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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장군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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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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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善燁 장군 서거 1주기/ 한국 현대사의 거인과 기자의 20년 취재동행기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

⊙ 주한미군사령관들, “백선엽 대장의 전설은 계속 이어질 것”
⊙ ‘살아있는 영웅’을 욕보인 나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내푯말조차 없어
⊙ 화날 때 오히려 존댓말하며 자기 절제하는 외유내강형 군인
⊙ 가장 존경하는 미8군 사령관은 밴 플리트…밴 플리트는 ‘한국군 건설의 아버지’
⊙ 숙군 공로자는 이승만-백선엽-김창룡… 백 장군의 숙군 공로 재평가해야

백선엽(白善燁‧1920~2020) 장군이 돌아가신 지 7월 10일로 꼭 1년이 됐다. 6‧25전쟁영웅이자 창군(創軍) 원로인 백 장군의 별세 1주기를 맞아 한미동맹재단(회장 정승조 전 합참의장)과 주한미군전우회(회장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는 지난 7월 9일 경북 칠곡 다부동에 있는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추모행사를 열었다.

지난주 취임한 폴 러캐머라 신임 한미연합사령관이 첫 공식 외부일정으로 이 행사에 참석한 것을 비롯해 전직 한미연합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 7명과이 영상 등으로 추모 메시지를 보내왔다. 전‧현직 주한미군 최고 수뇌부 8명이 전례 없이 한국군 전쟁영웅을 기리고 있음에도 불구, 국방부나 국가보훈처는 정부차원의 공식 추모행사를 열지 않았다.

지난 7월 9일 경북 칠곡호국평화기념관에서 열린 백선엽 장군 1주기 행사에서 맏딸 백남희씨는 “우리 후손들이 아버지를 위대한 인도주의자, 명장, 헌신적인 애국자로 우러러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조선일보DB

1950년 8월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30세의 청년 사단장 백선엽은 후퇴하는 부대원을 가로막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며 전세를 뒤집었고, 국군 최초로 평양에 입성했다. 백 장군은 1952년 7월 최연소(32세)로 제7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엔 만 33세의 나이에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로 참가했고, 195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이듬해 5월 예편했다. 그는 한미동맹의 토대를 닦았으며, 한국군 최초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두 차례나 받았다.

미군은 백 장군 생전 그를 한미동맹의 상징이자 ‘살아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예우했다. 2018년 11월 서울 용산구 국방컨벤션에서 주한미군이 주관하는 백 장군의 백수 생일파티가 열렸을 때, 정경두 당시 국방부장관과 로버트 에이브럼스 당시 한미연합사령관, 박한기 합참의장,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 등이 참석했었다. 그날 해리스 미 대사가 무릎을 꿇고 백 장군께 인사를 하는 장면은 한국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우리의 영웅은 미국과 정반대로 ‘헌신짝’ 취급하고 있다. 현 여권 일각에서는 백 장군이 일제강점기 만주국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기록만을 부각해 그를 ‘독립군을 토벌한 친일 군인’으로 매도해 왔다. 한술 더 떠 지난해 7월 민주당 김홍걸 의원을 중심으로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발의해 백 장군과 김백일(金白一) 장군 등의 현충원 파묘(破墓)를 주장하고 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 대사가 2018년 11월 주한 미군이 주관해 서울 용산구 국방컨벤션에서 열린 백 장군 생일 파티에서 백 장군을 무릎 꿇고 맞이하는 모습. 사진/조선일보DB

“한미동맹과 함께라면…”
백 장군 추모 메시지를 보내온 이들은 로버트 랩슨 주한미국대사 대리를 비롯, 빈센트 브룩스, 존 틸럴리, 토머스 슈워츠, 버웰 벨, 제임스 서먼, 월터 샤프, 커티스 스캐퍼로티 예비역 대장 등이다.

벨 전 사령관은 “저는 항상 백선엽 대장을 미국의 조지 워싱턴 장군에 비유해왔다”며 “워싱턴 장군은 미국이 자유를 찾는 데 기여한 존경받는 고위 군사 지도자였고, 백 장군이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켜낸 지도자인 것과 같다”고 했다. 틸럴리 전 사령관은 “백 장군님은 이 위대한 나라와 위대한 사람들의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절대적인 애국자였다”며 “백 장군은 한국인의 사랑을 알려준 미군(美軍)의 전우였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영결식 조전(弔電)에서 “백선엽 대장은 영웅, 외교관, 애국자, 친구, 조언자였다”며 “백선엽 대장의 전설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한 바 있다.

한편, 1주기 추모식에서 백 장군의 장녀 백남희(白南熙‧73) 여사는 칠곡 호국평화기념관에서 열린 ‘백선엽 장군과 한미동맹’ 특별강연에서 “한국은 이제 혼자서도 강하지만, 한미동맹과 함께라면 한국은 더욱 더 강하다고 말씀하셨다”며 “(생전에) 아버님은 칠곡군 주민들의 헌신과 희생에 깊이 감사하셨고, 자신의 추모행사가 이 역사적인 곳에서 열린다는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안내 팻말 하나 없는 묘소

기자가 백선엽 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4월이었다. 그 이후 백 장군과 함께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군사영어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 자리, 부산 감천리 5연대 자리, 대구 제19전구지원사령부, 원주 1군사령부 등의 창군 현장을 동행했다. 그리고 다부동과 파주 등 6‧25전쟁 전적지를 다니면서 20년 가까이 백 장군의 증언을 취재하며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백 장군은 6‧25전쟁 발발 직전 남침 징후를 파악하고, 기자의 고향인 파평산(해발 495m) 아래 2~3부 능선에 진지를 구축한 현장을 돌아보며 그 현장이 아직도 온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지난 6월 20일 일요일날 오후 4시 무렵, 기자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백선엽 장군을 찾아뵀다. 대전 유성구의 신선봉과 두리봉이 호국영령들의 묘소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정문에서 백선엽 장군 묘소를 찾으니 “장군 제2묘역으로 가라”며 묘소 위치 안내장에 붉은색 사인펜으로 위치를 체크해주었다. 제2 장군묘역은 현충탑을 중심으로 오른쪽 방향 300여m 거리에 있었다. 백 장군 묘소로 가는 방향에 ‘천안함 46용사 묘역’ ‘제2연평해전 전사자 묘역’ ‘한주호 준위 묘소’라는 안내 팻말이 보였으나, 백 장군 묘소를 표시한 팻말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 맨 앞열 왼쪽에서 여덟 번째 묘가 백 장군 묘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 장군이 계시던 전쟁기념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실를 찾을 때면 “어서오세요, 인티미트 프렌드(Intimate Friend)!”라며 평안도 사투리 짙게 묻어나는 인사를 우렁차게 건네시곤 했는데, 이날도 무덤 속에서 “어서오세요”라고 기자를 반기시는 것 같았다. 백 장군을 보좌하는 이왕우(李旺雨‧63) 보좌관(예비역 대령, 육사 37기)은 6‧25전쟁 당시 한국군 장성들이 입었던 것과 같은 미군 전투복을 구해 수의(壽衣)로 입혀드렸고, 다부동 볼링앨리, 화천 소토고미, 행주 나루터, 남원중학교, 주문진 백사장, 봉일천 둑방, 파평산 진지 등 백 장군님이 싸우신 주요 전적지의 흙을 채취해 뿌려드렸다.

전국 각지의 흙 묘소 주변은 백 장군님 성묘객들이 정성껏 꽂아놓은 조화로 가득했다. 조 쉘렌(Joe Shellen)이라는 외국인이 ‘In Honour of Our Hero(우리의 영웅을 기리며)’라는 놓아둔 조화는 누군가의 발길질에 바닥에 꽃이 부서진 채 흩어져 있었다.

청주에서 교사로 일하는 조승배(48)씨는 고교생 자녀들과 함께 백 장군 묘소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조씨는 “대전현충원 홈피에 백 장군님이 ‘친일파’로 올라있는 등 백 장군님이 잘못된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오명을 쓰고 계신다”며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했다. 그의 아들 수아(18)군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 속 인물들의 평가가 달라진다”며 “백선엽 장군님이 6‧25전쟁이라는 국난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공적만은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야무지게 이야기를 했다.

밀번 미1군단장과 평양점령 직후 작전을 협의하고 있는 백선엽 장군. /조선일보DB

“부하들을 뺨 한 대 때린 적이 없다”
백선엽 대장이 6·25전쟁 당시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다부동 전투는 세계 전쟁사에 등장하는 테르모필레 전투와 흡사하다. 이 전투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1세를 비롯한 300 용사가 마케도니아 해안의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을 막다가 전원 옥쇄(玉碎)한 역사적 사건이다. 테르모빌레는 영화 ’300′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부동이 돌파되면 임시수도 대구가 적 포화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고 부산까지 밀려 남한 전역이 적화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다부동의 전략적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백 장군은 건군(建軍)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3년1개월2일17시간을 전장(戰場)에서 보냈다. 6·25전쟁 기간 중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 한미동맹의 초석을 닦고, 사단을 증편하고 야전군을 건설한 ‘한국군 현대화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은 그의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에서 “한국군 발전의 모든 공로는 휴전회담 조인 당시 16개 전투사단을 지휘한 젊은 백선엽 대장에게 주어져야 한다”면서 “나는 그가 정직함과 용기, 그리고 훌륭한 직업적 능력을 가졌으며, 동시에 항상 팀플레이를 하는 인물임을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2002년 9월, 다부동 전투 취재를 위해 백 장군을 모시고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현장엘 갔다. 6·25 당시 30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전투를 지휘했던 그가 다부동 전적기념관 광장에 있는 구국용사충혼비(다부동 전투에서 1사단 2234명 전사)에 분향하고 충혼비에 새겨진 이름들을 어루만지는 것을 보았다.

백 장군은 “축구에서는 개인기 못지않게 팀워크가 중요하잖아요. 전쟁에서도 기습은 두세 번 이상 써먹을 수가 없거든. 기리니끼니 팀워크가 중요해요”라고 특유의 평안도 사투리로 말했던 기억이 난다. 백 장군은 “나는 전쟁 기간 중 부하들을 뺨 한 대 때린 적이 없다. 나는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며 역경을 넘겼다”며 “무엇보다 지휘관은 자제할 줄 알아야 이기는 전쟁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 6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은 필자가 백선엽 장군 묘소에 참배하는 모습. /오동룡

“대장 아버지”

주위에서는 백 장군님을 ‘6·25 전쟁 영웅’으로 이야기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꼴로 문안 인사를 드렸던 기자에게 그는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그의 인간적 면모는 그가 전쟁 기간 중 고아원을 설립한 일에서 드러난다. 백 장군은 1951년 7월 시작된 휴전회담에 한국군 대표로 참석했다. 정치적 담판이 지루하게 이어질 때, 그에게 지리산 공비토벌의 책무가 주어졌다.

낮에는 국군 쪽에 밤에는 공비 쪽에 야합한다고 파악되는 이른바 ‘통비(通匪‧비적과 내통함)부락’이라 점 찍히면 그대로 불태우는 수밖에 없었다. 백 장군은 통비가 될 수밖에 없는 사정에 먼저 착안했다고 한다. 살아남기가 절체절명인 백성에게 이념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불태워버렸던 마을의 주민들을 먼저 찾아 무릎을 꿇고 빌었고 피해 복구도 약속했다. 군이 아낀 경비로 현지 지방정부도 참여시켜 마을 재건을 서둘렀다. 전후 지금껏 그가 토벌한 지역에서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은 것도 그의 주도면밀한 대민작전 덕분이었다.

수도사단과 8사단을 거느린 백선엽의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연말에 대대적인 작전을 폈칩니다. 그 결과, 생포내지 투항한 빨치산만도 무려 7000명에 달했다. 그들을 광주와 남원에 설치한 포로수용소에 수용했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떠돌자 백 장군은 송정리에 적산가옥을 수리해 고아원을 세워 아이들도 거두었다. ‘백선 육아원’이 그렇게 생겨났다. 1988년부터는 천주교 대구교구 수녀회가 맡아 ‘백선 바오로의 집’이란 이름으로 정신지체아동을 돌보는 시설로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70세가 넘은 전쟁 고아들은 장군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년 전쟁기념관을 찾아 “대장 아버지”에게 생일선물과 케이크를 선물하며 흘러간 세월을 이야기하곤 했었다.

2008년 1월 31일 백선엽 장군이 건군 60주년 취재를 위해 필자와 함께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위치한 감리교신학대학을 찾아 군사영어학교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오동룡

“경험과 지식 남김없이 주고 가련다”

백선엽 장군과 6‧25전장에서 함께 싸운 분들은 백 장군님을 부를 때, 반드시 “백 대장님”이라고 부른다. 1953년 1월 31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국군 최초로 별 넷을 다는 백 장군에게 “원래 우리나라엔 임금이 대장이고 신하는 대장이 없어. 지금은 리퍼블릭(공화국)이니 자네가 대장이 된 걸세”라는 말을 한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첫 대장을 단 백 장군은 그만큼 상징성이 큰 인물이었다.

백 장군은 생전 아침 8시면 전쟁기념관에 있는 6․25전사편찬자문위원장실로 출근했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과 일본의 군 관련 인사들의 예방 일정들이 화이트보드에 빼곡했다. 이왕우 보좌관은 “강연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건강 때문에) 만류를 하지만, ‘내 머릿 속에 있는 경험과 지식은 남김없이 전해주고 가련다’며 기꺼이 초청해 응하신다”고 했다.

백 장군은 골프를 비롯해 특별히 하는 운동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규칙적인 생활 습관 때문이었다. 한 번은 건강검진 체크에서 “의사가 장기는 60대 노인 정도라고 했다”고 자랑하시는 것을 들었다. 지금은 없는 미 8군 영내의 양식당 ‘카민스키’의 특대 소꼬리탕을 장정(壯丁)들보다 더 빨리 드시는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적이 있었다.

용산 기지 내 호텔인 ‘드래곤 힐 라지’에서 식사할 때면 백 장군은 서빙하는 음식보다 야전처럼 뷔페를 즐겨 드셨다. 접시를 든 채 미군 장교들과 함께 차례를 지켜가며 음식을 챙겨 오시는 것이다. 스테이크나 햄버거는 절반을 손수 칼질한 다음, 기자와 보좌관에게 놓아주며 “많이 드세요”라고 하시며 캐나다 대사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1960년대 후반, 캐나다 초대 대사를 하시면서 캐나다로 이민하려는 독일 광부와 간호사들이 국내 규정 때문에 비자 발급이 불허되자 장군께서 본인 책임 하에 비자를 내주신 일, 캐나다 교민들을 대사관저로 불러 음식을 대접하느라 사모님(노인숙 여사)과 장녀(남희)에게 ‘취사병 노릇’을 많이 시켰다는 말씀도 들려주셨다.

2007년 10월 24일 전쟁기념관 군사편찬자문위원장실을 찾은 필자에게 백선엽 장군이 언론을 통해 나라에 충성하라는 의미의 ‘언론보국(言論報國)’ 휘호를 전달했다. /오동룡

화날 때는 존댓말로

백 장군은 ‘자기 관리’에 철저한 분이었다. 백 장군은 맹호출림(猛虎出林)의 평안도 기질처럼 “성미가 대단히 급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평안도 출신인 채병덕 육군총장도 대표적으로 급한 성격”이라고 말씀하셨다. 고 이세호(李世鎬‧육사2기) 전 육군참모총장의 말에 의하면, 백 장군은 기분이 좋으면 반말을 하지만, 기분이 언짢으면 부하에게도 경어(敬語)를 쓰는 특성이 있다고 했다.

1959년 2월 국군 28사단에서 우리 군 최대의 항명사건이 발생했다. 훈련 시범 문제로 서정철 28사단장과 다투던 81연대 1대대장 정구영 중령이 권총으로 사단장을 쏜 사건이다. 당시 백선엽 참모총장은 이세호 33사단장을 호출했으나, 이 사단장은 중간에 박병권 6관구사령관을 만나 점심식사를 하고 느긋하게 총장방에 들어갔다가 혼쭐이 났던 것이다.

백선엽 총장이 이세호 사단장에게 “부대에서 몇 시에 출발하셨지요?”라고 묻자, 이 사단장은 “아뿔싸, 평소 동생처럼 편하게 대하시던 총장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구나!”고 대번에 느꼈다고 한다. 백 대장은 “지금 이 시간부터 이 장군은 28사단장이야. 33사단은 걱정 안 해도 돼. 즉시 떠나시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만큼 자기 절제를 하는 것이지요. 그 때문에 백 장군님은 ‘야전형’ 이미지보다 평양사범을 졸업한 ‘자애로운 스승’의 모습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토머스 밴달 주한미8군사령관,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 백선엽 예비역 대장(왼쪽부터)이 2017년 4월 25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 미8군사령부의 월턴 워커 장군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용산 미군기지는 워커 장군 동상을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했다. /오동룡

“군인으로 일생을 마치고자 합니다”

1952년 7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은 소위 부산 정치파동의 여파로 이종찬(李鍾贊) 육군참모총장이 돌연 해임하고 후임에 32세의 백선엽을 임명했다. 육군 정보국장으로 약 1년간 근무한 것을 빼곤 일선 지휘관 경력만 가진 백선엽은 중앙부서의 참모총장직은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동숭동의 미 8군사령부를 찾아가 59세의 밴 플리트 사령관에게 이임 식사를 하며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참모총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밴 플리트는 “말을 많이 하지 말라. 대신, 참모와 예하 지휘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어려운 일에 봉착하더라도 조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하룻밤 잔 다음 결정을 내려라. 예스와 노를 분명하게 하라. 사람들 앞에서 절대 화를 내지 말라”고 했다고 들려주었다. 백 장군은 밴 플리트의 조언에 따라 전쟁을 치르면서 수없는 결단의 순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1956년 5월 25일 대선에서 야당 신익희(申翼熙) 후보의 돌연사로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이 굳어졌으나, 이기붕(李起鵬), 장면(張勉) 간 부통령 선거 와중에서 대구선거부정사건이 터졌다. 이 때문에 김형근(金亨根) 내무장관이 사퇴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1군사령관이던 백선엽을 불러 “내무장관을 맡아달라”고 했다. 당시까지 1955년 육본 관리부장 김일환(金一煥) 중장이 예편과 동시에 상공장관으로 입각한 전례를 제외하고는 군인이 바로 입각한 사례는 없었던 시절이었다.

뜻밖의 제안에 백선엽 장군은 “각하, 저는 군인으로 일생을 마치고자 합니다.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라고 했다. 가족과 상의한 백 장군은 이 대통령께 “군에 계속 복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 대통령은 섭섭한 표정으로 “그리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 직후 백선엽 장군은 군 수뇌부 인사개편에 따라 39개월에 걸친 1군사령관직을 마치고 다시 두 번째 육군참모총장에 부임하게 된다. 만약 내무부장관을 덥석 받았다면, 4‧19혁명으로 백 장군의 운명이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백선엽 장군은 인사(人事)에 철학이 있는 분이었다. 백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이 말년에 가신(家臣)을 챙기다가 폐해가 생기는 것을 보고 총장 시절 자기 인맥을 심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고 장우주(張禹疇‧육사3기) 장군이 지은 《국격의 그림들》(글마당)에 보면, ‘백선엽 참모총장이 대령급 이하 인사는 모든 것을 일임해 양심을 걸고 하라’는 취지로 적고 있다. 특히 공비 토벌을 위해 백야전사령부를 조직하면서 1군단장 시절 항명(抗命)에 가까운 반발을 했던 송요찬(宋堯讚) 당시 수도사단장을 발탁해 데려가기도 했다. 성격이 왈각달각해도 자리에 앉혀 놓으면 부하들을 “죽인다, 죽인다”하면서 잘 통솔한다고 말씀하셨다.

2015년 7월 12일 위승호 국방대 총장은 백선엽 장군에게 제1호 명예군사학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위승호 당시 국방대 총장(중장)은 축사를 통해 “국방대에서 제2, 제3의 백선엽을 배출하겠다는 뜻도 있다”고 학위수여 의미를 설명했다. 이날 학위수여식에는 백 장군이 미8군 명예사령관인 점을 고려, 버나드 샴포우 미8군 사령관도 참석했다./국방부 제공

래티피케이션이 무슨 뜻일까
백 장군은 2010년 무렵부터는 서도(書道)에 심취했다. 그의 사무실에는 백 장군의 도량과 군인으로서의 기개를 알 수 있는 액자가 2개 걸려 있었다. 하나는 “배를 삼킬 만한 큰 고기는 작은 물에서 놀지 않는다(탄주어불유지류‧呑舟魚不遊支流)”라는 열자(列子)의 글이고, 또 하나는 ‘즐풍목우(櫛風沐雨)’다. “바람으로 머리칼을 빗고, 빗물로 목욕을 한다”는 십팔사략(十八史略)에 전하는 성어로, 전형적인 야전군인의 모습을 표방한 글귀다. 백 장군은 그만큼 포부가 컸고, 그 포부 속에서 군을 지휘했던 기개 높은 ‘대장군(大將軍)’이었던 것이다.

2011년 10월 한미 FTA 미국 비준이 완료됐을 때, 백 장군은 6·25 전쟁 때 영어 단어를 몰라서 애를 먹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맥아더 원수(元帥)를 네 차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세 차례나 만났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하고, 중국어 구사도 가능한 백 장군이 영어 단어 하나 때문에 애를 먹었다니!

내막은 이렇다. 당시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백선엽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1953년 5월 6일 오전 10시, 백악관 집무실에서 수행원을 배석하지 않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단독으로 만났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면 아이젠하워는 배석자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젠하워는 “한국 정부와 국민이 휴전을 반대하는 뜻은 잘 알고 있으나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것이 나의 선거 공약이며, 우방인 영국과 여러 동맹국들이 3년씩 전쟁이 이어지니까 휴전을 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연합군이 휴전을 하면 국군을 유엔군에서 분리해 단독으로 공산군과 싸우겠다는 결심이었다. 백 총장은 “한국 국민들은 안전보장을 위해 미국의 방위조약(Mutual Defense Pact)을 원한다”고 요청했다. 아들뻘의 한국군 참모총장의 당돌한 요구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아시아 국가와 방위조약을 맺는 것은 드문 경우”라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상원의 래티피케이션(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아이젠하워의 주선으로 스미스 국무차관을 만나 한미 방위조약 문제를 협의했고, 1953년 11월 한국과 미국은 역사적인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당시 백 장군은 아이젠하워가 ‘ratification(비준)’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하길래, ‘뭔가 중요한 말인 것은 알았지만 정확한 뜻을 몰랐다’며 호텔방에 돌아와 서둘러 사전을 찾았다고 한다. 그제서야 ‘대통령이 상원의 비준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었구나’라고 무릎을 쳤다는 것이다.

백 장군은 ‘shuttle(정기 왕복 차량)’이란 말도 1950년 평양진격 때 알게 됐다고 한다. 1950년 미 1기병사단과 평양 선점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백 장군의 1사단에 배속된 미 포병대가 탄약 운반차로 보병과 포병 병력들을 번갈아 실어나르는 ‘패튼 전법’을 구사하면서 “셔틀”이란 말을 쓰는 것을 듣고 그 단어의 뜻을 알게 됐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이 아우인 백인엽 전 6군단장(왼쪽 끝)과 함께 미 8군 영내 하텔하우스에서 오찬을 하고 포즈를 취했다. 왼쪽 두 번째가 필자, 맨 오른쪽이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이다. /오동룡

“한국은 왜 그런 분을 명예원수로 추대하지 않는가”
2010년 6·25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이해 국방부는 대대적으로 행사를 펼쳤고, 미국도 정전 60주년 행사를 워싱턴 한국전참전비 앞에서 정부 주관으로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했었다. 미국 관계기관에서 이 행사에 백선엽 장군을 초청했다.

그 무렵, 기자가 잘아는 한 외신기자가 “백선엽 장군이 명예원수가 됐느냐”고 물어왔다. 그 기자는 백 장군의 명예원수 추대 논의가 한창인 2009년말 서울특파원에서 귀국했기 때문에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기자가 “명예원수 추대는 사실상 물건너 갔다”고 말해주었더니, 그는 “한국은 왜 그런 분을 명예원수로 추대하지 않는가”라고 의아해 했다.

백 장군 명예원수 추대는 예전부터 예비역 단체들을 중심으로 나오다 2009년 ‘6·25전쟁 기념사업회’가 출범하면서 14개 핵심사업에 포함시켰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국군기무사령부는 군 원로들과 현역들의 의견을 수렴해 김태영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했고,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보고했다고 한다.

당시 김종태 기무사령관(전 새누리당 의원)은 “명예원수 추대는 백선엽 장군 개인의 명예로 끝나지 않고 6·25전쟁 참전자들의 자긍심과 국민들의 안보의식도 올라갈 것”이라고 보고했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은 “청와대가 나서는 것보다 군 원로 문제이기 때문에 국방부에서 처리하라”고 했다. 이것이 명예원수 추대가 꼬이게 된 발단이었다.

공을 넘겨받은 국방부는 6·25전쟁 60주년을 1년 앞두고 검토한 결과, “전시에 현역 대장을 국무회의 의결 및 국회동의를 거쳐 원수로 임명할 수 있다”고 돼 있어 명예원수 추대로 가닥을 잡았고, 국무회의를 거쳐 대통령령(令)으로 명예원수를 추대하는 쪽으로 선회하게 된다.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통해 대통령령으로 처리하면 되었을 것을, 국방부가 법률검토를 하는 바람에 문제가 불거졌던 것이다.


‘한국군 건설의 아버지’ 밴플리트 미 8군사령관이 백선엽 장군과 정일권 장군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포즈를 취했다. /조선일보DB

명예원수 추대 무산의 내막

6·25전쟁 기념일이 임박한 시점에서 국방부는 일부 예비역들의 반발에 부딪쳤고, 급격히 추진동력을 상실했다. 극소수의 예비역들이 “백 장군이 6·25전쟁을 혼자 다 한 것처럼 돼 있는데 부하장병의 공도 크다”는 논리를 폈던 것이다. 광복회도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 부담이 가중됐다.

이미 2009년 11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백 장군을 올렸다. 1942년 만주국 소위 임관 이래 1943년부터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세력(독립군)을 탄압했다는 것이었다. 백 장군 측은 “팔로군과의 소규모 전투는 있었으나, 광복군과의 전투를 한 사실은 전혀 없다”며 “항일세력 탄압은 사실무근”이라고 법적으로 대응하려 했으나, 백 장군의 만류로 위원회측에 이의를 제기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했다.

이때부터 국방부는 좌파단체까지 가세해 일제히 ‘흠집내기’에 나설 경우, 백 장군이 봉변을 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고, 김태영 장관은 “명예원수 추대가 참으로 어렵다”며 “미국은 없는 영웅을 만들기도 하는데, 우리는 영웅을 비하(卑下)하니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했다고 한다. 백 장군은 국방부로부터 이 사실을 통보받고 “군과 국가에 봉사한 걸로 만족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러시아·독일 등 몇몇 국가에서는 주로 전시에 원수가 배출됐지만, 우리나라엔 없다. 북한에선 김일성이 대원수로, 김정일·이을설이 원수로 불린다. 원수(元帥)란 군인으로서 입신(入神)의 경지에 든 경우를 말한다.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독일의 에르빈 롬멜,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존 조셉 퍼싱,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등이 그에 해당한다.

백선엽 장군 1주기를 맞아 재향군인회, 성우회 등 예비역 단체들과 예비역 장성들은 백선엽 장군에 대한 정부 차원의 기념관 건립과 사후 명예원수 추대를 숙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향군인회 한 관계자는 “군의 기강해이로 국민적 실망을 안기는 시점에 국가안보를 위해 헌신한 노 장군의 삶을 통해 군심(軍心)을 결집하고, 국격(國格) 제고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당시 60주년 행사를 앞두고 국방부에 백선엽 장군을 비롯해 밴 플리트·월턴 워커 8군사령관, 김종오 6사단장 등 복수 인사를 추천한 적이 있다”며 “한사람을 추대하는 것보다 한미(韓美)가 함께 싸운 전쟁이라는 차원에서 6·25 전쟁영웅을 추대하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했다.

2019년 11월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사진 왼쪽)이 마이클 빌스 8군사령관과 함께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한국 나이로 100세 생일을 맞은 백선엽 장군과 함께 셀카를 찍고 있다./주한미군 SNS

‘한국군 건설의 아버지’ 밴 플리트

백선엽 장군은 자신이 만난 6‧25전쟁 영웅들 가운데 밴 플리트(1892~1992) 미 8군사령관을 가장 존경했다. 1951년 5월 17일부터 일주일간 벌어진 ‘현리전투’에서 중공군 1개 대대 병력에 의해 국군 3군단이 전면 붕괴되는 일이 벌어졌다.

밴 플리트 장군은 국군 3군단의 작전 실패에 따른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한국군 재건과 발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그는 3년1개월간의 6·25전쟁 중 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2년간을 미8군사령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마치 한국군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국군 2군단을 재창설하는 등 한국군의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백 장군은 그가 미군 장성 중 보병전술에 가장 조예(造詣)가 깊고, 군 육성과 훈련에서 1인자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가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은 우리 군의 교육과 작전능력 향상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사단 집중훈련, 미 17개 병과학교에 한국군 장교 유학, 제주도·논산에 사병 양성 훈련소를 설치하는 등 한국군의 전반적인 작전능력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또 장기적인 안목으로 미국의 웨스트포인트에 해당하는 4년제 육사를 만들었고, 1960년 3월 31일 육사에 자신의 동상이 세워진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했다. 백 장군은 생전 기자와 함께 육사를 방문해 구석에 처박혀 먼지가 풀풀 날리는 밴 플리트 동상을 보고 혀를 끌끌 차던 기억이 난다.

 한국군에 대한 밴 플리트 장군의 열정과 창의적인 노력은 모두 그의 다양하면서도 오랜 군사 경험에서 비롯됐다. 밴 플리트는 제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쟁영웅이었다. 1차 대전 때는 미6사단 기관총 대대장으로 참전해 2개의 은성무공훈장을 받았고, 2차 대전 때는 보병연대장으로 참전해 1년도 안 돼 군단장까지 고속 승진한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었다.

 장군으로 진급한 밴 플리트는 제90주방위군 사단장, 제23군단장, 제2지원사령관, 그리고 제3군단장을 역임했다. 그 후 그의 그리스 경력이 우리와 연관된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의 제의로 1948년 군사외교관으로서 그리스 내 공산반란군 진압과 그리스군 재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밴 플리트의 그리스 게릴라 토벌 경험은 한국에서 빛을 발한다.

2019년 11월 중순 조선일보 신년 특별기획 '文武 100년의 대화'를 위해 용산 전쟁기념관 군사편찬자문위원장실을 찾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왼쪽)가 백선엽(오른쪽) 장군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조선일보DB

한국전쟁 중 실종된 밴 플리트 아들

그는 지리산 일대의 공비(共匪)토벌 임무를 백선엽 장군에게 맡겼고, 공비토벌 부대의 명칭은 미8군 작전명령서에 따라 ‘백(白)야전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로 명명했다. 토벌부대 명칭을 개인 이름으로 정한 것은 한국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 그를 한국전선의 미8군사령관에 임명한 것도 그의 이런 경험과 탁월한 전투 경험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밴 플리트는 6·25전쟁 중에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겪었다.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외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2세(애칭 지미) 중위가 1952년 4월 4일 야간폭격 작전에서 행방불명이 됐던 것이다. 그 다음날인 4월 5일, 화천 북방 소토고미리(小土古味里) 경비행장에서 국군 2군단의 재창설식이 있었다. 백 장군은 식(式)에 참석한 밴 플리트 사령관이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밴 플리트를 위인(偉人)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그의 부인도 사흘 만에 비행기편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백 장군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억누르고 2군단사령부 의장대를 사열하던 그녀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밴 플리트도 아들이 사라진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백 장군이 1군사령관 시절인 1958년, 밴 플리트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원주의 1군사령부를 방문했다. 밴 플리트 여사는 마릴린 먼로를 닮은 미인이었다. 백 장군은 문득 시신조차 찾지 못한 아들 생각에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밴 플리트는 1953년 육군대장으로 퇴역한 후, 플로리다주에 머물면서 농장경영과 부동산 회사를 운영했다고 한다. 1992년 100회 생일 축하연 이후 만성 감기증세로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돼 그해 9월 23일 ‘충혈성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백 장군은 그가 한국군과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알아준 상관이자 전우였다고 평가했다. 초컬릿과 말린 과일을 좋아해 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그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백선엽의 ‘숙군’ 재조명 해야

지난 6월 23일 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김충배 상임대표) 주관으로 ‘6‧25, 끝나지 않은 전쟁,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나?-왜 백선엽 장군을 친일파로 매도하는가’라는 세미나가 프레스센터에서 있었다.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는 ‘6·25 전쟁과 좌익의 트로이목마 전술’이란 발제에서 “6·25전쟁을 지나치게 군사적인 측면에서 바라봄으로써 군인이 아닌 좌익세력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제외됐다”며 “그 바람에 남한 내 좌익들은 전쟁기간 중의 민간인 학살 책임을 면하고, 오히려 민간인 학살은 주로 군경(軍警)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오인하게 만들었다”고 의미 있는 주장을 펼쳤다.

창군 과정에서 ‘선서’만으로 장병들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좌익이 쉽사리 군 내부에 침투해 6‧25 직전 국군의 50%가 좌익에 감염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기원과 진실(The Peninsular Origins of the War, 1945~1950)’의 저자인 존 메릴 전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실장은 여수 순천 반란사건을 ‘축복으로 바뀐 비극’이라고 평가했다. 훈련된 수많은 우익청년들이 숙청된 장병들의 자리를 메웠고, 그 결과 군사력이 급속히 증강됐기 때문이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서 발생한 국군 제14연대 반란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에서는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숙군(肅軍)을 단행한다. 이에 따라 육군본부 정보국에서는 특별수사과를 설치하고 1949년 1월 예하에 15개 파견대를 설치해, 1949년 1월 20일부터 숙군에 착수했다.

숙군은 6·25전쟁을 전후해 모두 7차례에 걸쳐 1677명의 좌익분자를 색출 처리했다. 숙군은 전쟁 이전에 4차례에 걸쳐 실시됐고, 전쟁기간을 거쳐 김창룡 특무부대장에 의해 1954년까지 3차례 더 숙군을 단행했다.

숙군은 대한민국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숙군은 대한민국을 구했고, 국군을 세계가 인정할 만큼의 대표적인 반공군대로 탈바꿈시켰다는 것이다. 숙군의 과정에서 보여준 백선엽, 김창룡(金昌龍)), 이응준(李應俊), 김안일(金安一), 빈철현(賓哲顯)) 등의 활약은 대한민국을 구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숙군의 가장 큰 공로자는 이승만 대통령과 백선엽 정보국장 그리고 김창룡 특무대장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백선엽 장군을 다부동 전투의 영웅으로만 추앙할 것이 아니라, 그를 숙군의 책임자로서 대한민국을 구한 인물로 기려야 할 것이다.

숙군에 참여했고,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역임했던 이세호 장군은 “숙군이란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6·25와 같은 대참변이 발생했다고 상상한다면, 대한민국은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의 늪에 빠졌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정희 구명

백선엽 장군은 그의 저서 《군과 나》에서 “숙군작업 과정에서 옥석(玉石)이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업은 사상적으로 혼미에 빠진 국군을 ‘자기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거쳐 소생시켰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1949년 초, 숙군의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구명(救命)을 백선엽 장군이 주도한 것도 역사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백선엽 장군을 떠나보낸 지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살아있는 영웅’을 몰라보고 소홀하게 보내드린 허전함이 크다.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의 말처럼, 백선엽의 전설이 계속될 수 있도록 앞으로 기념사업과 명예원수 추대작업 등 백선엽 재평가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다.⊙
추천 1

작성일2021-10-30 10:40

진리님의 댓글

진리
https://www.hani.co.kr/arti/area/chungcheong/954303.html
“백선엽은 조작된 영웅” 참전군인이 말한다


“백선엽은 조작된 전쟁영웅입니다.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박경석(88) 예비역 준장은 단호했다. 육사생도 2기 출신으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야전을 두루 거친 노병인 그는 백선엽씨가 전쟁영웅이 아니라고 했다. 19일 오전 대전 유성 자택에서 만난 박 장군은 “백선엽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없다. 백선엽 가족은 그의 주검을 가족묘지로 이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백선엽이 일본군 장교로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며 항일독립투사를 체포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를 했고, 여기에 더해 한국전쟁사를 왜곡해 스스로를 영웅으로 만든 위선자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백선엽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1사단장이었으니 공적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법적으로도 장군은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죠. 그런데 그의 행적을 보면 장군의 명예를 누릴 자격이 없어요.”

그는 “백 장군이 예편 뒤 자청해 30여년 동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자신과 채병덕 총참모장 등 일본군 출신 군인들 중심으로 한국전쟁사를 미화했다”며 그 예로 백씨를 전쟁영웅으로 만든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를 들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의 제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해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낙동강 전선은 월턴 워커 중장이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 등 8개 사단을 지휘해 워커 라인으로 불렸다. 백선엽의 제1사단은 8개 사단 가운데 하나였는데 공적이 부풀려졌다”고 했다. 일부를 전체로 과장했다는 얘기다.

박경석 장군이 대대장 시절 당시 강재구 대위 등 중대장, 소대장 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강 대위는 이 사진을 촬영한 다음날 순직했고 이 부대는 재구대대로 명명됐다.
박경석 장군이 대대장 시절 당시 강재구 대위 등 중대장, 소대장 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강 대위는 이 사진을 촬영한 다음날 순직했고 이 부대는 재구대대로 명명됐다.

또 개전 초기 전투 상황도 왜곡됐다고 했다. 제1사단은 개성에 주둔했는데 북한군은 개전 5시간 만에 개성을 점령하고 남하했다. 당시 백선엽은 경기도 시흥 보병학교에서 교육받다가 참모의 연락을 받고 즉시 귀대해 부대를 지휘했으나 전차 등 장비에 밀려 후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설명은 다르다. 6월24일은 육군구락부(현 육군회관) 준공 기념 파티가 열린 날로, 춘천방어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친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을 포함해 전방 사단장은 모두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는 “백선엽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임진강 남쪽에서 후퇴하던 사단에 합류했다. 그도 사단장으로서 당연히 이 파티에 참석했을 것”이라며 “부대를 비운 이유로 든 교육은 의무가 아니라 출석을 임의로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 술판을 벌이고 있어 남침에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개전 과정에서 북한군의 전차를 몸으로 막고 산화한 것으로 알려진 ‘제1사단 육탄 10용사’는 뒷날 10용사 가운데 몇몇이 북한방송에 출연해 ‘조작’임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사건 외에 제6사단의 ‘심일 소령과 육탄 5용사’도 조작 무용담이죠. 모두 일제 강점기에 조작된 ‘일본군 육탄 3용사’를 베끼기 해 지휘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어요.”

그는 “백선엽은 후퇴를 참 잘하는 사단장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여서 ‘내가 등을 보이면 총을 쏘라’며 진두에 서서 전투를 지휘했다는 미담 역시 사실이 아닐 것이다. 백선엽은 미군 군사고문단을 극진히 대접해 맺은 인연을 배경으로 승승장구했다는 게 정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0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백선엽 명예원수(5성 장군) 추대를 막아냈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일제 앞잡이였던 백씨가 한국군 최초의 명예원수가 될 순 없다’고 앞장서 반대했다. 채명신, 박정인, 이대용 장군 등 참전 군 원로들도 그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 결국 무산됐다.

박경석 장군은 백선엽이 간도특설대 장교로 친일·반민족 행위를 했고, 한국전쟁사를 왜곡해 스스로를 영웅화 했다고 주장했다.


진짜 한국전쟁의 영웅은 누구일까? 그는 주저하지 않고 1984년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선정한 4대 영웅인 김홍일 장군, 김종오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워커 장군이라고 밝혔다. 김홍일 장군은 개전 초기 국군 패잔병을 모아 한강방어선을 구축해 3일을 버텼고, 김종오 장군(당시 대령)은 제6사단장으로 3일 동안 춘천을 방어하며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해 미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다.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사령관으로 전황을 뒤집는 인천상륙작전 등을 이끌었고 워커 장군은 낙동강을 사수했다. 당시 정부는 김홍일, 김종오 장군의 일대기를 펴내고 맥아더와 워커 장군의 다큐멘터리도 제작해 방송했다.
“나는 강재구 당시 대위가 참 군인 정신을 지킨 재구대대의 첫 대대장입니다. 영원한 재구대대장으로서 전사를 왜곡해 진짜를 밀어내고 영웅이 된 가짜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보수 세력들이 주장하는 백선엽이 간도특설대 시절 반공 투사였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800명 단위의 간도특설대는 중국 팔로군과 전투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닙니다. 전투부대가 아니라 공작부대로 봐야 합니다.” 강재구 대위는 1965년 10월4일 월남 파병을 앞두고 수류탄 투척 훈련 중 부대원이 실수로 떨어뜨린 수류탄에 몸을 던져 부대원의 생명을 구하고 본인은 장렬히 산화한 인물이다. 순직 후 1계급 특진이 이뤄졌다.

그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반민족 주의자 문제는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부가 반민족행위자를 조사했잖아요? 그 결과에 따라 처리하면 되는 겁니다. 나쁜 짓 했으면 사후라도 그 죗값을 물어야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여생을 왜곡된 군사를 바로 잡는데 바치겠습니다.”

Johnny1님의 댓글

Johnny1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는 분들 이야기만 나오면 개거품 무는 가자"진리", 너 같은 인간으로 김때중, 놈무현, 문재아 등이 탄생하는거야.... 세워놓은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는 자 .... 바로 너.

진리님의 댓글

진리
올바른 역사를 아는 민족만이 밝은 미래가 있다.
이곳에 끊임없이 가짜역사를 싸질러고 놓고 있는 당신들이야말로
진짜 매국노들이다

산호님의 댓글

산호
결국은
진리라는놈이 빨갱이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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