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 군주란 “고귀한 자가 가장 우둔하고, 비천한 자가 가장 총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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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 군주란
어머니를 “반혁명분자”로 고발해 죽게한 홍위병
당시 안후이성 구전(固鎭)현에서 소학교를 막 졸업한 12세의 한 소년은
“쑹야오우”의 혁명정신에 큰 자극을 받았다.
소년은 즉시 본명을 버리고 장홍빙(張紅兵)으로 개명했다.
붉은 병정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로부터 3년 6개월 후, 1970년 2월 13일 밤, 16세의 홍위병 장홍빙은
모친 팡중모(方忠謀, 1926-1970)를 ‘반혁명죄’로 고발했다.
곧바로 무장한 군인들이 몰려와 모친을 트럭에 짐짝처럼 싣고 가버렸다.
이후 장홍빙은 군중의 틈에 섞여 인민법정의 재판관이 모친의 판결이
선독(宣讀)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사형에 처한다! 즉각 집행!”
두 달이 채 못돼 모친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향년 44세.
소년의 모친 팡중머우는 1949년 해방 이전 간호병으로 인민해방군에 참가했다.
기초 보건지식만 갖고 의료현장에 투입됐던 이른바 “맨발의 의사(赤脚醫生)”였다.
1965년엔 구전현 병원의 문진(問津)부 부주임을 역임했는데,
문혁이 시작되자 곧 남편이 주자파로 몰려 비투(批鬪)당하면서
온 집안은 고난의 급물살에 휩싸였다.
1968년 5월부터 시작된 청리계급대오(淸理階級隊伍, 1968-1969) 운동은
흔히 “3천 만을 타격하고 최소 50만에서 최대 150만을 학살했다”는
최악의 전체주의적 테러였다.
그 시기 팡중머우는 “특무(特務, 특수간첩)”혐의의 지주분자로 몰려
구금 상태에서 날마다 문초당해야만 했다.
1950년대 초 그녀의 부친이 지주계급으로 분류돼 숙청됐다는 이유였다.
1970년 2월 13일, 장홍빙은 모친의 낡은 수첩에 적힌 “고귀한 자가
가장 우둔하고, 비천한 자가 가장 총명하다”는 어귀를 발견했다.
이 문구는 그 당시 마오쩌둥이 직접 인용해서 널리 회자됐었는데,
장홍빙은 모친에게 소리쳤다.
“팡중머우!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 마오 주석을 폄하하려는 건가?”
격분한 모친은 류샤오치는 무죄라 주장하며 격렬하게
마오쩌둥의 인격숭배를 비판했다.
아들이 반혁명행위라며 무섭게 질책하자
그녀는 마오쩌둥의 초상화까지 들고 와선 불태워버렸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
그녀는 난생처음 담배를 물고 뻑뻑 피웠다고 한다.
장홍빙은 그날 밤 직접 모친의 반역행위를 고발했다.
먼 세월이 지나서야 변호사가 된 장홍빙은 문혁 당시 혁명의 광열에 휩싸여
스스로 씻지 못할 중죄(重罪)를 저질렀음을 깨닫고 통곡했다.
당시 장홍빙의 양친 모두 반동분자의 혐의를 쓰고
수난을 겪고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문혁이 고조되면서 지주나 부농 집안 출신의 홍위병들은
더더욱 과격한 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성분(成分)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그들은 더 극단적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대깨문이 되기위해 더욱 극렬한 행동을 보이는 행위와 비슷>
당시 상황에서 친모를 반혁명분자로 고발하는 행위는
혁명성을 표출하는 극단의 조치였다.
출신 성분을 만회하려는 한 소년의 처절한 처세술이었다.
*<좌경화된 좌파들의 처절한 처세술과 일맥 상통>
하늘땅이 크다 해도
당(黨)의 은혜처럼 크지 못하지
양친부모가 가깝다 해도
마오주석처럼 가까울 순 없지!
마오쩌둥 사상은 혁명의 보배
누구든 그를 반대하면 우리들의 적!
마오쩌둥은 “대원수 스탈린”을 이어서 지상에서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전 인류의 절대 “계몽군주”가 되길 염원했지만,
인격숭배와 테러정치를 일상화한 그의 통치는 반(反)계몽의 극치였다.
하물며 전체주의 세습전제정의 잔악무도한 폭군임에랴.
"자유 민주화의 꽃은 시련은 있겠지만 반드시 피어난다, 시련이 많을 수록
더욱크고 아름답게 피어난다"
2016년 5월 31일 문혁 발발 50주년을 맞아 중국의 봉황위성방송(鳳凰衛星視)
“차갑고도 따뜻한 인생(冷暖人生)”에 출연해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죄를 참회하는 < 장홍빙씨>
어머니를 “반혁명분자”로 고발해 죽게한 홍위병
당시 안후이성 구전(固鎭)현에서 소학교를 막 졸업한 12세의 한 소년은
“쑹야오우”의 혁명정신에 큰 자극을 받았다.
소년은 즉시 본명을 버리고 장홍빙(張紅兵)으로 개명했다.
붉은 병정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로부터 3년 6개월 후, 1970년 2월 13일 밤, 16세의 홍위병 장홍빙은
모친 팡중모(方忠謀, 1926-1970)를 ‘반혁명죄’로 고발했다.
곧바로 무장한 군인들이 몰려와 모친을 트럭에 짐짝처럼 싣고 가버렸다.
이후 장홍빙은 군중의 틈에 섞여 인민법정의 재판관이 모친의 판결이
선독(宣讀)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사형에 처한다! 즉각 집행!”
두 달이 채 못돼 모친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향년 44세.
소년의 모친 팡중머우는 1949년 해방 이전 간호병으로 인민해방군에 참가했다.
기초 보건지식만 갖고 의료현장에 투입됐던 이른바 “맨발의 의사(赤脚醫生)”였다.
1965년엔 구전현 병원의 문진(問津)부 부주임을 역임했는데,
문혁이 시작되자 곧 남편이 주자파로 몰려 비투(批鬪)당하면서
온 집안은 고난의 급물살에 휩싸였다.
1968년 5월부터 시작된 청리계급대오(淸理階級隊伍, 1968-1969) 운동은
흔히 “3천 만을 타격하고 최소 50만에서 최대 150만을 학살했다”는
최악의 전체주의적 테러였다.
그 시기 팡중머우는 “특무(特務, 특수간첩)”혐의의 지주분자로 몰려
구금 상태에서 날마다 문초당해야만 했다.
1950년대 초 그녀의 부친이 지주계급으로 분류돼 숙청됐다는 이유였다.
1970년 2월 13일, 장홍빙은 모친의 낡은 수첩에 적힌 “고귀한 자가
가장 우둔하고, 비천한 자가 가장 총명하다”는 어귀를 발견했다.
이 문구는 그 당시 마오쩌둥이 직접 인용해서 널리 회자됐었는데,
장홍빙은 모친에게 소리쳤다.
“팡중머우!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 마오 주석을 폄하하려는 건가?”
격분한 모친은 류샤오치는 무죄라 주장하며 격렬하게
마오쩌둥의 인격숭배를 비판했다.
아들이 반혁명행위라며 무섭게 질책하자
그녀는 마오쩌둥의 초상화까지 들고 와선 불태워버렸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
그녀는 난생처음 담배를 물고 뻑뻑 피웠다고 한다.
장홍빙은 그날 밤 직접 모친의 반역행위를 고발했다.
먼 세월이 지나서야 변호사가 된 장홍빙은 문혁 당시 혁명의 광열에 휩싸여
스스로 씻지 못할 중죄(重罪)를 저질렀음을 깨닫고 통곡했다.
당시 장홍빙의 양친 모두 반동분자의 혐의를 쓰고
수난을 겪고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문혁이 고조되면서 지주나 부농 집안 출신의 홍위병들은
더더욱 과격한 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성분(成分)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그들은 더 극단적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대깨문이 되기위해 더욱 극렬한 행동을 보이는 행위와 비슷>
당시 상황에서 친모를 반혁명분자로 고발하는 행위는
혁명성을 표출하는 극단의 조치였다.
출신 성분을 만회하려는 한 소년의 처절한 처세술이었다.
*<좌경화된 좌파들의 처절한 처세술과 일맥 상통>
하늘땅이 크다 해도
당(黨)의 은혜처럼 크지 못하지
양친부모가 가깝다 해도
마오주석처럼 가까울 순 없지!
마오쩌둥 사상은 혁명의 보배
누구든 그를 반대하면 우리들의 적!
마오쩌둥은 “대원수 스탈린”을 이어서 지상에서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전 인류의 절대 “계몽군주”가 되길 염원했지만,
인격숭배와 테러정치를 일상화한 그의 통치는 반(反)계몽의 극치였다.
하물며 전체주의 세습전제정의 잔악무도한 폭군임에랴.
"자유 민주화의 꽃은 시련은 있겠지만 반드시 피어난다, 시련이 많을 수록
더욱크고 아름답게 피어난다"
2016년 5월 31일 문혁 발발 50주년을 맞아 중국의 봉황위성방송(鳳凰衛星視)
“차갑고도 따뜻한 인생(冷暖人生)”에 출연해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죄를 참회하는 < 장홍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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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10-05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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