민에게 분배하는 유상매수⦁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를 것이라고 했다. 노동자에 대해서는 헌법의 정신에 따라 “이익균점의 권리”를 인정하고 사회보험제도를 실시할 것을 약속했다.

▲ 농지개혁법 공포를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1949년5월22일) ⓒ네이버

실제로 이승만은 노동자와 농민의 처지에 아주 동정적이었다. 그 자신이 가난한 선비집안에 태어나 어렵게 자랐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독립운동할 때도 항상 가난한 교포들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자기가 늘 선동가로 살아 왔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 때문에 나중에 1951년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 명칭을 노농당(勞農黨)으로 할 것을 지시했던 것이다. 당시는 6⦁25전쟁 중이었으므로 공산당과의 혼동을 염려하여 그러한 당명이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그 자신의 체질은  그처럼 서민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의 집권기간에 노동자를 위한 사회보험은 착수조차 못했다. 나라에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있는 재원도 6•25전쟁으로 파괴되고 그것을 복구하는 데 사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에 대한 농지개혁의 약속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혁명적인 변혁은 한민당을 비롯한 보수 세력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포럼 대표>
[연재]이승만시대(37) 김구, 유엔의 한국승인 반대...대표단, 통곡의 승리!

파리 유엔 총회에서 승인받기 위한 안간힘
정부 수립이 선포는 되었지만, 미국은 즉각 승인하지 않았다. 유엔 총회에서 한국 승인 문제의 결과를 보아 가면서 승인할 예정이었다. 그 때문에 존 무초를 대사가 아닌 ‘특사’로 파견했다. 따라서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의 최우선 과제는 1948년 9월 21일부터 파리에서 열릴 제3차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을 정식으로 승인을 받는 일이었다.

파리 유엔총회에 파견된 대한민국 승인요청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모윤숙, 조병옥, 장면, 김활란. 뒷줄 왼쪽부터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준구

그러나 승인 전망은 불투명했다.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은 물론, 영국 중심의 영연방 블록도 반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우선 급한 대로 8월 5일에 조병옥을 특별사절로 미국에 파견했다. 그리고 8월 11일에는 장면을 수석대표로하는 유엔대표단을 출발시켰다.

카톨릭 신도인 장면을 단장으로 선정한 것은 바티칸을 비롯해 유럽과 중남미 카톨릭 국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대표단에는 김활란, 장기영, 모윤숙, 정일형 등이 포함되었다. 미국의 올리버 박사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남한만의 정부 수립에 반대해 오던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의 승인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두 김씨는 8월 1일 김규식을 단장으로 한 ‘통일독립촉진회’ 유엔 대표단을 조직했다. 유엔에서 대한민국이 승인되면 분단이 영구화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김일성 만나러 평양에 간 김규식(왼쪽 두번째)과 김구
두 김씨의 대안은 유엔총회가 남,북한의 두 정권 대신 임시정부를 승인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김씨는 우선 중국에 있던 서영해를 선발대로 파리에 파견했다. 그러나 별도의 유엔 대표단 파견 계획은 무산되었다. 왜냐하면 대표단장이 된 김규식이 한국인의 분열상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 출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파리에 갔던 서영해는 북한으로 가고 말았다.

그후 김규식은 조소앙과 함께 대한민국 비판을 삼가면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김구는 계속해서 남,북의 두 정권을 부정하고 외국군 철수를 요구함으로써, 끝까지 민족주의자의 명분을 지키려 했다.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유엔의 승인을 얻다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대표단은 58개국 대표들을 일일이 접촉하면서 대한민국의 승인을 호소했다. 신생국의 경험없는 한국대표들에게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소련 외무인민위원 비신스키를 비롯한 공산 진영의 대표들은 한국 승인 문제를 회의 의제에 올리지조차 못하게 방해했다. 소련 대표는 입에 담지 못할 험악한 욕설로 한국 대표단을 비방했다.

한국에서 들려오는 국내 뉴스도 대한민국의 승인에 불리한 것들이었다. 제주 4⦁3사건으로 알려진 폭동이 10월초에 다시 터지는가 하면, 10월 19일에는 여수 주둔 14연대의 좌익 군인들과 그에 동조하는 일부 시민들에 의한 여수⦁순천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여수-순천 반란사건

그 때문에 <뉴욕타임스> 지는 서울의 미국 관리들이 대한민국은 완전히 붕괴 직전에 놓여 있다고 본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신생 대한민국은 살아 남을 것 같지 않은 인상이었다.

또한 1948년 10월 13일 국회에서는 40여 명의 좌파 또는 중도파 성향의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미군 철수안을 제출했다. 그리고 11월 3일에는 김구가 미⦁소 양군이 물러나게 한 다음 남,북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 메시지는 유엔 사무총장에게도  전달되었다.

김일성(왼쪽)과 박헌영
이러한 국내 뉴스들은 모두 파리 유엔총회에서 공산 진영 대표들이 대한민국 승인을 방해하기에 아주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파리의 한국 대표들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각국 대표들은 자가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가 끝나는 대로 속속 귀국하고 있었다. 특히 성탄절이 가까워오자 모두가 귀국을 서두르는 분위기였다.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한국 대표들은 발이 닳도록 각국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심야회의가 열릴 때는 새벽 2시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피곤하다며 뿌리치는 대표들을 붙잡고 설득했다.
한국 대표들의 힘겨운 노력이 성과가 있어서 유엔 총회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인 1948년 12월 12일 일요일 오후 3시에 회의가 소집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기 위한 표결이 이루어졌다. 표결 결과는 찬성 47표 반대 6표로 대한민국의 승리였다. 마침내 유엔은 대한민국의 적법성을 선언하고, 대한민국 권위가 전 한반도에 미친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신생국의 험난한 앞길

신생국 대한민국은 국제적으로 승인은 받았지만, 그 앞날은 험난하기만 했다. 경제는 사실상 마비상태 였다. 일본 경제의 한 부분으로 유지되어 오던 한국 경제는 해방으로 일본 경제와의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파행을 면치 못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 경제와의 관계도 갈라졌기 때문이다.

국민은 1인당 연간 국민소득이 60 달러 미만으로 가난했고, 문맹률이 80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무지했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귀국하는 동포들, 그리고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피해 북한으로부터 38선을 넘어 온 월남민들로 길거리는 실업자로 넘쳤다.

그렇다고 국가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을 정도의 뚜렷한 정강을 가진 확고한 정치세력도 없었다. 서로 다투기만 하는 정파들만 득실거릴 뿐이었다. 국회에 무소속 의원들이 유난히 많았던 사실이 그러한 혼란상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자치와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조차도 대부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 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갖 태어난 신생국을 혁명(革命)으로 무너뜨리려는 공산주의자들의 테러 활동이었다. 도처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 일어나고, 산간지대에서는 게릴라가 준동했다. 그들 가운데는 북한에 가서 강동정치학원을 졸업한 뒤 다시 남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공산당 반란군의 양민학살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이승만은 신생국을 이끌고 나가야  했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낯선 ‘해양문명권’에서 온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체제를 정착시켜나가야 했다.

그러므로 외국인들 가운데는 이 신생국이 얼마 가지 못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웬 래티모어 같은 미국의 좌파 지식인은 한술 더 떠서 대한민국은 금방 무너질 것이며, 또 그렇게 되를 바란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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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9-2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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