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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태어난 자라면 --<영으로 태어난 자>는 "모두 이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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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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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체)으로 난 사람은 이러하니라”

어린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사람의 “씨”가 어머니 몸에 뿌려져 “씨”가 9개월 동안 자라서 사람의 모양이
다 빚어 졌을 때, 때가 되어 어느 날 어머니 몸밖으로 나와 집니다.
밖으로 밀려나온 아기는 우선 핏덩어리에 불과 합니다.
그 핏덩어리가 갑자기 소리를 냅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 것을 “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아기는 전혀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혹 의사가 아기를 울게 하기 위해 아기의 두 발을 치켜들고 엉덩이를 칩니다.
“으 앙---”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아기는 왜 태어나자마자 꼭 울어야 합니까?
언제 울어지는 것입니까?
어머니 몸 안에 있을 때의 호흡은 탯줄로 했는데, 밖에 나온 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밖에 나온 아기는 갑자기 “공기가 코를 통하여 폐로 들어가는 순간” 놀라서인지, 자동적으로 울어 지는
것인지, 이유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울어댑니다.
이 소리’를 들을 때 비로써 아기의 어머니와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안도감과 함께 아기의 <출생>을 기뻐합니다.

그런데 어떤 아기는 세상 밖으로 분명히 나왔는데도 통 울지를 않습니다.
별별 수단을 다 해봐도 울지를 않을 때, 아니 못 울 때, 비로써 ‘죽은 아기’로 판단합니다.
이 아기는 공기가 자기 몸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즉 호흡 기관으로 공기가
들고 날 수 없기 때문에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아기는 ‘목숨을 가져 본 적도 없이 그냥 흙으로 돌아 간 것’이죠.
아마도 ‘죽었다’는 단어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죽음’이란 ‘살았던 사람’에게 해당되는 단어이니 ‘살았던 체험이 없는 존재’에겐 ‘죽음’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아기가 어머니 몸 안에 있을 때는 “생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즉 100% 온전한 사람이 되기 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혼
(Living Soul)이 된지라>(창2:7)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 2:22)

사람의 생명은 호흡과 직결되고, 호흡이 곤란해지면 죽음이 시작되며, 동시에 심장
(피) 기능이 저하되다가,
호흡이 지속되지 못했을 때, 심장의 정지와 합께 “죽었다”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어머니 몸 안에서 사람을 빚으시고” 그가 세상에 나왔을 때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시면 “Living Soul”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반드시 ‘소리’를 냅니다.
그 ‘소리’가 사람에 따라 우는 ‘소리’는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분명히 ‘소리’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벙어리도 소리를 냅니다. 그 소리를 우리는 ‘운다’고 말합니다.
울지 않으면 출생 된 것이 아닙니다. ‘출생’이 없으면 존재가 없는 것이죠. 무 존재입니다.
‘출생’은 ‘인생의 시작’입니다. ‘출생’하자마자 뛰어 다니며 “엄마, 아빠”라고 말하는 아기는 없습니다.
아기가 세상에 나와서 <첫 번 행위>가 “소리 내어 우는 것”인데 이 “소리”는 무슨 뜻입니까 ?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고전14:10)

“아기의 첫 울음 소리”에도 그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출생신고의 소리”라고 하면 잘 못 표현한 것일까요? 아니면
“출생의 표적 소리”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 소리”의 뜻은 “나는 태어났다”는 표적임이 분명합니다.
“그 소리”가 없으면 “나는 태어났다”가 아니며, 출생 된 것이 아니니 동회에 가서 “출생신고”
또는 “호적에 등재” 할 수도 없습니다. 태어나서 울지 않은 아기에게 “이름”도 지어 주고,
호적에 올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난 아기가 “첫 울음”을 울고는 잠이 들었고, 얼마를 잦는지 한참 후에 잠에서 깨어나 또 웁니다.
두 번째 울음. 이 두 번째 “소리”는 듣기에 “첫 번째 소리”와 별로 다를 게 없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의 뜻은 첫 번째의 소리의 뜻과 분명히 다릅니다.
이번엔 왜 웁니까? 또 “나는 태어났다”는 표적으로 우는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나는 태어났다”는 뜻의 표적.“그 소리”는 일생에 단 한번으로 족합니다.
두 번째 울음은 첫 번째 울음과는 달이 그 뜻은 “나는 배가 고프다. 젖을 주라”는 뜻이던지 아니면
“나는 어디가 아프다” 혹은 “어디가 불편하다”는 뜻이겠죠.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있어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을 뿐 “모든 소리는 뜻이 있다”는 성경 말씀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두 번 째 소리, 그리고 많은 다른 소리가 계속되고,
어느 날 “마마” 혹은 “엄마”라는 단어 사용이 되고, “나 밥 줘”,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꾸뻑” ---

그래서 분명한 “언어”사용이 되어져 중학교도 가고,--- 대학교도 가며, ‘석사’, ‘박사’, ‘장관’도 되고, ‘백만장자’도 되고,
‘먹사’도 되고, 혹은 ‘도둑’이나 ‘강도’도 되고, ‘거짓 선지자’도 되고 ---- 그런 거 아니던가요???
세상에 나와서 “울지 않으면” <사람>도 될 수 없고, ‘중학생’도 될 수 없으며, ‘대통령’도,
심지어 ‘도둑’이나 ‘거짓 말쟁이’도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출생 시의 ‘소리’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엄청 난 의미와 목적이 있고, ‘그 소리’는
출생의 “필요충분 조건”이 됨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 몸 안에서 9개월 있다가 몸밖으로 밀려나온 모든 아기는 맨 처음의 행위가 100% ‘소리’를 냅니다.
육체로 난 사람은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 갈 때 ‘소리’를 냅니다”

(체)으로 난 사람은 이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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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언어가 존재합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만도 6천여 종에 속한다는 학자들의 발표를 들을 수 있습니다.
(70년 중반에는 2500여 종으로 발표)
여기에 동물들이 사용하는 언어들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숫자가 될 것이며,
인간은 이 모든 언어를 다 알거나 이해 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종족의 언어는 우리가 듣기에 전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그들끼리 대화를 할 것이며, 또한 그들도 우리 한국인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역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지절거린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고, 듣기에 거북스러울
만큼 한 그들의 ‘주절거림’이라 할지라도 “그 것이 무슨 언어냐?”고 욱박지르고 천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결코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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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난 자는 이러하니라”

요3:1-9
1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으로 나지 아니하면
(출생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으로 난 것은 이요 으로 난 것은 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으로 난 자는 이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

예배당에 나가는 사람이라면 위의 성경말씀은 누구나 다 듣고, 기억하여 알고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많이 알려진 내용만큼 그 내용의 심각성은 결여되어있고 또 전혀 알지 못하여 무관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혹 누가 그 내용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질문을 해도 “성경을 가르친다는 사람” 자신도
옳게 알지 못하여 답하는 사람마다 그 답이 수 십 가지로 나오거나, 또는 전혀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예수님은 찾아온 밤손님 니고데모와 아주 신비스러운 대화를 하게 됩니다.
(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시작합시다)

학교에서 ‘역사 선생님’은 역사를 가르치고, ‘국어 선생님’은 국어를 가르치며
‘영어 선생님’은 당연히 영어를 가르칩니다.

니고데모는 2절에서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을 가르쳐 주실 줄 아나이다, 믿나이다’입니다.
니고데모는 정말 순수하고, 정직하며, 의로우며, 분명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백에 만족하시어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그러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누구나 아주
쉽게 알 수 있도록 내용을 풀어 나갑니다.

처음에는 ‘이것을 하지 아니하면’ ‘저것을 할 수 없다’라는 ‘부정의 부정문’을 도입하여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똑 잘라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태어난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이해되지만
‘또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쉽게 이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 사람이 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또 태어나는 것”
(양수로부터 태어나는 것)아니라고 하십니다.
즉 육체로 또 출생되는 것이 아니라 “물로, 그리고 성령으로” <두 번째로 출생되어야 함>을 깨닫게 하려 하셨습니다.
6절. 으로 난 것은 이요 으로 난 것은 이니
그래서 바울은 ‘첫 번째 출생’은 ‘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으로 출생되는 것’이 <두 번째 출생>이라고 분명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로, 으로 출생”되는 이 <<두 번째 출생의 존재>>가 ‘신령한 자’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런데 “으로 출생 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 것이 무엇인지
‘체험하기 전’에는 어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 님은 8절에서 100% 설명의 문을 엽니다.

8절--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으로 난
(Born. 출생) 자는 다 이러하니라'

많은 사람에게 질문을 합니다.
8절 끝의 으로 난
(Born. 출생) 자는 “ 이러하니라”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으로 난
(Born. 출생) 자는 “ 이러하니라”고 했으니 “다 어떻다는 것인가요??”라고
질문했을 때의 그 대답은 주로 다음과 같았습니다.

1) “바람이 불어 올 때 그 바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렇게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사람에게 알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고 할 수 없습니다.

*
2)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성령으로 심령이 변화되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위의 설명자는 <태어남>과 <변화>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의 태어남은 결코 변화가 아닙니다. ‘먼저 태어난
(출생) 존재’가 후에 변화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위의 1)과 2)의 설명자는 결국 “모른다”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무엇을 모른다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하면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어리벙벙함”입니다.
그런데 9절에서 니고데모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라고 반문하는데 이는 8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서
(알지 못한다)가 아니라 <신비스러움과 놀라움>으로 인한 “감탄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 출생되어 질 때,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즉 하나님의 영으로 입술과 혀가
이상해지고, 알지 못하는 어떤 언어가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입에서 술술 나와 진다>면 놀라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아마도 “내가 왜 이러지! 누가 내 대신 내 속에서 말을 하지! 이 소리가 어디서 오며, 누구에게 하는 소리지!”라고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랍비
(선생)입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요 가르치는 사람이므로
예수님 말씀의 내용을 충분히 알고, 이해하지만 <믿지 못할 만 큼>의 놀라움의 표현으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로 응수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8절의 내용을 ‘알 수 없다’가 아니라 100% 알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구원받는 일에 관한 질문과 그 대답>이 알쏭, 달쏭 이해 할 수 없도록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사람을 향한 설교 말씀은 어떻게 해서라도 잘 이해 되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취하셨는데,
직설적으로, 때로는 예화를 들어, 어떤 때는 쉽고 단순한 표현법으로 해 오셨음을 우린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한번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순수하고 더러움이 없는
(사람의 유전 따위를 모르는) ‘순전한 마음의 소유자’이어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덮지 말고, 폅시다.

’이란 단어는 ‘pneu/ma’(푸뉴마)이며 원어에서는 ‘성령’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자가 없이 그냥 ‘’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으로 나지 아니하면
(출생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으로 난 것은 이요 으로 난 것은 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이 임의로 행하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으로 난 자는 이러하니라

그런데
요 3장 5절부터 8절까지에는 우리나라 성경이나 영어성경 KJV에 ‘
(Spirit)이란 단어가
4번만 나오는데 원어 성경에서는
(pneu/ma)이란 단어가 5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 다섯 번째의
(pneu/ma)이란 단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많은 경우의 번역자들은 직역하기를 피하고, 자기가 속해있는 교파 교리를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
교리에 맞도록 번역하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나라 성경번역에서 그릭어 ‘밥티조’라는 단어를 ‘침례’로 하지 않고 ‘세례’로 한 것이나,
고유명사 ‘여호와’란 이름 대신에 ‘주’라고 쓴 것이나 --- 중성명사를 ‘셋’이란 단어를 인격체로 표현하여
‘세분’이라고 한 것 라든지 --

이제 제 5번째의
(pneu/ma)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8절에서 ‘바람’이란 단어가 바로 그 것입니다.
물론 원어의 pneu/ma의 뜻은 영, 호흡, 바람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란 단어 대신 ‘바람’이란 단어 사용은 그 뜻이 전혀 다르거나 혼미하게 되어 집니다.

원어를 아는 사람이 그대로 읽으면 아무런 걸림이 없이 이해되지만 우선 한국어로 ‘바람’이란 단어
사용은 몇 가지 잘 못된 멧세지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말’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여러 뜻이 있지만
그 단어를 합당하게 써야 말이 통하듯 말입니다.

장기 말은 말
(馬)이 아니고, 말(言)이 없으면 말(末)이 되고, 말(斗) 가지고 말(이웃집에 놀러) 간다
*
뱃군
(배의 군. seaman)이 배(베)옷을 입고 배(Boat)를 타고 배(Pear)를 먹으니 배(stomach)가 배(Double)나 부르다.

* 만약 위의 글에서 <뱃군
(배의 군. seaman)이 배(베)옷을 입고 배(stomach)를 타고 배(Boat)를 먹으니 배(Pear)가 배(Double)나 부르다.>라고
했다면 누가 이해 할 수 있겠습니까?

*
첫째 문제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바람’은 의지가 없음으로 ‘임의로 불매’란 표현이 될 수가 없습니다.
‘공기’의 ‘움직임’
(movement, 불매)이 ‘바람’이고, 그 움직임은 공기의 대류 현상임을 알고 있습니다.
결코 <공기는 임의로 불수가 없다>는 모순입니다.

바람은 인격체가 아님으로 ‘제 맘대로’ 불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아니고 이란 원어의 뜻을 대입하여 보면 모순 없이 뜻이 통해 집니다.
’이 임의로---” 주어가 되는 ‘’은 의지가 있고 신격체 임으로 임의로란 말이 이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문제점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8절의 주어가 ‘바람’이라면 ‘그 소리를 들어도’에서 ‘그 소리’는 당연히 ‘바람 소리’를 지적하는 것이므로
으로 태어나는 자’에 대한 설명이 ‘바람’과 상관되어 진다면 우수개 소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요3:1-10에서 중요한 ‘’ 이야기를 계속 중인데 느닷없이 ‘바람’이란 단어 사용이
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셋째 문제점
‘바람’과 ‘그 소리’와 <으로 난 사람은 이러하니라>고 함을 연결 해보면
<‘으로 태어나는 자’는 다 이처럼 ‘바람 소리’가 난다>는 결론에 도달 해 집니다.
으로 태어나는 자’가 어찌 ‘바람 소리’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원어에서 ‘푸뉴마’을 ‘으로 번역하여 읽어보면 예수님의 멧세지가 분명하게 이해
될 수 있게 됩니다.


<이 임의로 행하시매
(또는 역사하시매) 네가 그 소리(성령의 소리, 방언)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으로 난 자는 이러하니라

<이 임의로 행하시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
으로 난 자 이러하니라'>가 옳은 번역이 됩니다.

이런 재번역과 해석이 기존의 번역을 무감각으로 저장 해둔 사람에게는 억지나 황당한 것 같지만
사도행전 2장1-4를 연결해 보면 100% 정립이 됩니다.

행2:1-4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 4절에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이라 함은
요3: 8절에서 성령이 임의로 역사하시매 그 소리
(성령의 소리)
와 직결됩니다.
다시 설명한다면 <방언에 대한 정의>는--- 성령에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는 소리가 곧 ‘방언’입니다.
고로 ‘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는
으로 난 사람은 다 이처럼 에 소리, 방언의 소리가 나느니라’로 이해되고 믿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써 남
(거듭남, 또 출생됨)에 대한 설명을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도록 실지로
‘출생’에 대한 경험적 사건과 직결시켜 ‘태어난다’
(Born)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태어남’은 ‘변화’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두 번째로 태어남
(거듭남)이란 뜻을 ‘변화’로 가르치고, 그렇게 믿도록 하고 있습니다.
‘변화’는 ‘태어난 자’가 ‘변화’하는 것이지 ‘태어나지 않았으면 변화란 단어가 해당되지도 않는
<무 존재>’라는 것을 대개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0-4번까지는 사람의 ‘육
(체)으로 태어날 때’와 ‘영으로 태어날 때’를 비교 한 것입니다.

육으로 출생 시
0)‘’가 9개월간 어머님 몸 안에서 성장하여 사람의 모양이 되어지고, 때가 되면
1) 아기가 어머니 몸 밖으로 나와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갈 때 <태어남>의 표적으로 울음의 ‘소리’가 납니다.
2) 첫 번 ‘소리’ 뒤에 두 번째 ‘소리’는 1)과는 뜻이 다른 ‘소리’입니다.
3) 이후로 계속 여러 종류의 ‘소리’가 지속되면서 ‘언어’라는 형태로 바뀌어 집니다.
첫 번 체험의 ‘울음소리’ 뒤에 ‘소리’는 <은사로 주어지는 소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리’는 ‘별로 말 같지도 않던 소리’가 어느 날 ‘언어다운 소리’로
변하게
(율동적, 액쎈트, 감정 등) 되어 자기 모국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외국어도 하게 되구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1)의 울음을 운 후로는 “소리”가 언어로 바뀔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벙어리 혹은 ‘농아’라고 하죠.
4) 태어난 사람은 성장하게 되는데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건강과 용감하여
훈장도 달고, 높은 지위와 권력도 소유하며,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병들기도 하고, 또는 병들어 죽기도 하며, 사고로 죽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
살기가 싫어 자살도 합니다.

성령으로 출생 시
0) ‘말씀’의 ‘’가 사람의 마음 안에서 필요한 기간동안 성장, 믿음이 익고, 때가 되면
1) ‘하나님의 영’이 몸 안으로 들어갈 때 <태어남>의 표적으로 울음의 ‘소리’가 납니다.
이러한 ‘소리’를 성경적으로는 출생의 ‘표적방언’이라고 합니다.
2) 첫 번 ‘소리’ 뒤에 두 번째 “소리”는 1)과는 뜻이 다른 “소리”입니다.
3) 이후로 계속 여러 종류의 ‘소리’가 지속되면서 ‘언어’라는 형태로 바뀌어 집니다.
첫 번 체험의 ‘울음소리’ 뒤에 ‘소리’는 <은사로 주어지는 소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리’는 ‘별로 말 같지도 않던 소리’가 어느 날 ‘언어다운 소리’로 변하게
(율동적, 액쎈트, 감정 등) 되어 ‘유창한 언어’가 됩니다.
이런 언어는 ‘모국어’에 속하는 <하나님과의 비밀을 말함>이라면 <다른방언>은 외국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를 성경적으로는 ‘은사방언’이란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1)의 방언을 한 후로는 “소리”가 언어로 바뀔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 벙어리 혹은 ‘농아’라고 하듯이 ‘은사 방언’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4)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속사람은 성장하게 되는데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병들기도 하고
(믿음이 연약함으로), 또는 병들어 죽기도 하며, 사고로 죽기도 하고(마귀의 공격으로),
때로는 하나님 나라 가기를 포기하여 자살
(믿음을 버림)도 합니다.


(체)으로 난 사람은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 갈 때 ‘소리’를 냅니다”

(체)으로 난 사람은 이러하니라”
와 같이
으로 난 사람은 영이 몸 안으로 들어 갈 때 <다 ‘소리’를 냅니다>”

으로 난 자’는 에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성령의 소리를 냅니다>”


으로 난 자 >이러하니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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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1

“성령으로 난 사람은<다>이러하니라”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언어가 존재합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만도 6천여 종에 속한다는 학자들의 발표를 들을 수 있습니다.
(70년 중반에는 2500여 종으로 발표) 여기에 동물들이 사용하는 언어들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숫자가 될 것이며, 인간은 이 모든 언어를 다 알거나 이해 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종족의 언어는 우리가 듣기에 전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그들끼리 대화를 할 것이며, 또한 그들도 우리 한국인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역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지절거린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고, 듣기에 거북스러울 만큼 한 그들의 “주절거림”이라 할지라도 “그 것이 무슨 언어냐?”고 욱박지르고 천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결코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3:1-9
1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출생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

예배당에 나가는 사람이라면 위의 성경말씀은 누구나 다 듣고, 기억하여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많이 알려진 내용만큼 그 내용의 심각성은 결여되어있고 또 전혀 알지 못하여 무관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혹 누가 그 내용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질문을 해도 “성경을 가르친다는 사람” 자신도 옳게 알지 못하여 답하는 사람마다 그 답이 수 십 가지로 나오거나, 또는 전혀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예수님은 찾아온 밤손님 니고데모와 아주 신비스러운 대화를 하게 됩니다.(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시작합시다)

학교에서 ‘역사 선생님’은 역사를 가르치고, ‘국어 선생님’은 국어를 가르치며, ‘영어 선생님’은 당연히 영어를 가르칩니다.
니고데모는 2절에서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실 줄 아나이다, 믿나이다>입니다. 니고데모는 정말 순수하고, 정직하며, 의로우며, 분명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백에 만족하시어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그러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누구나 아주 쉽게 알 수 있도록 내용을 풀어 나갑니다.
처음에는 “이것을 하지 아니하면” “저것을 할 수 없다”라는 ‘부정의 부정문’을 도입하여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똑 잘라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태어난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이해되지만 “또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쉽게 이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계 속 --------------

영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2


예수님은 “--- 사람이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즉 육체로 또 출생되는 것이 아니라 “물로, 그리고 성령으로” <두 번째로 출생되어야 함>을 깨닫게 하려 하셨습니다.
6절. 으로 난 것은 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이니
그래서 바울은 <첫 번째 출생>은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물과 성령으로 출생되는 것”이 <두 번째 출생>이라고 분명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물로, 성령으로 출생”되는 이 <두 번째 출생의 존재>가 “신령한 자”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출생 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 것이 무엇인지 “체험하기 전”에는 어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 님은 8절에서 100% 설명의 문을 엽니다.

8절--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Born. 출생)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많은 사람에게 질문을 합니다.
8절 끝의 성령으로 난(Born. 출생) 사람은 이러하니라”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러하니라”했으니 어떻타는 것인가요??”라고 질문했을 때의 그 대답은 주로 다음과 같았습니다.

1) “바람이 불어 올 때 그 바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렇게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사람에게 알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고 할 수 없습니다.

*
2)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성령으로 심령이 변화되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위의 설명자는 <태어남> <변화>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의 태어남은 결코 변화가 아닙니다. 먼저 태어난(출생) 존재가 후에 변화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위의 1)과 2)의 설명자는 결국 “모른다”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무엇을 모른다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하면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어리벙벙함”입니다.
그런데 9절에서 니고데모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라고 반문하는데 이는 8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서(알지 못한다)가 아니라 <신비스러움과 놀라움>으로 인한 “감탄문”입니다.


         ------------ 계 속 --------------




영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3


여러분은 <하나님께로 출생되어 질 때,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즉 하나님의 영으로 입술과 혀가 이상해지고, 알지 못하는 어떤 언어가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입에서 술술 나와 진다>면 놀라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아마도 “내가 왜 이러지! 누가 내 대신 내 속에서 말을 하지! 이 소리가 어디서 오며, 누구에게 하는 소리지!”라고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랍비(선생)입니다. 성경을 많아 아는 사람이요 가르치는 사람이므로 예수님 말씀의 내용을 충분히 알고, 이해하지만 <믿지 못할 만 큼>의 놀라움의 표현으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로 응수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8절의 내용을 “알 수 없다”가 아니라 100% 알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구원받는 일에 관한 질문과 그 대답>이 알쏭, 달쏭 이해 할 수 없도록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사람을 향한 설교 말씀은 어떻게 해서라도 잘 이해 되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취하셨는데, 직설적으로, 때로는 예화를 들어, 어떤 때는 쉽고 단순한 표현법으로 해 오셨음을 우린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한번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순수하고 더러움이 없는(사람의 유전 따위를 모르는) “순전한 마음의 소유자”이어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덮지 말고 폅시다.

“영”이란 단어는 pneu/ma(푸뉴마)이며 원어에서는 “성령”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성”자가 없이 그냥 “영”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영으로 나지 아니하면(출생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그런데
요 3장 5절부터 8절까지에는 우리나라 성경이나 영어성경 KJV에 “영”(Spirit)이란 단어가 4번만 나오는데 원어 성경에서는 “영”(pneu/ma)이란 단어가 5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 다섯 번째의 “영”(pneu/ma)이란 단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많은 경우의 번역자들은 직역하기를 피하고, 자기가 속해있는 교파 교리를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 교리에 맞도록 번역하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나라 성경번역에서 그릭어 “밥티조”라는 단어를 “침례”로 하지 않고 “세례”로 한 것이나, 고유명사 “여호와”란 이름 대신에 “주”라고 쓴 것이나 ----중성명사를 “셋”이란 단어를 인격체로 표현하여 “세분”이라고 한 것 라든지 ------
이제 제 5번째의 “영”(pneu/ma)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8절에서 “바람”이란 단어가 바로 그 것입니다.
물론 원어의 pneu/ma의 뜻은 영, 호흡, 바람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지만 “영”이란 단어 대신 “바람”이란 단어 사용은 그 뜻이 전혀 다르거나 혼미하게 되어 집니다.
원어를 아는 사람이 그대로 읽으면 아무런 걸림이 없이 이해되지만 우선 한국어로 “바람”이란 단어 사용은 몇 가지 잘 못된 멧세지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말”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여러 뜻이 있지만 그 단어를 합당하게 써야 말이 통하듯 말입니다.

장기 말은 말(馬)이 아니고, 말(言)이 없으면 말(末)이 되고, 말(斗) 가지고 말(이웃집에 놀러) 간다


*말
장기 말은 말(馬)이 아니고, 말(言)이 없으면 말(末)이 되고, 말(斗) 가지고 말(이웃집에 놀러) 간다,

*Pear
뱃군(배의 군. seaman)이 배(베)옷을 입고 배(Boat)를 타고 배(Pear)를 먹으니 배(stomach)가 배(Double)나 부르다.

*만약 위의 글에서 <뱃군(배의 군. seaman)이 배(베)옷을 입고 배(stomach)를 타고 배(Boat)를 먹으니 배(Pear)가 배(Double)나 부르다.>라고 했다면 누가 이해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한자기 살펴봐야 할 ‘번역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영’(靈)으로 번역된 원어 ‘푸뉴마’는 신약성경에 344회 인용되었고,
그 중에 ‘마음’(10회), ‘생기’(2회), 바람(2회) 기운, 일심, 중심, 정신으로 각각 1회로 합 18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영, 성령, 귀신, 영혼, 심령”(344-18=326회)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푸뉴마’를 ‘마음’으로 번역된 것도 최상의 단어 선택이 아니지만 실은 ‘마음’이란 단어 대신 그냥 ‘영’(靈)으로 번역 했으면 혼동되지 않고 더 이해가 잘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푸뉴마’를 ‘바람’으로 번역된 구절은 요3:8과 히1:7 뿐으로 성경의 원뜻을 오해하도록, 혼동되도록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히1:7도 동일하게 ‘바람’대신 ‘영’으로 ---)
(히1: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영(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요3:8 첫 머리에 ‘바람’대신 ‘영’으로 대치하면 더 더욱 이해가 쉽고 진리를 분명하게 나타내게 됩니다.

요3:8 영(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영으로 난 사람(모두)은 다 이러하니라'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는 분명 앞머리의 ‘바람이 임의로 불매’에서 “바람의 소리”를 지적합니다.
“영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는 문맥에서 ‘영으로 난 사람’은 “다 바람소리를 낸다.”는 논리가 성립되겠죠.

성경은 “영으로 난 모두”가 “다 그 소리가 난다”고 설명되고 있는데
어찌 영으로 난 모두가 “다 바람소리’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원어에서 “푸뉴마”을 “영”으로 번역하여 읽어보면 예수님의 멧세지가 분명하고도 이해 될 수 있게 됩니다.

바람대신 영으로 하면
<영이 임의로 행하시매(행하시매, 또는 역사하시매) 네가 그 소리(영의 소리, 방언)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영으로 난 모두가 다 이러하니라'(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처럼 성령의 소리가 나느니라)>

<원어에 가장 가까운 요3:8의 번역>
‘영이 임의로 역사하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영으로 난 모두가 다 이러하니라’가 옳은 번역이 됩니다.

이런 재번역과 해석이 「기존의 번역을 무감각으로 저장 해둔 사람」에게는 억지나 황당한 것 같지만 사도행전 2장1-4를 연결해 보면 100% 정립이 됩니다.


행2:1-4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 4절에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이라 함은
요3: 8절에서 성령이 임의로 역사하시매 그 소리(성령의 소리)와 직결됩니다.
다시 설명한다면 <방언에 대한 정의>는--- 성령에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는 소리가 “방언”입니다.
고로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는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처럼 성령에 소리, 방언의 소리가 나느니라”로 이해되고 믿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써 남”(거듭남, 또 출생됨)에 대한 설명을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도록 실지로 “출생”에 대한 경험적 사건과 직결시켜 “태어난다”(Born)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태어남은 변화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두 번째로 태어남”(거듭남)이란 뜻을 “변화”로 가르치고, 그렇게 믿도록 하고 있습니다.
“변화”는 ‘태어난 사람’이 “변화”하는 것이지 ‘태어나지 않았으면 변화란 단어가 해당되지도 않는 <무 존재>’라는 것을 대개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0-4번까지는 사람의 “육(체)으로 태어날 때”와 “성령으로 태어날 때”를 비교 한 것입니다.

         ------------ 계 속 --------------






영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5


육으로 출생 시
0) “”가 9개월간 어머님 몸 안에서 성장하여 사람의 모양이 되어지고, 때가 되면
1) 아기가 어머니 몸 밖으로 나와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갈 때 <태어남>의 표적으로 울음의 “소리”가 납니다. 출생의 “표적 울음”
2) 첫 번 “소리” 뒤에 두 번째 “소리”는 1)과는 뜻이 다른 “소리”입니다.
3) 이후로 계속 여러 종류의 “소리”가 지속되면서 “언어”라는 형태로 바뀌어 집니다.
첫 번 체험의 “울음소리” 뒤에 “소리”는 <은사로 주어지는 소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리”는 ‘별로 말 같지도 않던 소리’가 어느 날 “언어다운 소리”로
변하게(율동적, 액쎈트, 감정 등) 되어 자기 모국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외국어도 하게 되구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1)의 울음을 운 후로는 “소리”가 언어로 바뀔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벙어리 혹은 “농아”라고 하죠.
4) 태어난 사람은 성장하게 되는데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건강과 용감하여
훈장도 달고, 높은 지위와 권력도 소유하며,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병들기도 하고, 또는 병들어 죽기도 하며, 사고로 죽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
살기가 싫어 자살도 합니다.

성령으로 출생 시
0) “말씀”의 “”가 사람의 마음 안에서 필요한 기간동안 성장, 믿음이 익고, 때가 되면
1) “하나님의 영”이 몸 안으로 들어갈 때 <태어남>의 표적으로 울음의 “소리”가 납니다.
이러한 “소리”를 성경적으로는 출생의 “표적방언”이라고 합니다.
2) 첫 번 “소리” 뒤에 두 번째 “소리”는 1)과는 뜻이 다른 “소리”입니다.
3) 이후로 계속 여러 종류의 “소리”가 지속되면서 “언어”라는 형태로 바뀌어 집니다.
첫 번 체험의 “울음소리” 뒤에 “소리”는 <은사로 주어지는 소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리”는 ‘별로 말 같지도 않던 소리’가 어느 날 “언어다운 소리”로 변하게(율동적, 액쎈트, 감정 등) 되어 “유창한 언어”가 됩니다.
이런 언어는 “모국어”에 속하는 <하나님과의 비밀을 말함>이라면 <다른방언>은 외국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를 성경적으로는 “은사방언”이란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1)의 방언을 한 후로는 “소리”가 언어로 바뀔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 벙어리 혹은 “농아”라고 하듯이 “은사 방언”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4)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속사람은 성장하게 되는데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병들기도 하고(믿음이 연약함으로), 또는 병들어 죽기도 하며, 사고로 죽기도 하고(마귀의 공격으로), 때로는 하나님 나라 가기를 포기하여 자살(믿음을 버림)도 합니다.


(체)으로 난 사람은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 갈 때 ‘소리’를 냅니다”
(체)으로 난 사람은 이러하니라”
와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성령이 몸 안으로 들어 갈 때 <다 ‘소리’를 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성령에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 ‘성령의 소리’를 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 >이러하니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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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03-06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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