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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백아 고맙다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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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13 호
루백아 고맙다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수원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 화성시 봉담읍을 지나다 보면 ‘최루백로’라고 쓴 도로 표지판을 만나게 된다. 최루백? 그 길을 스쳐 달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를 것이다.

  최루백(崔婁伯)은 12세기 사람으로 효자로 이름이 나 그 행적이 『고려사』121권에 실려 있다. 루백의 효행 이야기는 조선 세종 때 나온 『삼강행실도』에도 인용되었고, 정조 때 만들어진 『오륜행실도』에도 수록되었다.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이 크게 칭송하는 루백의 효행은 어떤 것이었나?


호랑이 배를 갈라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

  15살의 루백은 호랑이에게 물려간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배불리 먹어 몸이 노곤해진 호랑이가 나무 그늘에 누워있었는데, 루백이 다가가 준엄하게 꾸짖고 ‘이제 내가 너를 잡아먹겠다’고 한다. 호랑이가 꼬리를 내리고 납작 엎드리자 가져간 도끼로 호랑이를 내리치고 배를 갈라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한다. 유해를 그릇에 담아 인근 산에 장사지내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고는 개울에 묻어 둔 호랑이 고기를 꺼내 먹음으로써 복수를 했다는 이야기다. 

  고려를 지나 조선으로 가면 이런 류의 효행 고사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는데, 백행(百行)의 근본이라는 효를 통해 백성을 길들이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각 왕조사에 효자열전을 편성해 넣음으로써 인민을 추동시켰고, 역사상 이름난 효자 24명을 고전으로 삼아 널리 퍼트렸다. 조선에서는 행실도를 제작하여 삼척동자도 알게 했는데, 그 사례들이란 현실성은 고사하고 기괴스럽기까지 한 ‘효행’이 대부분이다. 순종하는 백성을 만드는데 효만큼 확실한 게 없다는 ‘중국사상계의 청소부’ 오우(吳虞, 1872~1949)의 지적은 지배이데올로기가 된 효를 향한 일성이다.

  효를 위해서라면 아내와 자식은 물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게 당연하다고 가르치는 사회, 문제가 심각해보인다. 효의 이름이 오히려 부모·자식의 진정성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부모의 입맛을 돋울 잉어가 얼음 속에서 튀어나오고, 죽순이 엄동설한에 솟아나는 등의 신이(神異)가 ‘효자들’에게는 다반사이다. 정다산은 ‘사람마다 입맛이 다를 텐데 왜 효자들의 부모는 유독 죽순이나 잉어만을 찾는단 말인가’라면서 부모를 빙자하여 명예를 훔치고 부역(賦役)을 피하려는 ‘효자들’을 꼬집었다. 

  그런데 최루백의 효행 설화는 조금 특별한 데가 있다. 본문의 시(詩)를 빌어 아버지가 아들의 효성에 고마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여묘살이를 하던 루백이 깜박 잠든 사이에 아버지가 찾아온다.

  가시덤불 헤치고 효자 여막 당도하니 정이 무진하여 흐르는 눈물 끝이 없네
  흙을 져다 날마다 무덤 위를 돋우니 알아주는 이 청풍명월뿐이로구나 
  살았을 땐 봉양하고 죽어서는 지켜주니 누가 효도에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했는가.

  꿈에 나타난 아버지는 사실 루백의 마음이고, 아버지의 인정과 격려가 그리운 아들의 간절함이다. 효도를 받는 부모의 심정을 보여준 것은 자식 일방의 효행 서사와 다른 점이다. 물론 루백의 효행도 사실에 대한 기록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후 루백의 행적과 마음 자세를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죽은 아내에게 묘지명을 바친 남자

  루백은 과거에 급제하게 되고,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다가 군주의 언행을 기록하는 기거사인(起居舍人)을 거쳐 한림학사에 오른다. 무엇보다 그는 죽은 아내에게 묘지명을 바친 최초의 한국 남자다. 아내의 비문(碑文)을 남긴 것은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다. 묘지명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

   아내 경애(瓊愛)는 염덕방과 심씨부인의 딸로 태어나 25세에 최루백과 결혼했고, 4남 2녀의 자식을 낳아 길렀다. 세 아들 단인(端仁)·단의(端義)·단례(端禮)는 학문에 뜻을 두었고, 4남 단지(端智)는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장녀 귀강(貴姜)은 최국보와 결혼했는데 최씨가 죽자 집으로 돌아와 있고, 2녀 순강(順姜)은 아직 어리다. 경애는 안팎 친척의 좋은 일과 언짢은 일, 경사스러운 일과 불행한 일에 다 그 마음을 함께 했으니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루백이 보성과 충주의 수령으로 나갔을 때 아내 경애는 산 넘고 물 건너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고 함께 갔으며, 군사 일에 종사할 때는 수차례 군복을 지어 보냈고, 궁중에 근무할 때는 없는 살림 다 털어서 음식을 보내주었다. 아내 경애가 자신에게 해준 23년 동안의 일들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는 루백, 시로서 묘지명을 마무리한다.

  믿음으로써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리라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하니 매우 애통하도다
  아들딸들이 기러기처럼 뒤따르니, 부귀가 대대로 창성할 것이로다

  사실 아내 염경애가 수행한 일들은 조선사회가 주문했던 유교적 부덕(婦德)과 큰 차이가 없다. 일에는 차이가 없지만 아내의 노고를 읽는 남편의 태도는 남다르다.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한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꿈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47세의 나이로 죽은 아내를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귀족인 여자 경애의 혼인 나이가 25세인 것도 12~15세 이루어지던 조선의 혼인연령과 비교된다. 또 경애, 귀강, 순강처럼 여자도 자신의 고유한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 네 아들 중 1명은 출가승이 된 것, 남편이 죽으면 수절하며 시집 귀신이 되어야 하는 조선여인과 달리 친정으로 돌아온다는 것 등이 염경애 묘지명이 주는 보너스다. 

  루백이 경애를 더욱 잊지 못하는 것은 어머니를 정성껏 모심은 물론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삿날마다 새 옷을 지어 올렸고 재(齋)를 올리는 모든 중에게 자신이 지은 버선을 시주한 일이라고 한다. 루백이 남긴 이런 자료가 그 효행 설화의 원천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루백은 100세를 넘긴 것으로 나온다. 봉담읍의 ‘최루백로’ 일대는 루백의 사패지였으며, 루백의 아버지 최상저(崔尙翥)는 수원 최씨의 시조이다. 

  최근 한 대기업의 총수가 AI 기술을 이용한 홀로그램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복원하여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봉담에 묻혀 있는 그 아버지도 루백의 아버지처럼 “○○아, 고맙다”, “잘하고 있구나”라고 했다 하니. 루백과 우리의 거리가 1천 년 남짓하고, 그 사이에 세상이 몇 번을 개벽했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를 흐르는 정감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부모의 고마움과 자식의 그리움, 무엇을 더 보탤 수 있을까.

▶ 글쓴이의 다른 글 읽기
글쓴이 / 이 숙 인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 한국 철학 

· 저서 
〈신사임당〉, 문학동네, 2017
〈정절의 역사〉푸른역사, 2014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 도서출판 여이연, 2005 
〈노년의 풍경〉글항아리, 2014 (공저)
〈일기로 본 조선〉글항아리, 2013 (공저)
〈선비의 멋, 규방의 맛〉글항아리, 2012 (공저) 등 다수 

· 역서 
〈열녀전〉글항아리, 2013
〈여사서〉도서출판 여이연,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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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8-09-0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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