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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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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모 강원도 왕진 의사



방문 진료를 하는 내내 기침하며 숨차하던 할머니. 한달 전 말기 암 진단을 받았지만 입원하지 않고 집에서 지냈다. 한 시간 넘게 진료하는 동안 할머니가 유일하게 웃었던 순간이 두번 있었다. 자신의 이웃들을 얘기할 때였다.


홀몸 노인으로 사는 고개 너머 윗집 할아버지 말투를 흉내 내며 “그이가 ‘혼자 사는 사람이 제일 불쌍해’ 그러면 내가 그러지 ‘개뿔!'” 하고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 할아버지가 암으로 죽은 아들이 보고 싶을 때면 한밤중에 나가 달을 보면서 울었다 말할 때 당신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내가 아픈 뒤로는 우리 집 지나가면서 창문이 닫혀 있으면 꼭 전화해. 아파서 또 병원 갔나 걱정된다며.” 생각해보니 우리 의료진이 그날 할머니를 방문하게 된 것도 할아버지가 부탁해서였다. “몸이 건강할 때는 시내 복지관에 그이랑 같이 갔어. 내가 차편이 없으니까 그이 차를 타고 갔거든. 그런데 내가 아픈 뒤로는 혼자 가야 하니까 짜증을 내. 나한테 ‘거길 나 혼자 가라고? 제발 빨리 좀 나아!' 그래.”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짜증 내는 모습이 참 고마웠다 한다.


할머니는 집에 찾아오는 생활지원사를 말할 때도 웃음을 머금었다. “내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는지 저번에 와서 그래. 원래는 30분만 있다 가야 하는데, 따로 한 시간 더 있으면서 밥도 같이 먹고 청소도 도와드리고 싶다고. 도와주는 건 싫고 그냥 말동무만 해달라 했어. 몸이 아파서 어딜 가지 못하니까 말동무만 해줘도 즐겁잖아.” 그때부터 생활지원사는 할머니 집에 와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다 가곤 했다. 죽음이 가까이 온 시점에서도 내가 잘해줬던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잘해줬던 사람을 기억하고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며 할머니가 참 잘 살아오셨구나 생각했다. (중략)


죽어간다는 말은, 의학적으로는 사실일 수 있으나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진실은 아니다. 죽음 직전의 순간까지도 우리는 죽어가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의 모습은 실은 사람이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방문할 때마다 툴툴거리던 할머니가 있었다. 혈압이 너무 높아 약 드셔야 된다 하면 ‘이 나이에 그걸 먹어서 뭐해. 그냥 골로 가면 되지'라고 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마음을 열었던 계기가 있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눈가에 땀방울이 송송 맺히던 어느 무더운 날, 무좀 때문에 달팽이가 고개를 내민 것처럼 두꺼워진 발톱들을 한 시간 가까이 다듬어드렸을 때였다. 그 이후 할머니는 태도를 바꿨고, 이젠 혈압약도 시간 맞춰 잘 드신다. 할머니의 마음을 바꿔 놓은 것은 무엇일까.


자신을 위해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낯선 타인은 이웃이 된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돌아가는 우리에게 옥수수를 싸주고,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창문이 닫혀 있을 때마다 안부전화를 하고,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더 오래 머물며 말동무를 하는 것. 그 수많은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에서 삶의 의미가 발견된다.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가 얘기한 두분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내가 하는 어떤 일도 두분이 한 일, 한 사람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준 일보다 의미 있지는 않다고. 그리고 어쩌면 내가 시골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도 결국 한 사람의 이웃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우리 사회의 불행은 결국 어린 시절 구멍가게 평상이 사라진 것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그때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잘사는 불행 덩어리들일지도 모른다고.


그날 할머니 집 화단에는 백일홍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꽃이 백일 동안 피어 있다 해서 백일홍이라 했던가. 할머니는 꽃이 지기 전에 돌아가셨다.
추천 13

작성일2024-04-0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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