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에게 62번 찔리고 베여 죽었던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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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장수였던 조선인 구학영은 1923년 사이타마현 요리이경찰서에서 죽었다.
26살(1921년)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엿을 팔며 살았고
운명의 날이였던 1923년 9월 1일
도쿄를 휩쓴 대지진과 함께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라는 소문이 사이타마현을 뒤덮었다.
그리고 3일 아침 "조선인의 난동이 있으니 대비하라"라는 일본 정부의 전보가 낭독되었고
마을마다 자경단이 만들어져 조선인을 죽이려했다.
구학영은 가까운 절에 숨었다가 경찰서가 더 안전할거란 판단으로 경찰서로 향한다.
그런데 수백명이나 되는 자경단원들이 경찰서 안으로 밀고 들어왔고..
유치장 안에 있던 구학영을 죽창으로 찔렀다.
구석을 파고들며 이리저리 피해보았지만 살점은 떨어져나가고 피가 쏟아져나왔다.
구학영은 바닥의 피를 모아 "罰 日本 無罪"(일본을 벌하라 나는 죄가 없다)라고 썼다.
그는 예순 두군 데나 찔리고 베인 채 숨지고 말았다.
쇼주인절에 모셔져 있는 구학영의 유해와 추모비
간토대학살로 숨진 조선인은 6,661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학살을 부인하고 시체를 불에 태우거나
강물에 흘려보내 어디서 온 누구인지 대부분 알 수 없었다.
구학영은 드물게 나이와 이름, 고향이 밝혀진 경우다.
울산이 고향인 그의 집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게 땅을 빼앗겼다. 농사를 지으면 소작료로 8할이나 벗겨 먹는 통에 아버지는 북간도로 떠났고 구학영도 일본으로 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추천 7
작성일2024-02-20 20:08
원조다안다님의 댓글
원조다안다
이렇게 캘리자몽 새끼처럼 잔인한 일본의 만행을
아무 사과도 받지 못하고 없던일로 하고 일본과 함께 미래를 같이 가자는
상병신 토착 왜구들은 일본으로 가서 후쿠시마 원전 폐수 마셔가며 잘들 살거라
개만도 못한 새끼들..
아무 사과도 받지 못하고 없던일로 하고 일본과 함께 미래를 같이 가자는
상병신 토착 왜구들은 일본으로 가서 후쿠시마 원전 폐수 마셔가며 잘들 살거라
개만도 못한 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