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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찾아가는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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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유럽 이끌고 난민 포용한  동독출신 총리 앙겔라 메르켈

시인 만나러 외진 시골 찾기도

뿌리깊은 휴머니즘이 원동력그녀 있게한 건 `교양시민층`


입력 : 2021.10.23 00:04:03댓글 0

독일문학이 주업이다 보니 독일이 뭐가 좋으냐는 질문을 심심찮게 받는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웠던 시절에는, 무얼 하든 주어진 사회 규칙만 지켜나가면 다들 무리 없이 사는 것이, 또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도무지 표나지 않는 것이 부럽다고 대답했다. 우리 사회의 이념대립, 진영갈등이 유난히 심한 대목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이야기하고 또 하고, 그러다 자기 쪽에서 상대방의 의견을 수긍하게 되면 이의 없이 승복하는 토론문화가 부럽다고 대답했다. 독일 사회를 좀 더 깊이 알게 되면서부터 더해진 대답 하나는 자주 되풀이한다. 괴테, 실러, 베토벤, 모차르트도 부럽지만 더욱 부러운 건 그런 이들이 '있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아껴주고 키워주는 사람들 없이 어찌 그런 인물들이 존재하겠는가. 학문과 문화를 이끌어가는, 그 두터운 소위 '교양 시민층'이 지금도 여전히 부럽다.

그런데 실은 한 가지가 더 있다. 총리다. 대통령은 의전을 맡고 덕담을 해가며 사회 통합을 지켜가는 반면, 옷소매 걷어붙이고 욕도 먹어가며 일에 매진하는 총리는 흔히 4년 임기를 연임함은 물론, 심지어 네 차례씩이나 선출되면서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용한다. 그 바탕 위에서 예컨대 '통일' '유럽연합' 같은 굵직한 국가적·세계사적 안건들이 실현돼가는 모습이 나는 부러웠던 것이다. 오랜 분단 끝에 독일이 통일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동독 출신 여성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로 선출됐을 때, 그 부러움은 극대치였다(우리는 언제 통일이 돼보며, 된다 한들 그 비슷한 일이 상상이나 되는가).

절정에서 스스로 퇴임을 결단했고, 이제 후임자를 기다리는 시간의 마지막 마무리 행보들도 놀랍다. 많은 터키인이 독일에 살고 있건만 특유의 이슬람 체제로 관계가 늘 껄끄러웠던 터키를 굳이 방문했고, 이미 기회마다 수도 없이, 끝도 없이 사죄를 표했던 사람들이 있는 곳, 이스라엘을 또 다녀왔다. 한 번 더 사죄하기 위하여. 지금 이 시각에도 마지막으로 유럽연합 정상회의에 참석하여 이웃 폴란드와의 껄끄러운 문제를 풀고 있다. 공산독재에 맞서는 시민 운동이 벌어지자 대학을 뛰쳐나온 메르켈이라는 양자 화학자, 그에 앞서 종교와 사람이 억압당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탈출하던 공산독재국가를 굳이 찾아 국경을 넘은 목사님의 딸. 그 뿌리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휴머니즘은 현실정치 한가운데에서도 늘 발현되었고, 그 강력한 추진력의 기저였다고 요약될 것이다. 그런 메르켈 총리의 또 한 면을 읽을 기회가 개인적으로 있었다.

내가 독일에 작은 한옥 정자를 한 채 지어놓은 일이 있는데, 세상에 그 바쁜 사람이 거길 다녀갔다(천안에서 지어서 헐어서, 일산에서 소독 포장하고, 부산항을 출발하여 북독일 브레머하펜항으로 갔고, 거기에서 독일 동남쪽 끝 도나우강변으로 가서 다시 세웠다). 그렇다고 작은 정자 하나를 보러 온 건 아니고, 그 정자가 선 곳에 사는 시인을 찾아온 것이었다. 아주 잠깐 났을 귀한 시간에 총리 내외가, 시인을 만나러 외진 시골마을을 찾았다는 건 놀랍기만 했다. 총리는 대학 시절 그 시인의 시를 읽었다고 한다. 오전 11시에 와서 오후 4시가 넘어서야, 푸틴과의 전화 약속 때문에 자리를 떴다고 한다.

남아 있는 사진 속, 작은 정자 앞에 선 메르켈 총리 내외와 시인의 모습을 자주 들여다본다. 내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것도 아니건만, 그녀의 그 힘 있는 휴머니즘의 또 한 면을 엿본 것 같다. 시에 담긴 섬세하고 올곧은 마음을 끝까지 잊지 않는 사람인 것. 정치인은 모델이 아니고 일하는 사람이라는 듯, 16년을 고집해 입던 늘 거의 똑같은 옷, 그야말로 작업복 차림인 그녀, 그러나 독일인이 보내는 최고의 찬사 '무티(엄마)'를 받는 그녀는 오래도록 사랑과 존경으로 기억될 것이다. 메르켈도 부럽지만, 그런 총리를 있게 한 사람들 참 부럽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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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1-10-2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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