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복음>을 아는 자 있는가? 안다면 응답 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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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복음>을 아는 자 있는가? 안다면 응답요 - [ ‘복음’의 글 - 첫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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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예배당 다닌다.’는 사람들은 99.9999999%가 <복음>이 뭣인지 알지 못한다.
나 자신부터가 <복음>이 뭣인지 모르고 43년을 ‘교회’란 곳에 다녔던 자이다.
이제 알이야 할 때가 오지 안했는가?
성경을 향해, 예수님을 향해 마음을 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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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자들이여 !
<복음>(유앙겔리온)이 뭔지도 모르는 자가 ---
<복음>이 완성되기도 전 예수로부터 ‘2천 년 전에 있던 아브라함이 <복음>을 받았다’고 하면
왜 예수가 올 필요가 있나? --- <복음>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데 ---
예수는 <복음>을 실체로 완성시키기 위해 ‘구약시대 끝’에 오신 것이며,
예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이 있기 전엔 ‘구약의 율법이나 예언’은 모두 <그림자, 모형>’이다.
‘실체’ 즉 ‘진짜’가 아니란 말이다. 구약시대엔 <그림자, 모형>’일 뿐이다.
갈3:8 원문엔 <복음>(유앙겔리온)이란 단어가 없고
<미리 복음>(프로유앙겔리조마이)이란 복합명사가 있다.
아래 원문참고 구절을 잘 보라 ---
(갈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먼저 알고
아브라함에게 < 미리 복음>(프로유앙겔리조마이)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이익(에뉼로게오)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먹사넘들이 뭣이 <복음>인지 모르니 맹신자들도 뭣이 <복음>인지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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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의 글 -- 첫째 ]
복 음
성경=하나님의 말씀> 진리> 복음
성경은 하나님이 쓰셨음으로 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성경 안에는 ‘진리의 말씀’과 ‘비 진리’가 기록되어있는데,
예를 들면 창 3:1-7에 있는 사단이 말한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분명 성경 책 안에 있지만 ‘비 진리’인 것을 우린 알고 있다.
또한 사람이 ‘사람의 생각으로 한 말’(변사 더둘로가 사도 바울에게) 행 24:5에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이러한 것들은 ‘진리’ 밖에 있는 것이며, 또한 ‘진리 안에 있는 말씀’이라도 ‘진리’의 전부가 ‘복음’은 아니다.
예를 들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는 말씀은
‘진리’이지만 ‘복음’은 아니다.
‘진리’라는 말씀 안에 있는 어느 한 부분이 ‘복음’의 내용으로 기록됐으며
이 ‘복음’은
<구원의 복음>이며(엡1:13), <거듭나게하는>(벧1:3, 23-25,약1:18) 내용으로 기록되고 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대로 ‘그의 죽으심과 장사와 부활’이 있으며,
‘회개와 죄사함과 새 생명(조에)’있고, ‘물침례와 성령침례’가 있어
또 태어나게(중생하는, 거듭나는) 하는 Story가 있다.
‘복음’이라고 기록 된 <상자>를 열면 그 안에는
하나님 말씀 안에 진리
진리 안에 복음
복음 안에 ‘거듭나는 방법’(내용)이 있다
성경을 가르친다는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복음이다”라고 역설한다.
이 역설하는 ‘복음의 내용’을 보면 사람마다, 교파마다, 그 내용이 수도 없이 다르고,
많으며 어느 것이 진짜고, 가짜인지 혼돈되어져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은 오직 하나 뿐>이다
절대 <다른 복음>은 없다.
가짜가 진짜 보다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고, 그럴 뜻 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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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들’>이시여 !
‘거듭남’은 ‘변화’가 아닙니다.
‘변화’는 ‘탄생’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로든지 ‘변화’는
‘출생’한 사람에게 이러나는 현상이고,
이미 태어난 사람에게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태어나지 않으면 변화 될 수도 없고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름도 없습니다.
출생되지 않았으면 ‘출생신고’도 할 수 없으니
‘생명록’에 등록 할 수도 없습니다.
‘생명록’에 ‘이름이 없을 때’
‘물과 성령’으로 낳지 못했을 때
무론 대소하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태어남’은 있던 존재의 ‘변화’가 아니고
없는데서 새롭게 창조되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거듭남’은,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
그래서, ‘육체’로 태어난 사람 안에
‘육체’가 아닌 또 다른 존재,
보이지 안는 존재, ‘육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고귀한 존재’가 창조 될 때,
하나님은 이를 ‘거듭난다’고 갈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물과 성령으로’ 낳아야 하며
이는 ‘물 침례 성령침례’로 된 것임을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선포하셨거든요.
거듭나게 하는 복음
구약의 여호와(야훼) 신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창세전(엡1:4,5)부터 세우신 계획(로고스)을 하나씩
이루어 나가시면서 그렇게도 말 안 듣기(불순종)로 유명한 인간에 대하여 오래도록
참으시며 긍휼을 베푸시더니만 어느 날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피’를 가진 인간 육신이
되시어 ‘인간 구원’을 목적으로 삼차원의 세계(인간세계)로 나타나셨다.
그 분은 볼 수 있고, 만 질 수 있으며, 함께 대화 할 수 있으며,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임마뉴엘),
인간으로 나타나신 ‘여호와 구원’(=예수)이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예를 들면
◦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 ‘세 천사중에 하나’로(창18;22),
◦ 야곱과 밤새워 씨름하던 --- ‘사람의 모습’으로(창33;22-32),
◦ 모세에게 나타난 --------- ‘타지 아니하는 불’로(출3;1-5),
◦ 출애굽 때 홍해 도해 후 ---- ‘백성을 구원하는 오른 손’으로(출 15:6)
◦ 출애굽 당시와 광야 40년간- ‘불기둥 구름기둥’으로(출13;21,22, 14;24,40;38),
◦ 벨사살 왕에게 글을 쓴 ---- ‘사람의 손가락’으로(단 5:5),
◦ 엘리야에게 나타난 ------- ‘세미 한 음성’으로(왕상19;8-18) 등등--
그러나 이렇게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은 ‘피’없이 이였지만, 이 천년 전 베들레헴 땅에 태어나신 그 예수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피’를 가진 사람이 되시어 ‘여호와 구원’(=예수)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오시어서 그 입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우리에게 직접 ‘말씀’해 주셨다.
다음의 성경 구절들은 그 분의 새로운 약속들(특히 구원에 관하여)을 간추려 순서대로 정리한 것으로써 곧 <복음>이다.
성경 속에는 기쁘고 좋은 복된 소식들이 많이 있지만 성경에서 정의되는 ‘구원받는 복음’, ‘거듭나는 복음’,
‘순종 할 수 있는 복음’은 고전15:1-5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이 곧 <복음>이다.
이 ‘복음’ 이외의 복음이 있다면 그것은 갈라디아서 1장 7-9절에서의 지적하는 ‘다른 복음’이다.
성경 자체는 무엇이 ‘복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는가?
창세기 1장에서 천지창조의 순서 중, 어느 것이 먼저 창조되었습니까?
① 태양 --- ②나무들 --- 답 -?- 번
새들 중에 ‘박쥐’가 새들에 포함됩니까?
답: (레 11:19, 신 14:18)
대개의 사람들은 위의 질문을 받으면 깊이 생각 없이 ‘태양’이 나무보다 먼저 창조 되었고,
‘박쥐’는 새가 아니라고 쉽게 답한다. 당연한 이치로 생각한다.
그러나 창1장3절의 첫 날은 ‘빛’이라는 ‘빛’ 자체를 창조하셨을 뿐이며,
3,4절~18절에서는 셋째 날에 ‘그 빛’으로 ‘큰 광명’을 만드신 것이다.
‘박쥐’는 인간 동물학자들이 ‘동물들의 종류를 분리하는 기준’을 정하고 분리하면서
‘박쥐’는 새로 분리하지 않은 것이 된다. (마아도 ‘깃털’과 ‘부리’가 없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성경과는 상관없이 ‘어떤 신학자들이 자기의 생각으로 그럴듯하게 만들어 낸 내용’을
<복음>이라고 공포함으로 이 신학자들로부터 배운 모든 신학생들이 그 신학자들의
권위에 의해 ‘확인작업 없이 수용 함’으로 ‘예수교’는 수난의 시작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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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까?” 성경을 알고자, 혹은 예수를 믿고자 하는 사람들의 질문이다.
대개의 목사들은 성경을 ‘반복 많이 읽고, 많은 구절들을 외우는 것’을 권한다.
‘어떤 교회의 성도들은 신구약을 천독 이상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 말로 ‘특정 신앙의 수준 수위’를 공포 한다.
성경을 ‘반복 암기 학습 한다’는 말은 ‘반복하고, 암기하고, 학습하는’ 내용이 이미 주입되어
‘이해하고, 믿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며, 주입식은 ‘세뇌의 한 패턴’인 것이다.
‘세뇌’는 ‘이해’를 요구하지 않으며 ‘맹신맹종’을 기본으로 ‘맹종하는 행위’를 강요한다.
‘글’이란 ‘자신이 아는 만큼 읽히는 법’이란 말은 참 이치에 옳은 말이다.
‘성경을 열심히, 많이 읽는다 해도 알아지지 않고, 이해되지 않으면 도저히 계속 읽혀지지 못하는 법’이다.
성경책만이 아니라 모든 책이나 연구하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신의 말씀이 많이 알아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도리어 ‘많이 읽고, 많이 외웠다는 이유’만으로 앞뒤가 맞지 않은 구절들의 나열로 자기를 과시 표출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신학교에 가면 당연히 ‘먼저 안다’는 ‘신학교수’들로부터 ‘일방적 주입식 교육 강행’을 듣게 된다.
그리고 학생들은 ‘교단교리의 율법’을 선택의 여지없이 수용해야만 한다.
반론을 제기하면 ‘신의 제사장 위치에 있는 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강퇴의 위협도 있을 수 있다.
기독교라는 집단의 수많은 교파들의 출현은 각각의 ‘교단교리 율법’의 통일성의 불일치 때문이며, 성경교리를 의도
적으로 ‘특정 유익’을 위한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성경은 ‘신의 유일성과 신이 보낸 자를 아는 것’(요17:3)이 <영생의 열쇠>라고 기록하고 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권위자 사람의 말이 아니라 신의 멧세지가 아니면 듣지도, 알지도 말아야 한다.’
성경을 많이 읽고, 암기한 것 자체가 ‘알아야 할 것을 알았다.’는 말은 될 수 없다.
‘먼저 배운 이들의 주장을 선입견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성경 그 자체의 문구는 교리화 되어 가게 된다.’는 말은
천만 옳은 말이다.
성경을 많이 읽고, 암기함에 의해 ‘의도된 믿음’은 놀라움의 슬픔이라 할 수 있다.
다독, 통독된 성경 읽기는 ‘신의 멧세지’를 ‘깨닫는 놀라움’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성경은 남녀노소와 유무식과 모든 민족의 구별 없이 누구나 쉽게 알고, 믿어지도록 쓰여 있다
그래야만 ‘신의 멧세지’라고 할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신의 멧세지’(신의 말씀)로 믿어지게 된다.
‘신의 멧세지’는 사람의 지혜나 방법으로는 ‘알아지지’ 못한다.
‘신의 멧세지’가 특정인에게나, 또는 유식해야만 읽혀지고, 어렵게 알아진다면 ‘불공평한 신(神)’이 되고,
‘지혜롭지 못한 신(神)’이 된다.
‘지혜로운 신(神)’은 ‘유명 신학자란 사람에게서 배움으로 알게 하시지 않고 <조직신학>이란 방법을 사용하여
순수한 신(神)의 멧세지를 나타내어 알아지도록 하셨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 알아지게 하는 방법이 <조직신학>이라한다.
‘조직신학’에서는 ‘읽는 자의 사사로이 풀거나, 자기의 생각을 첨부하는 것’은 금물이다.
특히 신학박사라는 자들의 말을 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들은 성경에 없거나 성경적이 아닌 말들을 참 말보다 더 많이 한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다보면 ‘그들이 성경에 없는 말들만 골라서 거짓말을 일삼는 것’이 바로 성경으로 증거 된다.
<조직신학>의 한 예를 들어 본다면
대체로 예배당 다니는 모든 사람들을 ‘크리스챤’(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크리스챤’(그리스도인: 원어에서는 크리스티아노스)이 되어야 ‘크리스챤’이라 할 수 있다.
먼저 ‘크리스챤’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하며,
‘그리스도인’으로 고난 받으며,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기름부음’이란 단어가 구약에서 인용 될 때는 ‘메시야’로 곧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
말은 히브리 원어에서 ‘마쉬아흐’(#4899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야)이며, 희랍어로는 ‘크리스토스’(5547 기름부음 받은 자)로
‘신의 을 받은 자’란 말의 동의어로써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란 말로 번역되고 있다.
만약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않으면(없으며) 결코 ‘그리스도의 것’(크리스챤)이 아니다.
행 11:26 ---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챤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것(사람)이 아니라
벧전 4:16 만일 그리스도챤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위와 같이 성경 자체가 ‘그리스도챤’의 의미와 정의를 설명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서 설명하지 아니하는 ‘사람의 생각으로 설명하고, 풀면’ 다른 모든 성경 구절들은 엉키어 버린다.
성경은 ‘신의 말씀’이다.
성경을 알고, 이해하려면 ‘성경이 신의 말씀’(신에 의하여 쓰여 진 말씀)으로 믿어야 하고, ‘반복, 암기, 학습’으로
다독하되 성경으로 하여금 ‘성경자체가 성경을 풀도록’(Let Bible speak.) 의뢰 할 때 성경은 풀리기 시작한다.
혹자는 ‘입신’하여 천국에 들어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이 세분을 만나 각각 악수 했다고 하면서
‘한분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 말은 ‘헛깨비를 보고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과 같다.
성경은 ‘이치에 맞지 않는(앞뒤가 안 맞는) 책’이 아니다. ‘신이 쓰신 책’이라면 이치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며,
이치에 맞게 알아지고, 이해 될 때 ‘의도되지 않은 믿음’이 있게 되고, 믿어지게 된다.
‘깨달음’이 있어도 ‘믿어지지 않는다면’
<아직은 깨달아 진(이해 된) 것이 아니고 진리가 착각 됨>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라는 곳에서 ‘진리’를 가르칠 때
‘앞뒤가 뒤바뀌어’있고, ‘위아래가 뒤집히기도’하며, 인과가 거꾸로 서기도’‘하게 해도
‘대충 이치에 맞으면 넘어가는 풍조’는 자기 자신과 신(神)을 속이는
‘미련스럽고, 무례한 자’가 된다.
‘목사들이 그럴듯하게 하는 설교’나 ‘신학자들이 만든 교리’를 확인 없이
‘진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알고, 이해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구원의 완성>이 된 것으로 알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오직 앞으로, 앞으로 나가며 ‘구원을 이루어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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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교회’라는 간판을 붙인 모임체에는 각각의 ‘교파교리’가 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교리’는 <초대교회의 교리>로 분명한 ‘그리스도의 율법’이지만
각 교파의 신학자들로 하여금 만들어진 ‘교파교리’는 ‘장로들의 유전’으로써
예수님은 이를 <누룩>이라고 하면서 심각하게 주의 할 것을 명하셨다.
누룩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리’이며, ‘장로들의 유전과 사람의 계명’으로
<진실함이 없는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고전5:6-8)이라고 성경에 기록되고 있다.
(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마 16: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막 8:15)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눅 12: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 주의하라’
‘참 진리’라는 순수한 밀가루에
‘장로들의 유전’인 ‘누룩’을 여자가 넣어 성경을 부풀리어 <유교병>을 만들고,
사사로이 풀고, 믿게 하여 ‘의도된 깨달음’이 된 자를 만들면
성경에서 요구하는 ‘그리스챤’이 아니라 ‘개돌릭, 장로교인, 침례교인, 감리교인’
등등이 될 뿐이다.
----------- [ ‘복음’의 글 -- 둘째 -- ]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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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복음>을 아는 자 있는가? 안다면 응답요 - [ ‘복음’의 글 - 첫째 - ]
※ 참고: 모든 esus의 색깔있는 글을 읽을 땐 글씨 크기를 150으로 하기를 부탁
대개의 ‘예배당 다닌다.’는 사람들은 99.9999999%가 <복음>이 뭣인지 알지 못한다.
나 자신부터가 <복음>이 뭣인지 모르고 43년을 ‘교회’란 곳에 다녔던 자이다.
이제 알이야 할 때가 오지 안했는가?
성경을 향해, 예수님을 향해 마음을 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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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자들이여 !
<복음>(유앙겔리온)이 뭔지도 모르는 자가 ---
<복음>이 완성되기도 전 예수로부터 ‘2천 년 전에 있던 아브라함이 <복음>을 받았다’고 하면
왜 예수가 올 필요가 있나? --- <복음>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데 ---
예수는 <복음>을 실체로 완성시키기 위해 ‘구약시대 끝’에 오신 것이며,
예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이 있기 전엔 ‘구약의 율법이나 예언’은 모두 <그림자, 모형>’이다.
‘실체’ 즉 ‘진짜’가 아니란 말이다. 구약시대엔 <그림자, 모형>’일 뿐이다.
갈3:8 원문엔 <복음>(유앙겔리온)이란 단어가 없고
<미리 복음>(프로유앙겔리조마이)이란 복합명사가 있다.
아래 원문참고 구절을 잘 보라 ---
(갈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먼저 알고
아브라함에게 < 미리 복음>(프로유앙겔리조마이)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이익(에뉼로게오)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먹사넘들이 뭣이 <복음>인지 모르니 맹신자들도 뭣이 <복음>인지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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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의 글 -- 첫째 ]
복 음
성경=하나님의 말씀> 진리> 복음
성경은 하나님이 쓰셨음으로 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성경 안에는 ‘진리의 말씀’과 ‘비 진리’가 기록되어있는데,
예를 들면 창 3:1-7에 있는 사단이 말한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분명 성경 책 안에 있지만 ‘비 진리’인 것을 우린 알고 있다.
또한 사람이 ‘사람의 생각으로 한 말’(변사 더둘로가 사도 바울에게) 행 24:5에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이러한 것들은 ‘진리’ 밖에 있는 것이며, 또한 ‘진리 안에 있는 말씀’이라도 ‘진리’의 전부가 ‘복음’은 아니다.
예를 들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는 말씀은
‘진리’이지만 ‘복음’은 아니다.
‘진리’라는 말씀 안에 있는 어느 한 부분이 ‘복음’의 내용으로 기록됐으며
이 ‘복음’은
<구원의 복음>이며(엡1:13), <거듭나게하는>(벧1:3, 23-25,약1:18) 내용으로 기록되고 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대로 ‘그의 죽으심과 장사와 부활’이 있으며,
‘회개와 죄사함과 새 생명(조에)’있고, ‘물침례와 성령침례’가 있어
또 태어나게(중생하는, 거듭나는) 하는 Story가 있다.
‘복음’이라고 기록 된 <상자>를 열면 그 안에는
하나님 말씀 안에 진리
진리 안에 복음
복음 안에 ‘거듭나는 방법’(내용)이 있다
성경을 가르친다는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복음이다”라고 역설한다.
이 역설하는 ‘복음의 내용’을 보면 사람마다, 교파마다, 그 내용이 수도 없이 다르고,
많으며 어느 것이 진짜고, 가짜인지 혼돈되어져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은 오직 하나 뿐>이다
절대 <다른 복음>은 없다.
가짜가 진짜 보다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고, 그럴 뜻 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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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들’>이시여 !
‘거듭남’은 ‘변화’가 아닙니다.
‘변화’는 ‘탄생’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로든지 ‘변화’는
‘출생’한 사람에게 이러나는 현상이고,
이미 태어난 사람에게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태어나지 않으면 변화 될 수도 없고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름도 없습니다.
출생되지 않았으면 ‘출생신고’도 할 수 없으니
‘생명록’에 등록 할 수도 없습니다.
‘생명록’에 ‘이름이 없을 때’
‘물과 성령’으로 낳지 못했을 때
무론 대소하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태어남’은 있던 존재의 ‘변화’가 아니고
없는데서 새롭게 창조되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거듭남’은,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
그래서, ‘육체’로 태어난 사람 안에
‘육체’가 아닌 또 다른 존재,
보이지 안는 존재, ‘육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고귀한 존재’가 창조 될 때,
하나님은 이를 ‘거듭난다’고 갈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물과 성령으로’ 낳아야 하며
이는 ‘물 침례 성령침례’로 된 것임을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선포하셨거든요.
거듭나게 하는 복음
구약의 여호와(야훼) 신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창세전(엡1:4,5)부터 세우신 계획(로고스)을 하나씩
이루어 나가시면서 그렇게도 말 안 듣기(불순종)로 유명한 인간에 대하여 오래도록
참으시며 긍휼을 베푸시더니만 어느 날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피’를 가진 인간 육신이
되시어 ‘인간 구원’을 목적으로 삼차원의 세계(인간세계)로 나타나셨다.
그 분은 볼 수 있고, 만 질 수 있으며, 함께 대화 할 수 있으며,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임마뉴엘),
인간으로 나타나신 ‘여호와 구원’(=예수)이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예를 들면
◦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 ‘세 천사중에 하나’로(창18;22),
◦ 야곱과 밤새워 씨름하던 --- ‘사람의 모습’으로(창33;22-32),
◦ 모세에게 나타난 --------- ‘타지 아니하는 불’로(출3;1-5),
◦ 출애굽 때 홍해 도해 후 ---- ‘백성을 구원하는 오른 손’으로(출 15:6)
◦ 출애굽 당시와 광야 40년간- ‘불기둥 구름기둥’으로(출13;21,22, 14;24,40;38),
◦ 벨사살 왕에게 글을 쓴 ---- ‘사람의 손가락’으로(단 5:5),
◦ 엘리야에게 나타난 ------- ‘세미 한 음성’으로(왕상19;8-18) 등등--
그러나 이렇게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은 ‘피’없이 이였지만, 이 천년 전 베들레헴 땅에 태어나신 그 예수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피’를 가진 사람이 되시어 ‘여호와 구원’(=예수)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오시어서 그 입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우리에게 직접 ‘말씀’해 주셨다.
다음의 성경 구절들은 그 분의 새로운 약속들(특히 구원에 관하여)을 간추려 순서대로 정리한 것으로써 곧 <복음>이다.
성경 속에는 기쁘고 좋은 복된 소식들이 많이 있지만 성경에서 정의되는 ‘구원받는 복음’, ‘거듭나는 복음’,
‘순종 할 수 있는 복음’은 고전15:1-5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이 곧 <복음>이다.
이 ‘복음’ 이외의 복음이 있다면 그것은 갈라디아서 1장 7-9절에서의 지적하는 ‘다른 복음’이다.
성경 자체는 무엇이 ‘복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는가?
창세기 1장에서 천지창조의 순서 중, 어느 것이 먼저 창조되었습니까?
① 태양 --- ②나무들 --- 답 -?- 번
새들 중에 ‘박쥐’가 새들에 포함됩니까?
답: (레 11:19, 신 14:18)
대개의 사람들은 위의 질문을 받으면 깊이 생각 없이 ‘태양’이 나무보다 먼저 창조 되었고,
‘박쥐’는 새가 아니라고 쉽게 답한다. 당연한 이치로 생각한다.
그러나 창1장3절의 첫 날은 ‘빛’이라는 ‘빛’ 자체를 창조하셨을 뿐이며,
3,4절~18절에서는 셋째 날에 ‘그 빛’으로 ‘큰 광명’을 만드신 것이다.
‘박쥐’는 인간 동물학자들이 ‘동물들의 종류를 분리하는 기준’을 정하고 분리하면서
‘박쥐’는 새로 분리하지 않은 것이 된다. (마아도 ‘깃털’과 ‘부리’가 없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성경과는 상관없이 ‘어떤 신학자들이 자기의 생각으로 그럴듯하게 만들어 낸 내용’을
<복음>이라고 공포함으로 이 신학자들로부터 배운 모든 신학생들이 그 신학자들의
권위에 의해 ‘확인작업 없이 수용 함’으로 ‘예수교’는 수난의 시작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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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까?” 성경을 알고자, 혹은 예수를 믿고자 하는 사람들의 질문이다.
대개의 목사들은 성경을 ‘반복 많이 읽고, 많은 구절들을 외우는 것’을 권한다.
‘어떤 교회의 성도들은 신구약을 천독 이상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 말로 ‘특정 신앙의 수준 수위’를 공포 한다.
성경을 ‘반복 암기 학습 한다’는 말은 ‘반복하고, 암기하고, 학습하는’ 내용이 이미 주입되어
‘이해하고, 믿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며, 주입식은 ‘세뇌의 한 패턴’인 것이다.
‘세뇌’는 ‘이해’를 요구하지 않으며 ‘맹신맹종’을 기본으로 ‘맹종하는 행위’를 강요한다.
‘글’이란 ‘자신이 아는 만큼 읽히는 법’이란 말은 참 이치에 옳은 말이다.
‘성경을 열심히, 많이 읽는다 해도 알아지지 않고, 이해되지 않으면 도저히 계속 읽혀지지 못하는 법’이다.
성경책만이 아니라 모든 책이나 연구하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신의 말씀이 많이 알아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도리어 ‘많이 읽고, 많이 외웠다는 이유’만으로 앞뒤가 맞지 않은 구절들의 나열로 자기를 과시 표출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신학교에 가면 당연히 ‘먼저 안다’는 ‘신학교수’들로부터 ‘일방적 주입식 교육 강행’을 듣게 된다.
그리고 학생들은 ‘교단교리의 율법’을 선택의 여지없이 수용해야만 한다.
반론을 제기하면 ‘신의 제사장 위치에 있는 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강퇴의 위협도 있을 수 있다.
기독교라는 집단의 수많은 교파들의 출현은 각각의 ‘교단교리 율법’의 통일성의 불일치 때문이며, 성경교리를 의도
적으로 ‘특정 유익’을 위한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성경은 ‘신의 유일성과 신이 보낸 자를 아는 것’(요17:3)이 <영생의 열쇠>라고 기록하고 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권위자 사람의 말이 아니라 신의 멧세지가 아니면 듣지도, 알지도 말아야 한다.’
성경을 많이 읽고, 암기한 것 자체가 ‘알아야 할 것을 알았다.’는 말은 될 수 없다.
‘먼저 배운 이들의 주장을 선입견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성경 그 자체의 문구는 교리화 되어 가게 된다.’는 말은
천만 옳은 말이다.
성경을 많이 읽고, 암기함에 의해 ‘의도된 믿음’은 놀라움의 슬픔이라 할 수 있다.
다독, 통독된 성경 읽기는 ‘신의 멧세지’를 ‘깨닫는 놀라움’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성경은 남녀노소와 유무식과 모든 민족의 구별 없이 누구나 쉽게 알고, 믿어지도록 쓰여 있다
그래야만 ‘신의 멧세지’라고 할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신의 멧세지’(신의 말씀)로 믿어지게 된다.
‘신의 멧세지’는 사람의 지혜나 방법으로는 ‘알아지지’ 못한다.
‘신의 멧세지’가 특정인에게나, 또는 유식해야만 읽혀지고, 어렵게 알아진다면 ‘불공평한 신(神)’이 되고,
‘지혜롭지 못한 신(神)’이 된다.
‘지혜로운 신(神)’은 ‘유명 신학자란 사람에게서 배움으로 알게 하시지 않고 <조직신학>이란 방법을 사용하여
순수한 신(神)의 멧세지를 나타내어 알아지도록 하셨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 알아지게 하는 방법이 <조직신학>이라한다.
‘조직신학’에서는 ‘읽는 자의 사사로이 풀거나, 자기의 생각을 첨부하는 것’은 금물이다.
특히 신학박사라는 자들의 말을 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들은 성경에 없거나 성경적이 아닌 말들을 참 말보다 더 많이 한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다보면 ‘그들이 성경에 없는 말들만 골라서 거짓말을 일삼는 것’이 바로 성경으로 증거 된다.
<조직신학>의 한 예를 들어 본다면
대체로 예배당 다니는 모든 사람들을 ‘크리스챤’(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크리스챤’(그리스도인: 원어에서는 크리스티아노스)이 되어야 ‘크리스챤’이라 할 수 있다.
먼저 ‘크리스챤’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하며,
‘그리스도인’으로 고난 받으며,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기름부음’이란 단어가 구약에서 인용 될 때는 ‘메시야’로 곧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
말은 히브리 원어에서 ‘마쉬아흐’(#4899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야)이며, 희랍어로는 ‘크리스토스’(5547 기름부음 받은 자)로
‘신의 을 받은 자’란 말의 동의어로써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란 말로 번역되고 있다.
만약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않으면(없으며) 결코 ‘그리스도의 것’(크리스챤)이 아니다.
행 11:26 ---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챤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것(사람)이 아니라
벧전 4:16 만일 그리스도챤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위와 같이 성경 자체가 ‘그리스도챤’의 의미와 정의를 설명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서 설명하지 아니하는 ‘사람의 생각으로 설명하고, 풀면’ 다른 모든 성경 구절들은 엉키어 버린다.
성경은 ‘신의 말씀’이다.
성경을 알고, 이해하려면 ‘성경이 신의 말씀’(신에 의하여 쓰여 진 말씀)으로 믿어야 하고, ‘반복, 암기, 학습’으로
다독하되 성경으로 하여금 ‘성경자체가 성경을 풀도록’(Let Bible speak.) 의뢰 할 때 성경은 풀리기 시작한다.
혹자는 ‘입신’하여 천국에 들어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이 세분을 만나 각각 악수 했다고 하면서
‘한분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 말은 ‘헛깨비를 보고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과 같다.
성경은 ‘이치에 맞지 않는(앞뒤가 안 맞는) 책’이 아니다. ‘신이 쓰신 책’이라면 이치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며,
이치에 맞게 알아지고, 이해 될 때 ‘의도되지 않은 믿음’이 있게 되고, 믿어지게 된다.
‘깨달음’이 있어도 ‘믿어지지 않는다면’
<아직은 깨달아 진(이해 된) 것이 아니고 진리가 착각 됨>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라는 곳에서 ‘진리’를 가르칠 때
‘앞뒤가 뒤바뀌어’있고, ‘위아래가 뒤집히기도’하며, 인과가 거꾸로 서기도’‘하게 해도
‘대충 이치에 맞으면 넘어가는 풍조’는 자기 자신과 신(神)을 속이는
‘미련스럽고, 무례한 자’가 된다.
‘목사들이 그럴듯하게 하는 설교’나 ‘신학자들이 만든 교리’를 확인 없이
‘진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알고, 이해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구원의 완성>이 된 것으로 알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오직 앞으로, 앞으로 나가며 ‘구원을 이루어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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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교회’라는 간판을 붙인 모임체에는 각각의 ‘교파교리’가 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교리’는 <초대교회의 교리>로 분명한 ‘그리스도의 율법’이지만
각 교파의 신학자들로 하여금 만들어진 ‘교파교리’는 ‘장로들의 유전’으로써
예수님은 이를 <누룩>이라고 하면서 심각하게 주의 할 것을 명하셨다.
누룩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리’이며, ‘장로들의 유전과 사람의 계명’으로
<진실함이 없는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고전5:6-8)이라고 성경에 기록되고 있다.
(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마 16: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막 8:15)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눅 12: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 주의하라’
‘참 진리’라는 순수한 밀가루에
‘장로들의 유전’인 ‘누룩’을 여자가 넣어 성경을 부풀리어 <유교병>을 만들고,
사사로이 풀고, 믿게 하여 ‘의도된 깨달음’이 된 자를 만들면
성경에서 요구하는 ‘그리스챤’이 아니라 ‘개돌릭, 장로교인, 침례교인, 감리교인’
등등이 될 뿐이다.
----------- [ ‘복음’의 글 -- 둘째 -- ]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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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1-07-2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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