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도 보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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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도 보수 ==
==
항간에 정치를 새롭게 한답시고 내 거는 슬로건으로 나는 [ 중도 보수다! ]
라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래의 설명으로 대신한다.
.
간단하게 우선 몇 마디 올리면
보수는 진보(혁신)와 대립되는 용어이다.
그러나 어제의 진보는 오늘의 보수가 될 수 있고
오늘의 보수가 내일은 진보가 되기도 하는 것으로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
중도(中道) 와 중용(中庸) 은
==
중도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불교의 핵심교리 중 하나이며,
중용은 공자님께서 가르치신 내용 중에서도 중요한 항목의 하나로서,
같은 중(中)자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의미에서는 확연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는 상반된 대립의 구도에서 취하는 선택이란 점에선 같다.
여기의 대립에는 “상대적인 대립”과 “모순 대립”이 있다.
<상대적인 대립>은
“많다 / 적다” “크다 / 작다” “높다 / 낮다” 등이다.
이는 그 중간이 있으며 그 중간에서 가장 적절한 것이 <중용>이다.
/ 너무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알맞은 것 /
즉 크지도 않고 적지도 않는,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닌 적당한 것 등이 <중용>이다.
<모순 대립>은
상대적 대립과는 대조적으로 중간이 없다.
즉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같다/ 다르다” 는 모순 대립이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 적당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엔 중간이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철학에서는
모순 대립하는 명제에선 두 명제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부처님은 이런 모순 대립하는 명제 자체가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사견(邪見)임을 깨닫고 둘 다 버리는 길을 가르치셨다.
예를 들어 어느 뗏목이 강 가운데를 흘러가는 것을 두고
그 뗏목이 이쪽 강변도 걸리지 않고 저쪽 강변도 걸리지 않고 흘러가면
바다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즉 모순 대립하는 두 견해들을 떠나서 수행하면 열반에 도달할 것이다.
여기의 <중도>란 강의 중간이 아니라 양쪽 강변을 벗어난 곳이다.
영원히 만날 수 없이 대립하는 두 강변이 ==> 모순 대립이라면
그 강변 사이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것을 ==> <중도>라고 한다.
==
중도의 예를 정리를 해서 한 마디로 줄여 보면
어떤 결정을 하면서 가 부 간의 표결에 따라 결정이 된다면
“ 可案 ”도 있고 “ 否案”도 있으면
“可”도 “否”도 아닌 “제3의 案”도 인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의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키로 한다.”
여기서
1) 출석의원이 재적의원 과반수가 안 되거나
2) 투표의원이 출석의원의 과반수가 안 되면 부결이 된다.
이것도 따지면
출석하지 않은 의원이나
투표에 참여치 않은 의원도 ==> 간접적으로 권리가 행사되었다고 봐야 한다.
--
해서 이런 것도 중도로 볼 수는 없어도
중도의 뜻과 거의 같은 맥락이 되고 있는데 이게 현실이다.
이 글은 여러 자료를 인용 발췌하여 썼다.
==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이 번 윤 대통령이 미국 하원의장 펠로시를 면담치 않고
전화 통화로 대신하였던 일은 잘 못했다 잘 했다 하기 엔 어려운 일로
어쩌면 불교의 중도의 길로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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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간에 정치를 새롭게 한답시고 내 거는 슬로건으로 나는 [ 중도 보수다! ]
라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래의 설명으로 대신한다.
.
간단하게 우선 몇 마디 올리면
보수는 진보(혁신)와 대립되는 용어이다.
그러나 어제의 진보는 오늘의 보수가 될 수 있고
오늘의 보수가 내일은 진보가 되기도 하는 것으로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
중도(中道) 와 중용(中庸) 은
==
중도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불교의 핵심교리 중 하나이며,
중용은 공자님께서 가르치신 내용 중에서도 중요한 항목의 하나로서,
같은 중(中)자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의미에서는 확연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는 상반된 대립의 구도에서 취하는 선택이란 점에선 같다.
여기의 대립에는 “상대적인 대립”과 “모순 대립”이 있다.
<상대적인 대립>은
“많다 / 적다” “크다 / 작다” “높다 / 낮다” 등이다.
이는 그 중간이 있으며 그 중간에서 가장 적절한 것이 <중용>이다.
/ 너무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알맞은 것 /
즉 크지도 않고 적지도 않는,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닌 적당한 것 등이 <중용>이다.
<모순 대립>은
상대적 대립과는 대조적으로 중간이 없다.
즉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같다/ 다르다” 는 모순 대립이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 적당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엔 중간이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철학에서는
모순 대립하는 명제에선 두 명제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부처님은 이런 모순 대립하는 명제 자체가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사견(邪見)임을 깨닫고 둘 다 버리는 길을 가르치셨다.
예를 들어 어느 뗏목이 강 가운데를 흘러가는 것을 두고
그 뗏목이 이쪽 강변도 걸리지 않고 저쪽 강변도 걸리지 않고 흘러가면
바다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즉 모순 대립하는 두 견해들을 떠나서 수행하면 열반에 도달할 것이다.
여기의 <중도>란 강의 중간이 아니라 양쪽 강변을 벗어난 곳이다.
영원히 만날 수 없이 대립하는 두 강변이 ==> 모순 대립이라면
그 강변 사이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것을 ==> <중도>라고 한다.
==
중도의 예를 정리를 해서 한 마디로 줄여 보면
어떤 결정을 하면서 가 부 간의 표결에 따라 결정이 된다면
“ 可案 ”도 있고 “ 否案”도 있으면
“可”도 “否”도 아닌 “제3의 案”도 인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의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키로 한다.”
여기서
1) 출석의원이 재적의원 과반수가 안 되거나
2) 투표의원이 출석의원의 과반수가 안 되면 부결이 된다.
이것도 따지면
출석하지 않은 의원이나
투표에 참여치 않은 의원도 ==> 간접적으로 권리가 행사되었다고 봐야 한다.
--
해서 이런 것도 중도로 볼 수는 없어도
중도의 뜻과 거의 같은 맥락이 되고 있는데 이게 현실이다.
이 글은 여러 자료를 인용 발췌하여 썼다.
==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이 번 윤 대통령이 미국 하원의장 펠로시를 면담치 않고
전화 통화로 대신하였던 일은 잘 못했다 잘 했다 하기 엔 어려운 일로
어쩌면 불교의 중도의 길로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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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1
작성일2022-08-11 12:01
Mason할배님의 댓글
Mason할배
일본의 기시다 총리는 미국의 펠로시를 면담을 하는등 대접을 잘 했다고 본다.
그런면에서 한국을 보면 조금 다른 생각도 들긴 하지만
한국의 입장과 일본의 입장은 확연히 다르다.
대 중국 문제를 가볍게 할 수도 그렇다고 맹방인 미국을 홀대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고육지책으로 나온 결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으로 부정적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이런 걸 중도적인 정책 결정이라고 본다.
그런면에서 한국을 보면 조금 다른 생각도 들긴 하지만
한국의 입장과 일본의 입장은 확연히 다르다.
대 중국 문제를 가볍게 할 수도 그렇다고 맹방인 미국을 홀대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고육지책으로 나온 결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으로 부정적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이런 걸 중도적인 정책 결정이라고 본다.
GymLife김인생님의 댓글
GymLife김인생
참 좋은 이야기입니다. 모두 중간으로 갈려하면
싸움도 덜 싸우고 타결점에 다다르기 쉽고
항상 중간을 생각하는게 집착않는 좋은것 같습니다.윤석열이 중도로 했다니 높히 사야겠네요.
싸움도 덜 싸우고 타결점에 다다르기 쉽고
항상 중간을 생각하는게 집착않는 좋은것 같습니다.윤석열이 중도로 했다니 높히 사야겠네요.
소요유님의 댓글
소요유
두 분은 불교에서의 “중도”를 “중간”, 즉 가운데 쯤으로 잘못 이해하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의 중도는 수행의 올바른 길이나 방향을 말하는 것이니 굳이 해석하자면 열반에 이르는 올바른
길이 아닐까요.?
다만 지금 일반적으로 “중간, 가운데” 로 해석되고 이해되는 것은, 불교에서 경계하는 “극단적인 사고와
결과”를 현대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면, 그런 해석도 딱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불교에서의 중도는 수행의 올바른 길이나 방향을 말하는 것이니 굳이 해석하자면 열반에 이르는 올바른
길이 아닐까요.?
다만 지금 일반적으로 “중간, 가운데” 로 해석되고 이해되는 것은, 불교에서 경계하는 “극단적인 사고와
결과”를 현대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면, 그런 해석도 딱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Mason할배님의 댓글
Mason할배
부처님은 이런 모순 대립하는 명제 자체가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사견(邪見)임을 깨닫고 둘 다 버리는 길을 가르치셨다.
예를 들어 어느 뗏목이 강 가운데를 흘러가는 것을 두고
그 뗏목이 이쪽 강변도 걸리지 않고 저쪽 강변도 걸리지 않고 흘러가면
바다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즉 모순 대립하는 두 견해들을 떠나서 수행하면 열반에 도달할 것이다.
여기의 <중도>란 강의 중간이 아니라 양쪽 강변을 벗어난 곳이다.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사견(邪見)임을 깨닫고 둘 다 버리는 길을 가르치셨다.
예를 들어 어느 뗏목이 강 가운데를 흘러가는 것을 두고
그 뗏목이 이쪽 강변도 걸리지 않고 저쪽 강변도 걸리지 않고 흘러가면
바다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즉 모순 대립하는 두 견해들을 떠나서 수행하면 열반에 도달할 것이다.
여기의 <중도>란 강의 중간이 아니라 양쪽 강변을 벗어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