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위안부대 중국에 바친 공녀- 진정 소녀상을 세울 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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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Js9CiuV72i4
게시일: 2017. 8. 9.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7월 20일 기록을 보겠습니다.
“7명의 처녀들이 상림원으로부터 근정전으로 들어와서 덮개가 있는 교자에 나누어 들어갔는데 성씨만은 한 교자에 혼자 들어가고 나머지 두 사람은 한교자에 같이 탔다.
사신이 친히 자물쇠를 채우고 집찬비와 수종하는 하녀도 모두 말을 탔다.
건춘문에서 길을 떠나니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이 거리를 막아 울면서 보냈고, 구경한 사람들도 또한 모두 눈물을 흘렸다.“
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 10월 17일 기록입니다.
황제가 죽자 궁인으로 순장된 자가 30 여 명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음식이 끝난 다음 모두 마루에 끌어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버리니
모두 목이 메어져 죽게 되었다.
“낭아 나는 간다, 낭아 나는간다”
==============
1.노비 종모법 제정.
어머니가 노비면 아버지가 양반이라도 자식은 노비가 되는 법을 제정.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에도 노비는 전체 인구에서 많아봐야 10%가 되지 않음. 그런데 세종이 이런 야만적 법을 제정한 후 수년 후부터 노비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 당시 조선인구의 50%가 노비로 변해버려.
이 숫자가 나중에는 80%까지 이르렀다는 학설도 있을 정도.
2. 부민 고소 금지법 제정.
관리를 절대로 고소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만약 어떠한 불만이 있어도 고소했다가는 개죽음 당하는 법.
3. 세종이 중국에 바칠 공녀를 직접 세심하게 선택하여 바침.
세종 8년 1426년 12월 기록을 살펴보자.
12월 9일 , 임금이 진헌할 처녀를 친히 간택하다
12월 11일, 진헌할 처녀를 친히 간택하다
12월 12일 편전에서 처녀를 간택하다.
12월 13일 편전에서 처녀를 간택하였다.
12월 14일 편전에서 처녀를 간택하였다.
12월 16일 진헌할 처녀를 친히 간택하였다.
12월 18일 진헌할 처녀를 친히 간택하다
12월 20일 진헌할 처녀를 친히 간택하다.
12월 23일 처녀를 친히 간택하다
12월 24일 편전에서 처녀를 친히 간택하였다.
12월 28일 처녀를 친히 간택하였다.
거의 사흘에 하루꼴로 처녀 고르는 일에 시간 다 보냄.
명나라 황제에게 바치는 진헌녀 즉 조공녀를 말함.
17세기 초 서울 인구의 10%가 양반, 15%가 상민, 나머지 75%가 노비로 구성.
이런 노비문화는 서양의 어느 역사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구비율.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기록한 내용을 보면
조선사람들은 반이 노예이고 어떤 어떤 관리는 노예를 2천~ 3천명을 소유했다고 기록,
게시일: 2017. 8. 9.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7월 20일 기록을 보겠습니다.
“7명의 처녀들이 상림원으로부터 근정전으로 들어와서 덮개가 있는 교자에 나누어 들어갔는데 성씨만은 한 교자에 혼자 들어가고 나머지 두 사람은 한교자에 같이 탔다.
사신이 친히 자물쇠를 채우고 집찬비와 수종하는 하녀도 모두 말을 탔다.
건춘문에서 길을 떠나니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이 거리를 막아 울면서 보냈고, 구경한 사람들도 또한 모두 눈물을 흘렸다.“
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 10월 17일 기록입니다.
황제가 죽자 궁인으로 순장된 자가 30 여 명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음식이 끝난 다음 모두 마루에 끌어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버리니
모두 목이 메어져 죽게 되었다.
“낭아 나는 간다, 낭아 나는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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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노비 종모법 제정.
어머니가 노비면 아버지가 양반이라도 자식은 노비가 되는 법을 제정.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에도 노비는 전체 인구에서 많아봐야 10%가 되지 않음. 그런데 세종이 이런 야만적 법을 제정한 후 수년 후부터 노비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 당시 조선인구의 50%가 노비로 변해버려.
이 숫자가 나중에는 80%까지 이르렀다는 학설도 있을 정도.
2. 부민 고소 금지법 제정.
관리를 절대로 고소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만약 어떠한 불만이 있어도 고소했다가는 개죽음 당하는 법.
3. 세종이 중국에 바칠 공녀를 직접 세심하게 선택하여 바침.
세종 8년 1426년 12월 기록을 살펴보자.
12월 9일 , 임금이 진헌할 처녀를 친히 간택하다
12월 11일, 진헌할 처녀를 친히 간택하다
12월 12일 편전에서 처녀를 간택하다.
12월 13일 편전에서 처녀를 간택하였다.
12월 14일 편전에서 처녀를 간택하였다.
12월 16일 진헌할 처녀를 친히 간택하였다.
12월 18일 진헌할 처녀를 친히 간택하다
12월 20일 진헌할 처녀를 친히 간택하다.
12월 23일 처녀를 친히 간택하다
12월 24일 편전에서 처녀를 친히 간택하였다.
12월 28일 처녀를 친히 간택하였다.
거의 사흘에 하루꼴로 처녀 고르는 일에 시간 다 보냄.
명나라 황제에게 바치는 진헌녀 즉 조공녀를 말함.
17세기 초 서울 인구의 10%가 양반, 15%가 상민, 나머지 75%가 노비로 구성.
이런 노비문화는 서양의 어느 역사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구비율.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기록한 내용을 보면
조선사람들은 반이 노예이고 어떤 어떤 관리는 노예를 2천~ 3천명을 소유했다고 기록,
추천 1
작성일2017-08-14 11:27
goldwing님의 댓글
goldwing
빚을 받아내려면
자기한테 돈빌려간 놈한테 받아내야지
15대 할아버지가 빌려준 돈을 받아내겠다는 멍청한 생각
ㅋㅋㅋ
자기한테 돈빌려간 놈한테 받아내야지
15대 할아버지가 빌려준 돈을 받아내겠다는 멍청한 생각
ㅋㅋㅋ
esus님의 댓글
esus
세종 때 그랬으니 --- 그게 옳은 일이냐? --- 그 때도 오늘의 국민들이라면 당연히 들고 일어 났게찌 아니 !!!
그래서
일정 때 위안부 사건도덮어 둬라??!!
네 에미가 위안부로 끌려 갔었다 해도 그런 개 수작하꺼니???
"어므이요, 세종 때도 그랬으니 입 다물고, 눈 감고, 기만 계시소 ---" 그래도 괞찬다고 --
지금 한국민이 <반이 노예이고, 닥그네년이 국민들이 지 노예인줄로 알고 구민의 돈을 수 조원을 뚱처먹고, 구정농단에다 지 애비보다 나이 많은 늙은 놈과 더러운 불윤을 국민들에게 보여 주는꼴'을 해도 되니?
군의 충칼도 권력을 쥐고, 유신체제로 영구 집권하던 그 애비 독재가 과거에 그리 했으니 그 딸년고 그리해도 괞찬다는 말이지??? 미치넘 ---
오늘 날 어째서 이런 넘들이 존재할까?? 미친넘 ---
그래서
일정 때 위안부 사건도덮어 둬라??!!
네 에미가 위안부로 끌려 갔었다 해도 그런 개 수작하꺼니???
"어므이요, 세종 때도 그랬으니 입 다물고, 눈 감고, 기만 계시소 ---" 그래도 괞찬다고 --
지금 한국민이 <반이 노예이고, 닥그네년이 국민들이 지 노예인줄로 알고 구민의 돈을 수 조원을 뚱처먹고, 구정농단에다 지 애비보다 나이 많은 늙은 놈과 더러운 불윤을 국민들에게 보여 주는꼴'을 해도 되니?
군의 충칼도 권력을 쥐고, 유신체제로 영구 집권하던 그 애비 독재가 과거에 그리 했으니 그 딸년고 그리해도 괞찬다는 말이지??? 미치넘 ---
오늘 날 어째서 이런 넘들이 존재할까?? 미친넘 ---
캘리님의 댓글
캘리
욕 아니면 할말이 없는 인간들아 한글 공부나 더 하고 인간 부터 되그라이~~!
읽어 내려 가기가 공해네 그려..아니면 눈이 캄캄한거냐.. 무식이 충만 하겨..?ㅋ
읽어 내려 가기가 공해네 그려..아니면 눈이 캄캄한거냐.. 무식이 충만 하겨..?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