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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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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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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영남에 김씨 성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남보다 힘이좋고 활쏘는 솜씨 또한 뛰어났다.

과거를 보러 깊은 산중을 헤메다간 몇 십리 더 걸어 들어가자, 넓은 집이 나타났다.

그 집 주변에 작은 집들이 줄지어 있어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집 안은 한적하고 고요하게 정적만 흐를 뿐 인적이 없었다.

문을 재삼 두드려도 대꾸하는 사람조차 없어서 결국 중문까지 들어갔는데, 갑자기 절세가인이 나타났다.

그녀의 나이는 16~17세 가량 되었고, 머리는 아직 올리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슬픈 낯빛과 기쁜 낯빛을 동시에 띠고 물어보았다.
"나그네께선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김씨가 연고를 말하고 사랑을 빌려 하룻밤 유숙하기를 청하자, 여자는 김씨를 객석으로 맞이한 뒤, 몸소 저녁밥을 차려 가지고 왔다.

비록 고기반찬은 아니었으나 채소 음식이 정갈하여 먹을만 하였다. 김씨는 마침 굶주렸던지라 음식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는, 일단 배가 부르자, 그녀가 귀신인지 사람인지, 의아한 생각이 들어 한차례 질문하려 하였드니, 여자가 김씨를 마주 대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저는 본래 사족(士族)으로 집안이 몹시 부유하여 좌우의 촌락에 거주하는 사람이 모두 저희집 종이었고, 동서로 있는 정원이 모두 저희집 땅이었습니다.

온 집안이 화목하게 스스로 속세를 떠나 조용히 은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한 사나운 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힘이 조획(鳥獲)과 같고, 흉악함은 오늘날의 도척(盗跖)이라 말할 수 있는 놈입니다.

그가 저의 자색을 사모하여, 위로는 부모님으로 부터 아래로는 노비들에 이르기 까지 차례로 죽이고 저를 겁간하려 하였습니다.

저는 한번 죽는 것이 깨끗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만약 제가 자살을 한다면 깊은 원한을 누가 갚겠으며, 그 뼈에 사무친 원통함을 어떻게 풀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가 다가오면 부득이 좋은 말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은들 무슨 이익이 있겠소? 다만 부모님 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상을 다 마친 뒤에 그대를 따라도 늦지 않을 것이오,

만약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에겐 죽음만이 있을 뿐이오'

라고 그놈을 달랬습니다. 그 흉악한 놈은 저를 주머니 속의 물건쯤으로 여기어, 또 내가 갑자기 죽어버릴까 두려워서 잠시동안 저를 범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있기에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속으로는 그 놈을 죽이리라 생각하고 있으나, 저희집이 궁벽진 곳에 숨어 있는지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비록 친척이 있다해도 이곳에 이르면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끝내 욕을 당할 지경에 이른다면 죽고 말리라고 다짐했었는데, 저 하늘이 불쌍히 굽어 살피사 존객께서 홀연 당도하셨습니다."

"저를 위해 이 지극한 원통함을 풀어주실 수 있으시겠는지요?
저의 보잘 것 없는 육신으로 말미암아 화가 골육들에게까지 미쳤으니 생각하면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 하고, 말을 할라치면 가슴이 막힙니다."

말을 마치자, 구슬같은 눈물방울이 맺히더니 두 소매가 흥건히 젖도록 눈물을 흘렸다.

김씨는 비록 흉악한 적의 용맹이 꺼려지기는 하였지만, 일단 그녀의 말을 듣자, 분노와 피가 솟구치는 듯하여 말하였다.

"내 만일 그 도적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사내 대장부도 아니오. 아무 걱정말고 지켜만 보십시오."
여자가 기뻐하며 당부를 했다.

"그놈을 힘으로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니, 반드시 계략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곤 이어서 말하였다.

"동구밖에 숲이 있고 숲 사이로 못이 있는데, 못의 수심이 천자이고 못의 곁에는 길이 에워싸고 있답니다.

일찍이 들으니 그놈은 그 못의 물속을 헤엄쳐 건너는 것을 지름길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숲 속에 숨어 기다리시면 힘을 온전히 쓸 수 있을 것이며, 그 놈이 못을 헤엄쳐 건너게 되면 힘을 다 써서 용맹스러움이 한풀 꺾일 것이니 이 때를 틈타 일을 도모하신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씨는 그 계책을 대단히 타당하게 여기어 새벽에 그 곳으로 가서 화살을 먹이고는 숨어 아침해가 뜨기만 기다렸다.

종놈이 어제 왔던 자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가를 묻자, 여자가 말하였다.
"그는 나의 외족으로, 이른 새벽에 길을 떠났소." 종놈은 그 소리를 듣자, 마자 그를 뒤쫓아 못가에 이르렀다.

좌우를 살핀 뒤에 옷을 벗고는 헤엄쳐서 못을 건너는 폼이 마치 물오리와 갈매기가 여러 겹의 파도를 희롱하듯이 능수 능란했다.

김씨가 놈의 등 뒤를 향해 화살을 한번 세게 당겨서 쏘았는데, 얼마나 세게 화살을 쏘았는지, 화살이 거의 깃털있는 부분까지 박히자, 적은 입을 크게 벌려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몸을 돌려 김씨를 향해 헤엄쳐 왔다.

김씨는 당황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여 또 한대의 화살을 쏘았는데, 화살은 놈의 목덜미에 깊게 박혔다.

아무리 몸이 태산같이 크고 괴물같은 놈이지만 급소에 화살이 깊숙히 박히자, 더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사지를 늘어트린 채로 물 위로 엎어져 둥둥 떠내려 갔으나, 김씨가 네대의 화살을 연달아 놈의 몸에 맞추니,연못은 낭자하게 내뿜는 놈의 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김씨가 괴물을 죽였다고 알리러 집안으로 뛰어들어가니, 처녀는 비단 천을 대들보 사이에 걸어놓고 일의 성패를 기다려 본뒤엔 사생결단하려 하였다.

그녀는 김씨가 종놈을 죽이고 돌아오는 것을 보더니 황급히 마루를 내려와 김씨를 맞이하며 거듭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를 하면서 청하여 말했다.

"사무친 원한과 애통함을 풀고 씻어내게 되었으니,하해와 같은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런지요?..

저를 낳은 이는 부모지만 저를 살려주신 은인은 그대이시니, 제 몸의 터럭끝 하나도 그대가 주신 것입니다, 오직 그대가 하라시는대로 하겠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한 것은 한 가닥의 의기였을 뿐, 저 괴물같은 악인이 내 화살에 죽은 것도 내 용맹 때문이 아니오.
그놈의 죄악이 가득찬 때문에 내 손을 빌어서 하늘이 벌을 내렸을 뿐인데, 내가 무슨 힘이 되었겠습니까?

부디 소저께서는 스스로 다복함을 구하시고 잘 지내시오."
말을 마친뒤 그는 자기 이름자도 알려주지 않은 채, 옷깃을 여미며 사라져 갔다.

그 뒤에 김씨는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으나, 본래 시골출신으로 세력이 없는 자였던지라, 서울과 고향을 오갈 뿐, 큰 벼슬길엔 오르지 못했다.

한편, 그 절세가인은 그 뒤에 드디어 친척을 찾았고, 한양에 있는 한 재상의 계실(繼室)이 되었는데, 아녀자로서의 덕도 많았고 부부간의 금슬도 좋았다.

그러나 일찍이 아내가 웃는 모습을 보지 못한 재상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서 그 까닭을 물으니 여자가 울면서 이야기 했다.

"제가 살아 생전에 그 은덕을 갚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으니 어찌 웃음이 나오겠나이까?"
이를 측은하게 여긴 재상은 반드시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은혜를 갚고자 하였다.

재상이 대사마(大司馬)가 되자, 시골에서 온 무인이 있기만 하면 그들로 하여금 각자 겪었던 일들을 말하게 하여 찾고자 하였고, 부인은 병풍 뒤에앉아 몰래 그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하루는 김씨가 명함을 들이고 알현을 한 후, 그 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김씨의 겉모습과 이목구비는 이미 부인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던 터라, 백년이 간다 한들 어찌 모를리가 있겠는가!

한번 그의 말을 듣자, 곧바로 바깥마루로 달려나가 친히 그의 손을 잡고 오라비라고 부르며 눈물만 줄줄 흘릴 뿐, 감히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재상은 같이 기뻐하며 집 한채를 따로 마련해 주고, 인척으로 대우하였으며, 이로 인해 김씨는 현관(顯官)에 오를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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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03-31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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