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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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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멘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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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등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 보이고 벼랑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줄 알았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들 모두가 아버지인 줄만 알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푸른 이끼를 스쳐간 이 큰 산의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고, 
수평선에 해가 뜨고 하늘도 열리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뒷짐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갔었다. 
아버지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시면서 당신 몸으로 끌어안아 들이고 있는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쫓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었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뒤돌아보니 뒷짐 지고 내 뒤를 따르는 낯익은 얼굴 하나 보인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쫓기고 쫓겨 까마득한 벼랑으로 접어드는 내 뒤에 또 한 마리 산양이 보인다. 
겨우겨우 벼랑 하나 발 딛고 선 내 뒤를 따르는 초식동물 한 마리가 보인다. 

이건청 - 산양 중에서..

++

남자는 철들면 죽는다고 했던가

세상은 어제와 다름없이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날
식당만 조금 바쁜 아버지날
나의 아버지와 내 아이의 아버지를 새삼 생각해보니
가슴 한편이 슬며시 저려온다..

선천성 감정 이상 증후군의 대표적인 증상
한 50년 후 쯤 걸려야할 몹쓸병이 너무 일찍 찾아 왔나보다..

아직도 올라야할 벼랑은 까마득히 멀고
저 멀리서 날 따르는 초식동물 한마리는 너무 어림으로
지금 이대로 죽을수는 없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